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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구평화를 위한 문학을 꿈꾸며-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 참관기

  전 세계, 그리고 국내의 작가, 철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들이 모였다. 오직 한가지, ‘평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평화를 위한 글쓰기 Writing for Peace’라는 주제 아래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이 지난 5월 24일(화)에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작되어 26일(목)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공동주최로 열린 이번 행사에 초대된 작가와 시인들은 이른바 내로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를 비롯해 르 클레지오, 베이다오, 오르한 파묵, 장 보드리야르 등 20여 명의 작가, 철학자들과 고은, 백낙청, 황석영, 황지우, 김영하, 최장집 등 국내의 작가와 학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참가자들은 오늘날 지구촌을 휩쓰는 전쟁과 테러리즘을 넘어 250년 전 이마누엘 칸트가 꿈꿨던 ‘영구평화 ewigner Friden’의 소망을 문학을 통해 어떻게 이룩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들을 나누었다. 또한 영구평화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 참가자들은 개별 세션에서 모더니티, 자연과 생태, 독재와 전쟁, 매체와 언어, 성과 인종, 동아시아와 세계질서 등에 대해 진지하고도 공감어린 견해들을 피력했다. 참가자들의 발제와 토론, 이어진 질의와 답변 속에는 200년 전, 쾨니히스베르크에 살았던 한 노(老)철학자의 꿈이 다채롭게 변주되고 있었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영구평화에 대하여」(1795)라는 글에서 인간에 내재한 근원적 “적대의 영원한 종식”을 꿈꾸었다. 칸트는 동시대의 계몽철학자들과 함께 인류가 진보하고 성숙한다는 희망을 공유했지만, 계몽에 내재한 근원적 적대라는 어두운 이면을 놓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칸트의 희망이 국제연맹 등으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사실은 칸트의 계몽이 얼마만큼 달성하기 어려운 일인지에 대한 단적인 예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전 세계는 다시 전쟁과 테러리즘의 세상이 되었다. 김우창, 최장집 교수가 암시한 바 있듯이, 확실히 오늘날은 영구평화를 설파한 칸트보다는 동지와 적을 구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 칼 슈미트의 시대에 더 가깝다. 나치협력자이자 국제법을 조소한 공법학자 슈미트는 국제열강들이 힘의 균형을 이룬 채 세계를 분할 통치할 때 평화는 유지된다고 보았다. 2003년 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전쟁에 반대한 사람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농담이 유행했다. 부시가 말한다. “나는 이라크 어린이들과 영국의 자전거 탄 할머니 한 사람을 죽일 거야.” “왜 하필이면 영국의 자전거 탄 할머니지?” “거봐, 너희들은 내가 이라크 어린이들을 죽이는 거에 관심 없어 하잖아.”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파병을 했고 또 막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피의 대가로 평화를 사 두 발을 쭉 뻗고 달콤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도피해 꿈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으로 도피해 꿈꾸듯 살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침묵의 공범자다.

  이러한 야만과 몽매의 시대에 문학(인)이 할 수 있는 것, 인식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오에 겐자부로는 엘리어트의 시를 빌려 다음처럼 말한다. “우리는 나즈막이 움직이기 시작해야 한다.” 그는 전후 일본의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려는 일본의 급속한 우경화의 흐름을 우려하는, 작지만 소중한 시민들의 모임 - 오에 자신을 포함한 - 이 현실화되고 있으며, 생애의 마지막 작품이 될『안녕, 나의 책들이여!』 또한 그러한 염원에서 쓰게 된 것임을 감명 깊게 이야기했다. 그에게 글쓰기와 한 사람의 시민, 지식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1784)이라는 글에서 이성의 공적(公的) 사용과 사적(私的) 사용을 분리하면서 일종의 전도를 성취했다. 예를 들어 칸트는 공무원이 자신의 공적인 업무를 맡는 것이 오히려 이성의 사적인 사용이며, 공무원으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때로는 공무원으로서의 임무와도 대립되는 시민적 임무(예를 들면, 비리폭로 등등)를 수행하는 것을 이성의 공적인 사용으로 보았다. 그런 경우, 이성의 공적 사용은 공무원으로서의 자신의 위치, 때로는 생명에 위협을 줄 수도 있다. 참으로 상식을 뒤집는 발상이다. 그렇게 볼 때, 문학을 출판하는(publish) 행위는 공적(public)이지만, 오늘날 문학(인)의 역할은 점점 더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보편적이면서 공적인 것을 목소리 높여 강변해야 하는가. 또한 그렇지 않다. 문학은 선험적인 진리나 주장을 강요하지 않는 한에서, 그런 한에서만 보편적일 수 있다. 평론가 유종호 교수가 예로 든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그러한 문학의 보편적 사례이자 문학 그 자체가 보편적일 수 있음을 역설하는 오래된 사례다. 국가라는 공적 질서에 맞서 오빠의 장례식을 고집하는 안티고네의 욕망은 국가의 편에서 볼 때 희생해도 좋은, 극히 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가는 이성의 공적 사용을 가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사적인 사용만을 한 개인에게 강요하고 있다. 결국 안티고네의 ‘사적인’ 주장은 크레온의 ‘공적인’ 국가를 괴멸시켰다. 그것은 사적인 삶에 대한 옹호 따위가 아니다. 2500년 전의 『안티고네』가 당시의 재판과 소송을 무대화해서 보편적인 인간비극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오늘날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이 헌법 9조를 수호하기 위한 연대의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문학이 오늘날 무엇을 제대로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예였다.

