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십여 년 전에 쓰던 검은색 휴대폰을 찾기 시작한 것은 오후 세 시 무렵이었다. 이응이 제대로 눌러지지 않게 된 후로 전화번호를 등록할 때면 사람들의 이름을 영어로 적어야 했던 휴대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낡은 휴대폰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고장 난 선풍기 때문이었다. 선풍기는 누군가 이사를 가면서 버리고 간 것이었다. 한 겨울이었는데 선풍기 한 대가 재활용 쓰레기장 앞에 버려져 있었다.
그 해 겨울은 늑막염에 걸려 고생을 한 해였다. 세탁기가 말썽을 부려 A/S 기사를 다섯 번이나 불러야 했고, 남동생이 유서를 써 놓고 가출을 해서 경찰에 실종신고를 해야 했고, 바퀴벌레가 싱크대 아래에서 기어 나와 집 전체를 소독해야 했고, 글씨가 보이지 않아 돋보기를 맞추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하얀 눈을 맞으며 버려진 선풍기를 보자 그녀는 갑자기 눈물이 돌았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선풍기를 들고 계단을 올라오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전원을 연결한 뒤, 1단을 누르자, 거실 한가운데로 눈이 날렸다. 그 풍경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그녀는 순간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한 번도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나뭇가지에 별을 매다는 어린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아홉 살 무렵이었다.
여동생은 줄이 엉킨 반짝이 전구를 거실에 펼쳐놓았다. “언니, 이거 어떻게 해?” 남동생은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쉿! 조용히 해. 엄마 깬단 말이야.” 그녀는 동생에게 말했다. 남동생을 임신한 뒤로 어머니는 종일 잠만 잤다. “크리스마스 날에 태어나면 좋을 텐데.” 그녀는 여동생과 함께 엉킨 전선을 풀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동생은 참을성이 없어서 전선을 풀다 금방 포기했다. 선풍기는 육년 동안 탈 없이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열대야가 한창인 여름밤에는 선풍기 엔진이 과열되어서 집에 불이 나는 악몽을 종종 꾸었다. 그런 선풍기가 점심을 먹던 중에 멈추었다.
콩국수를 먹던 참이었다. 국수를 후루룩 삼키면서 그녀는 만약 어머니가 살아 있다면 뭐라고 할지 생각해보았다. “거봐. 먹어보니 괜찮지.” 맷돌에 콩을 갈아 직접 콩국수를 만들던 어머니는 큰딸이 콩국수를 입에도 대지 않는 걸 늘 서운해 했다. 그녀는 면을 씹으면서 어머니의 음식솜씨에 대해서 자서전 어딘가에 써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이 태어난 이야기와 아버지가 경운기 사고로 죽은 이야기 사이에 넣는 것이 좋을지, 혼자 살기 시작한 스무 살 무렵의 이야기에 넣는 것이 좋을지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자
취를 시작하고 그녀가 처음으로 한 음식은 눌은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쓰지 않았다. 그건 자수성가를 한 사람들의 자서전에나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설날은 아니었지만 나는 떡국을 끓였다. 그날이 내겐 새해의 첫날이었다.” 그녀는 자서전에 그렇게 적었다. 그 장에 넣어야겠어. 어머니의 음식솜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에 대해. 어째서 그 솜씨가 큰딸도 아니고, 작은딸도 아닌, 막내아들에게 이어졌는지에 대해. 그녀는 그릇을 들고 콩물을 마셨다.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는 순간, 선풍기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로펠러는 천천히 돌다가 이내 멈추었다. 그녀는 정지 버튼을 눌렀다가 다시 1단을 눌렀다. 2단을 눌렀다. 마지막으로 3단 버튼을 눌러본 다음 그녀는 선풍기에게 말했다. “이제 널 버려야겠다.” 선풍기는 그녀의 자서전 마지막 장 어디쯤엔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신발장에서 공구함을 꺼냈다. 십자드라이버 손잡이에 희미하게 핏자국이 보였다.
선풍기를 분해하면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드라이버를 썼던 게 언제였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작년 여름에 식탁 의자가 삐걱거려 의자의 나사를 조였다. 나사를 조이고 다시 앉아보았지만 여전히 의자는 흔들렸다. 식탁은 4인용이었는데, 한 번도 그 식탁에 네 명이 앉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의자 고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허리가 아픈 이후로 그녀는 싱크대에 서서 밥을 먹는 날이 더 많았다. 모터를 덥고 있는 뚜껑을 열자, 전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모터 뚜껑 안쪽도 먼지로 꽉 막혀 있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서른 장도 넘는 행주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식당에 가면 식당 주인 몰래 물수건을 챙겨왔다. 행주로 쓰다 김칫국물 따위의 얼룩이 묻으면 창틀이나 현관 바닥을 닦고는 버렸다.
그녀는 일주일에 세 번씩 문화센터에 나가 탁구를 배웠는데, 운동이 끝나면 수강생 중에서 오 년째 남편과 별거를 하는 김영자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그래서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물수건을 훔쳐올 수 있었다. 탁구를 칠 때만 왼손잡이가 되는 김영자는 그녀보다 두 살이 더 많았지만 그녀는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영자 씨! 그렇게 부르면 그녀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영자 씨와 막국수에 막걸리를 한 잔 마시던 봄날, 그녀는 하마터면 자서전을 쓰고 있다고 고백할 뻔했다. 그녀는 노트에 ‘봄이면 사과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보았다’라고 쓰고는 자신이 왜 그런 문장을 썼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문장을 지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이 사과농장을 했다는, 가을이면 사과를 따기 위해 인부를 열 명이나 고용해야 했다는 거짓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자 씨의 잔에 막걸리를 따르면서 내가 왜 물수건을 훔쳐가는 줄 알아요? 하고 물었다. 그리곤 영자 씨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우리 집에서 부엌일을 했던 언니가 있었어요. 나와 동생은 깜빡이 언니라고 불렀죠. 건망증이 심해서요.” 깜빡이는 늘 행주를 삶았다. 아버지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남동생이 정강이를 걷어찰 때마다, 어머니가 이걸 음식이라고 했느냐고 핀잔을 줄 때마다 그녀는 늘 행주를 삶았다. “행주를 삶으면서 우는 걸 종종 봤지. 그래서 난 행주 삶는 게 싫어.” 부모님이 사과농장을 했다는 문장을 쓰고 난 뒤 그녀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농장을 크게 했다면 가정부가 집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깜빡이가 탄생되었다. 깜빡이는 어린 시절 그녀의 별명이었다. 그녀는 행주에 물을 묻혀 모터를 감싸고 있는 전선들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젓가락에 행주를 감아 손이 닿지 않는 안쪽까지 꼼꼼하게 닦았다. 손톱 밑이 금방 새까매졌다.
분해했던 부품들을 다시 조립한 뒤 그녀는 선풍기를 베란다에 내놓았다. 창밖으로 우산을 쓰고 길을 걷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비가 오나? 그녀는 모기장을 열고 손을 내밀어보았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아이는 검은색 우산을 쓰고 있었다. 노란색이나 하늘색 정도는 사줘야지. 검은색이 뭐야. 그녀는 괜히 아이의 부모에게 화를 내고 싶어졌다. 별일 아닌 일에 자꾸 화가 나면 늙는 징조라는데. 그녀는 심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 그러고는 콧노래를 중얼거렸다. 몇 년 전, 에어컨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던 노래였다. 광고에 나와 흰색 원피스를 입고 춤을 추었던 꼬마 아이는 지금 드라마에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중학생 역할을 하고 있다. (중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