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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굵은 서사로 수놓아진 국내외 문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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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예언은 맞았다. 올 봄 베스트셀러 소설 부문은 외국소설이 휩쓸었지만, 우리 문단은 여유로운 편이었다. 사석에서는 "이제 곧"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김훈(59) 씨의 『남한산성』이 물꼬를 텄다. 이 책은 출간 한 달 만에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어가행렬이 청의 진격을 피해 남한산성에 든 뒤 47일 간의 기록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남한산성』은 한 달 넘게 종합 1위를 지켰다. 묘하게도 “소설은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작가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현실이 과연 그 시대에 한정된 것일까. 아닐 것이다. 섬김의 대상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라는 리뷰처럼, 독자들은 이 소설을 현대사와 겹쳐놓기를 즐겨 했다.
그리고 시장에 충격을 준 역사소설이 이어졌다. 스타 작가 신경숙(44) 씨가 장편 『리진』을 출간했다. 『리진』은 궁중의 무희 리진과 초대 프랑스 대리공사 콜랭 드 플랑시의 사랑을, 신경숙 씨 특유의 섬세한 문체로 그린 작품이다. 이 책도 출간 한 달 만에 10만 부 이상 팔리면서 『남한산성』의 흥행 바톤을 이어받았다.
작가들이 잇따라 역사소설을 쓰는 것은 흥미롭다. 역사소설은 대개 갖춰진 서사에 에피소드만 더하는, ‘크리에이티브’를 발휘하지 않아도 되는 장르로 여겨, ‘역사소설은 작가의 무덤’이라는 말까지 나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올해, 미드나 일드 같은 유행어를 변주하자면, ‘한소(한국소설) 바람’을 일으킨 작품들은 대개 역사소설이다. 작가 김별아(38) 씨가 전작 『미실』에 이어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역사소설 『논개』를 선보인 것도 그렇다. 젊은 작가 김경욱(36) 씨는 『천년의 왕국』에서 17세기 조선에 표착했던 네덜란드인 J.J. 벨테브레의 삶을 되살려냈다.
평론가 서영채 씨가 ‘뉴에이지 역사소설’이라는 용어를 썼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선 외부자의 시선이 필요한데, 그걸 역사에서 끌어오는 게 요즘 역사소설의 유행”이라는 것. 과거의 역사소설처럼 과거의 사실을 리얼하게, 혹은 드라마틱하게 재현하는 게 아니라, 오늘의 삶의 풍경을 보여주는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남한산성』 뿐 아니라 『리진』 역시, 애절한 러브스토리 뿐 아니라 자아를 찾으려는 여성상이 구한말이라는 무대에만 갇혀 있지 않는다는 것, 『천년의 왕국』도 조선에 귀화한 벨테브레의 자리에 국제결혼의 배우자와 외국인 노동자 같은 21세기 ‘우리 안의 이방인’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7월 황석영(64) 씨가 장편 『바리데기』를 출간했다. 바리공주의 설화는 페미니즘의 중요한 서사로 꼽히지만, 황석영 씨는 생명수를 찾아 떠도는 설화 속 소녀를 국경 없는 21세기로 데려다 놓았다. 현재의 바리는 공주가 아니라 탈북 소녀가 되어 중국과 런던을 떠돈다. 이 책은 출간 뒤 곧바로 종합 베스트셀러 7위에 진입했다. 작가는 장편 『손님』과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에 이르기까지 “현실적 내용을 우리 형식에 담는다”는 기획을 실천하고 있는데, 이 묵직한 주제의식이 시장에도 울림을 주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그만큼 ‘웰메이드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수요가 부풀었다는 것.
이제하(70) 씨가 장편 『능라도에서 생긴 일』과 이동하(65) 씨가 단편집 『우렁각시를 알까?』를 내는 등 중견 원로 소설가들도 열정적인 창작욕을 과시했다.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로 지난해 히트를 친 정이현(35) 씨가 7월 낸 단편집 『오늘의 거짓말』도 반응이 좋은 편. 윤성희(34) 씨의 『감기』, 편혜영(35) 씨의 『사육장 쪽으로』, 김미월(33) 씨의 『서울 동굴 가이드』 등 젊은 여성 작가들의 속 여문 단편집도 오늘의 우리 문학을 풍성하게 했다.
시단은 차분하면서도 풍요로웠다. 중견 시인과 젊은 시인이 고루 알찬 시집을 선보였다. 김광규(66) 시인의 『시간의 부드러운 손』은 시가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장르임을 새삼 일깨운 시집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짜인 시의 힘이 크다. 문정희(60) 시인의 『나는 문이다』, 이시영(58) 시인의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김정환(53) 시인의 『드러남과 드러냄』도 중견의 위력을 증명한 시집이었다. 올 1학기를 끝으로 서울대 교수를 정년퇴임한 오세영(65) 시인도 그간 쓴 시 1,100여 편을 묶은 시 전집을 냈다.
언어와 실존의 문제를 치열하게 사유한 이원(39) 시인의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여성과 생명, 관능의 이미지를 더욱 깊이 있게 천착한 김선우(37) 시인의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우리 시의 낯선 지평을 연 ‘미래파’의 선구자 김행숙(37) 시인의 『이별의 능력』, 푸릇한 시어로 존재의 의미를 탐색한 신용목(33) 씨의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젊은 세대로 이어지는 왕성한 생산력으로 인해 우리 시는 늘 젊다.
일류(日流)가 넘쳐났던 출판계가 이번엔 중국 소설로 들떴다. 『허삼관 매혈기』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위화(余華)의 신작 『형제』가 번역 출간됐고, 영화 <홍등>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쑤퉁(蘇童)이 장편 『나, 제왕의 생애』의 출간과 함께 방한했다. 올 들어 한국문학은 세계문학과 겨루기 위한 장편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분위기인데, 선 굵은 서사가 강점인 중국 소설의 유입은 국내 작가들에게 장편 창작의 열정과 활력을 북돋웠다는 분석도 나왔다.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 최종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도들』 영문판이 7월 출간됐다. 작가가 “등장인물 중 2명 이상이 죽을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독자들의 관심이 부풀어 올랐던 터다. 발간 첫날 영국과 미국에서만 1천1백만 부 이상 팔릴 만큼 유명세에 값했다. 한국에 유난히 강한 프랑스 대중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도 번역 출간 직후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면서 여름 독서시장을 휩쓸었다.
최고령 문인으로 꼽힌 수필가 피천득(1910~2007) 옹이 세상을 떠났다. ‘인연’을 비롯한 자신의 많은 수필처럼 담백하고 순수한 삶을 살다 갔다. 시인이자 무용평론가로,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표지 캐리커처를 그려온 화가로 전방위 예술 활동을 펼친 김영태(1936~2007) 씨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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