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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겹쳐

TV는 늘 겹쳤다. 화면이. 그리고 흔들렸다.

TV는 뒷집의 재산목록 1호였다. 부산의 친가로 명절을 쇠러 가거나 여름휴가를 떠날 때, 뒷집은 그 재산목록 1호를 우리 집에 맡겼다. 72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우리는 TV가 없었다.

학교가 파하길 기다렸다. 공부가 안 됐다. 어서 집에 가서, 겹치는 화면이나마 TV를 보고 싶었다. 뒷집이 친가나 여름휴가에서 돌아오기 전에 실컷 봐야 했다. TV가 없었으므로 우리 집엔 안테나선도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TV 화면이 겹쳤다.

누나는 흔들리고 떨리는 푸른 화면으로 주말의 명화를 봤다. 레오나드 화이팅, 올리비아 핫세, 제임스 딘, 줄리 해리스를 연필로 적어가며. 구로공단에 다니던 누나는 주말의 명화를 봐야 유식해지는 거라고 했다.

우리 집 옆에 경인 복덕방이 있었고, 그 안에 TV가 있었다. 장욱제와 태현실이 나오는 <여로>를 방영했다. 바깥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와 누나는 줄거리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경인 복덕방 창밖을, 주말 저녁마다 하릴없이 오갔다. 창문에 매달려 보자니 부끄럽고 창피해서, 복덕방 아저씨가 용납할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일이 있어 길을 오갈뿐이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연신 복덕방 앞을 오가며 가재미눈으로 흘낏 흘낏 <여로>를 봤다. 그렇게 <여로>를 뗐다.

누나의 꿈은 유식한 사람이 되어서 공단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TV에 나오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누나는 ‘국졸’이었다.

전세 보증금에 얼마를 더 보태어 드디어 우리 집을 샀다. 작고 좁고 낮은 집이었지만 다락방까지 있었다. 구로동 400번지 16호.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철도변이었다. 기차가 지날 때마다 TV 화면이 겹치고 흔들렸다. 구멍 같은 다락방 창문을 통해 기차가 지나는 것이 보였다. 이수만의 ‘모든 것 끝난 뒤’라는 노래를 다락방에서 익혔다.

연말이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방영했다. 세상은 크리스마스, 연말연시로 들떠 있었다. 크리스마스든 연말연시든 나와 누나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나는 이불 밑으로 자신의 종아리를 연신 문질렀다. 예쁜 다리를 갖고 싶어 했고, 멋진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흰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남자와.

징글벨 노래가 연신 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이어라는 말이 쏟아졌다.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오누이가 안돼 보였던지 어머니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얼마 뒤 우리가 덮고 있는 이불 위에 새우깡 한 봉지가 툭 떨어졌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쥐처럼 아작아작 갉아 먹으며 겹치고 떨리는 TV화면을 봤다.

누나는 영어도 못 배웠으면서 열 세 살짜리의 캐나다 소녀와 국제펜팔을 했다. 국제 펜팔 가이드북의 예문을 열심히 베껴 보냈다. 편지 속의 누나는 대학생이었고, 멋진 남자 친구가 있었다. 문제는 캐나다 소녀에게서 오는 답장. 영어 성적 60점대 중학생인 주제에 나는 밤새워 캐나다 소녀의 편지를 번역했다. 누나는 국제적인 인물이 되고 싶어 했다.

누나는 3년 동안 줄창 따라다니던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는 국제적인 인물과도 제임스 딘과도 거리가 멀었다. 영세한 회사의 고졸 경리담당이었다. 누나는 학력을 중졸로 속이고 그와 결혼했다. 그가 좋아서가 아니라, 나이가 차도 누나를 좋다고 지극정성 따라다닌 사람이 그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구로3동에다 만화가게를 냈다. 공중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집단 주거지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도시 빈민을 위해 지은 조립식 주택단지였다. 벽마다 틈이 벌어져 있었고, 그 틈새로 옆집 친구 어머니의 목욕장면을 보았다.

만화가게를 하려니 TV가 필요했다. 처음으로 동남샤프 TV가 생겼다. 네 개의 긴 다리, 미닫이로 열고 닫는 TV는 훌륭한 가구였다. 하지만 그것은 자가용이 아니라 영업용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10원 주고 보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이회택 선수가 이스라엘 골문에 공을 차 넣는 멋진 장면을 보았다. 이스라엘에서 오는 화면은 흐렸고 떨렸다.