  문학은 현실인식의 발단이며 결과이지만, 또한 현실과는 다른 지평에서, 그보다 나은 현실을 위해 꿈을 꾸는 허구적 창작행위이기도 하다. 문학은 현실과 그 재현에 관심을 두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을 창조적인 허구로 재현하는 예술 활동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학은 르포와 다를 바 없다. ‘평화를 위한 글쓰기’는 평화를 호소하거나 부르짖는 선언문이 아니다. 그것은 비단 문학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번 문학포럼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진실은 문학적 상상력은 자유롭고도 기발한 허구적 유희이되, 평화를 구체적으로 꿈꿀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은 세계문학사가 알려주듯, 언제나 평화와 더 나은 세상만을 꿈꾼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쟁과 폭력에 환호와 갈채를 보내는 어두운 역사도 지니고 있다. ‘평화를 위한 글쓰기’라는 주제를 위해 펼쳐 보인 서구문학사의 첫 페이지는, 다소 아이러니컬하다. 미국시인 로버트 하스의 말처럼, 서구문학사의 첫 장은 전쟁문학이다. 『일리아드』『오디세이아』를 보라. 그러나 서구문학사는 또한 전쟁의 무의미함과 잔인성을 전장에서 남편들을 잃은 여인들의 애도로 그려낸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이나 트로이 전쟁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아리스토파네스의 『라시스트라타』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근현대문학사는 어떠한가. 한국문학사의 가장 빛나는 업적과 장면들은 언제나 전쟁, 독재를 거슬러, 전쟁과 독재를 둘러싼 보다 넓은 질서인 근대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물음과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그려내지 않았던가. 포럼에 참석한 국내의 작가들이 바로 그 산 증인들이다.

  이번 국제문학포럼은 문학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꾸거나 사랑하며, 문학의 꿈과 희망을 다른 방식으로 공유하는 세계시민들이 모인 축제의 장이었다. 세계시민, 그것은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 인류의 평화를 꿈꾼 세계시민이었던 칸트의 꿈이며, 또한 우리들의 꿈이기도 하다. 행사 내내 작가들과 철학자들의 인상적인 생김새와 목소리, 그들의 생각과 희망을 직접 듣는 호기심과 즐거움의 시간은 계속되었다. 발제와 토론과 대화로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던 이야기들 중 어떤 것들은 우울했으며, 때로는 암담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비탄에 빠진 냉소주의적인 애가(哀歌)가 아니라, 분별력 있는 지성과 뛰어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행사 도중 청중들의 폭소를 자아낸 작가들의 유머와 위트는 바로 그러한 비판에서 나왔던 것은 아닐까. 희망은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제 모든 행사는 막을 내렸으며, 우리는 다시 칸트의 희망어린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바로, 영구평화를 위한 문학 말이다. 불의를 외면하고 방치하면 할수록 꿈과 희망도 더불어 사라진다. 그러기에 그 소망은 더욱 드물고 그만큼 고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