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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태동한 21세기의 만화경 - 과학소설(SF)

<기획특집 : 문학과 과학 1>

20세기에 태동한 21세기의 만화경

- 과학소설(SF)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가 요란한 논쟁의 주인공이 되면서 SF라는 장르도 새삼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필자로서는 SF에 대한 기존의 편견들에 새롭게 하나가 추가될까봐 좀 우려하고 있는 입장이다. <디 워>를 보고 난 사람들은 ‘SF는 스토리가 빈약해도 볼거리만 화려하면 된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즉 ‘SF소설은 서사가 허술해도 아이디어만 기발하면 된다’고 단정해 버리진 않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SF에 대한 편견들
사실 <디 워>는 그나마 SF를 조금이라도 익숙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 대중들은 원래 SF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의 뿌리가 깊었다. 우선 ‘SF는 아이들이나 보는 유치한 통속적 대중 소설’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고, 그렇지 않으면 ‘어렵고 복잡한 과학 이론을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일부 소수 독자들의 지적 유희’라는 선입견도 많다. 하지만 둘 다 옳은 생각이 아니다. SF에는 통속적인 오락 소설들도 많지만 뛰어난 예술성과 문학성을 공인받은 걸작들도 적지 않다. 미국의 어느 작가가 ‘SF의 90%는 쓰레기지만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라고 말했듯이, 옥석을 가려야 하는 것은 순수문학을 포함해서 어느 분야나 다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창작의 목적과 태도, 그리고 독자의 수용 미학은 일방적인 잣대로 우열을 가르기가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SF에 등장하는 과학 이론들의 경우 대부분 중학생 정도의 과학 상식만 있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좀 어렵다 싶은 과학을 구사하는 SF는 ‘하드(hard)SF’라고 해서 별개의 분야로 존재한다.

사실 SF는 그 명칭 자체에서 태생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의 ‘사이언스’를 ‘자연과학’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픽션’보다는 ‘사이언스’에 더 주목해서 과학 계몽용 문학으로 단정해 버리기도 한다. 이 또한 너무나 근시안적인 관점으로만 SF를 보는 것이다.

SF소설들 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H.G. 웰스의 『타임머신』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만 보더라도 ‘사이언스’가 결코 자연과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인문과학까지 총괄하는, ‘이성과 합리로 설득력을 갖춘 최소한의 형식논리’의 총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두 작품에 나타나는 극단적인 계급성의 대비는 현대사회에 대한 통렬한 진단과 비판을 암울한 미래 전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시간여행이나 미래세계의 모습 등 지엽적인 아이디어에만 주목하다보면 이 작품들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간과하기 쉽다.

자연과학이라는 좁은 틀로만 SF를 바라보는 입장은 적어도 SF의 초창기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SF장르의 형성에 기여한 작가 중 하나인 휴고 건즈백(Hugo Gernsback)은 1926년에 ‘SF란 과학적인 이론과 미래의 전망이 허구적인 이야기로 결합된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지만, 이것은 이미 수십 년 전에 폐기된 낡은 시각이다. 그 뒤로 SF장르 자체가 매우 역동적으로, 흥미롭게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SF를 더 이상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받아들이지 않으며, 엄밀하게 따지면 본질적으로는 ‘스페큘레이티브 픽션(Speculative Fiction)’, 즉 사고소설이나 추론소설에 가깝다고 여기고 있다. SF를 단순히 과학계몽소설로 보는 입장은 완전히 색이 바랜 것이다.

SF만의 감성적 정체성
그렇다면 SF는 무엇을 어떻게 사색하고 추론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SF를 읽으면 읽을수록 간단하게 대답하기가 난감해진다. 형식적으로야 ‘다가오지 않은 미래, 혹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정한 과학적 논거를 지닌 이야기’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핵심은 SF를 읽고 쓰는 사람들만의 독특한 감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SF팬과 일반 독자를 구분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로써 필자가 즐겨 인용하는 시가 있다.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

- 정지용, 「서시」『문학독본』(1948)