결혼 뒤 누나는 강성 노조원이 되었다. 머리끄덩이를 붙잡혀 몇 차례 경찰서에 잡혀 갔다 온 뒤로 누나는 노조부위원장이 되었다. 기자가 누나를 취재했다. 신문에도 났다.

누나는 더 이상 국제적인 인물이 되려 하지 않았다. 제임스 딘과 같은 서양 남자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누나의 입에서 식민의식, 제국주의, 라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슬슬 그런 누나가 낯설어졌다. 우리나라가 식민지라는 거 알아? 우리나라 안에도 식민지가 있다는 거 알아? 우리나라 안에도 식민백성이 있다는 거 알아?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그런 말들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구로동에도 아파트가 생겼다는 사실 따위에 공연히 뿌듯해 할 뿐이었다. 보충대가 철수한 부지에 시영 아파트가 섰다. 그곳에, 장차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의 부인이 되는 탤런트가 산다고 했다. ‘구로동에 탤런트가 산다.’ 구로동을 얕보고 깔보는 친구들에게 해 줄 말이 생겼다는 것이 기뻤다. 나뿐만 아니라 구로동 친구들은 모두 그녀의 팬이 되었다.

군대를 다녀오자 부모님은 신월동 연립으로 이사를 해 있었다. 누나는 여전히 구로동에 남아 있었다. 아파트는 아니지만 구조며 입식부엌이 아파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무한히 고무되었다. 그러나 TV는 여전히 겹쳤고 떨렸다. 연립이 김포공항을 이착륙하는 비행기 길에 정확히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그 즈음, 공단을 탈출하려던 누나의 꿈은 결국, 나라를 탈출하려는 망명의 꿈으로 바뀌었다. 너무 많이 끌려 다녔고, 너무 많이 얻어 터졌다. 한국에 사는 한 구로공단의 공원 신분을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친정집 지붕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고 TV 화면이 겹칠 때마다, 저걸 타고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어, 라고 말했다.

결국 누나는 어디로도 떠나지 못했다. 얼마 뒤 안산으로 이사를 갔지만, 더 이상 공장을 다니지도 않았지만, 누나의 우울은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누나는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보수를 받는 일도 아니었으나 누나는 매일 ‘삶터’라는 좁은 사무실로 출근해 이주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일은 고된 것 같았지만 마침내 누나의 얼굴에 웃음이 피기 시작했다. 누나는 이주노동자들을 새로운 가족이라고도 했고 심지어는 새로운 민족이라고도 했다.

그러면 누나에겐 새로운 나라도 있는 거겠네? 그 나라로 망명한 거야? 내가 묻자 누나는 ‘독립군처럼 싸울 뿐’이라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6년을 그리 살았다. 그들과 함께 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걸핏하면 밤을 새고, 소송을 걸고, 명동성당으로 달려가 시위를 했다. 위암이 걸려 병상에 눕기 전까지 누나는 꼭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다.

소생의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누나는 내게 말했다. 나 죽으면 말야, 태워서, 새우깡처럼 아작아작 갈아서, 바다에 뿌려 줘.

바다?

훨훨 떠다니면서, 사해동포들을 만나려고.

바다로 망명하는 거야?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누나는 씨익 웃었다.

지난 달 하순 누나는 세상을 떠났다. 누나의 원대로 누나의 유해를 바다에 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장례의 권한은 온전히 누나의 시댁인 여주 장씨들에게 있었다.

누나는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고 2평방미터밖에 안 되는, 시댁의 선산 좁은 땅 속에 묻혀버렸다.

장례를 치른 뒤, 함께 일했던 자원봉사자들과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나는 ‘삶터’에 모여 누나의 생존당시 모습들을 보았다. TV 자료화면, 자체 제작한 캠코더 기록물들. 웃고 울고 흥분하는 누나의 표정들이 흘러갔다. 하지만 화면이 겹치고 떨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TV가 겹치잖아! 내가 말하자, 방글라데시에서 온 쟈심이란 청년이 유창한 한국말로 대답했다.

울어서, 눈물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