SF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분기점은 바로 이 시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누구든지 삶에서 꿈꾸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은유적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SF독자들은 그에 더해서 ‘별똥별’이라는 구체적 물체에도 묘한 이끌림을 느낀다. 별똥별이 떨어진 곳을 정말로 찾아가 보고픈 생각도 들고, 혹시 그 별똥별에 무엇이 담겨있지는 않을지 상상의 나래가 마구 펼쳐진다. 그러면서 어느새 별똥이 떨어진 곳보다는 별똥이 온 곳, 즉 우주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정서의 흐름은 SF뿐만 아니라 판타지문학 애호가들에게서도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SF독자들은 ‘마법’대신 ‘과학’을 택한다는 점이 다르다. 설령 마법처럼 보이는 것이더라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지 상상은 무제한으로 할 수 있지만 실제 구현 과정에서는 과학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작품들마다 이 합리성의 경계가 모호해 질 때도 있지만, 아무튼 SF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은 최소한의 과학적 형식논리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SF팬들이 별똥별을 보고, 또는 우주를 보며 느끼는 그 특별한 정서는 과연 무엇일까? 서양에서는 흔히 그것을 ‘경이감(sense of wonder)’이라 표현한다. 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접해보지 못한 뭔가 낯설고 놀라운 대상, 그리고 그 존재로 인해 연상되는 온갖 미지의 가능성들. 특히 SF문학에서는 활자매체 특유의 상상력 자극 작용에 의해 SF영화보다 더더욱 증폭된 경이감을 맛보게 된다.

이에 더해서, SF를 읽고 쓰는 사람들은 인류사회학적으로 그 실체를 명확하게 포착할 수도 있다.

SF의 독특한 시야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모인 싱크탱크인 ‘로마클럽’은 1972년에 인류 문명의 근미래를 암울하게 진단한 보고서 『성장의 한계(Limits to Growth)』를 내놓은 바 있다. 당시는 대단히 충격적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불길한 시나리오(자원고갈, 인구폭발, 환경오염 등)가 예상보다는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상태이다. 어쨌거나 그 보고서의 도입부에는 흥미로운 도표가 하나 자리 잡고 있는데, 사람들이 시공간적으로 얼마나 멀리, 또 나중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를 인류통계학적으로 나타낸 ‘인간의 시야’라는 그림이다. 그 그래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공간적으로는 자기 마을, 자기 도시, 자기 나라 이상은 벗어나지 못한다. 시간적으로도 1년 뒤, 10년 뒤가 제일 많고 백년 이후 후손들까지 고려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인류 대다수는 원점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이들은 그야말로 자기 입에 풀칠하느라 바쁜, 일터와 집만을 오가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삶의 시야에 갇혀 지낸다(물론 그런 삶을 살면서도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은 있다) 또는 기껏해야 자기 가족만 생각하며 1년 이상을 내다보지 못하는 삶의 시야를 가지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보고서는 이 그래프 상에서 원점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들, 즉 ‘시간적으로는 몇 세대 이후의 후손들까지 생각하고 공간적으로는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와 그 밖의 우주까지 아울러 사유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람직한 미래 인류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시야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야 인류가 문명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계속 영위할 수 있다는 말이다. 현대 SF의 본령은 바로 이런 넉넉한 시야를 바탕으로 거시적, 미시적 제재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즉 이런 시야를 지닌 사람들이 정통적인 의미의 SF작가이자 독자인 셈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SF와 관련해서 아래와 같은 유념할만한 언급을 했다.

‘학생들에게 역사 과목은 가르치면서 왜 미래학 과목은 없는가? 우리가 지금 로마의 사회 제도나 봉건시대 장원의 대두를 탐구하듯이 왜 미래의 가능성과 개연성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과목은 없는가?

...SF를 문학작품이 아니라 일종의 미래 사회학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예측의 습관을 길러내는 정신확장력으로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어린이들에게 SF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어린이들에게 우주선과 타임머신에 관해 알려줄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 부딪치게 될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윤리적 문제의 정글 속을 상상력을 발휘해 탐험해 보도록 이끌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SF는 ‘미래의 나’를 위해 읽혀져야만 한다.’

- 『미래쇼크 Future Shock (1970)』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달해서 마침내 인간의 생물학적인 세대교체 속도를 추월해 버리는 세상이 21세기이다. 시대와 교감한다는 문학 고유의 미덕은 이미 SF의 방법론이나 틀거지를 가져오지 않고는 더 이상 이룩되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문학계도 이제 SF에 대해 가졌던 그간의 온갖 선입감이나 오해를 극복하고 이 역동적인 장르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