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를 점철해 온 폭력이나 전쟁에 맞서는 시적 대응을 생각 할 때마다 허수경 시인을 떠올리게 된다. 허수경 시인은 1988년 첫 시 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통해 역사의식과 시대감각을 독 자적인 미학으로 녹여내며 문단에 충격을 주었고, 1992년에는 두 번 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펴내며 한국 시단의 중심에 서지만, 돌연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대학에서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 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녀는 독일인 지도교수와 결혼해 독일에 자리를 잡은 후로도 모국어로 시집, 산문집, 동화, 소설 등을 꾸준히 발표하 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2018년 10월 3일 암 투병 끝에 54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허수경 시인을 안타까워하며 애도하는 동료 문인 및 독자들이 아직도 많은 듯하다. 개인적 친분을 전혀 갖지 못한 탓에 나의 애도는 그녀의 작품을 재독하며 음미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허수경 시인의 첫 시집은 청승스러운 창의 가락 으로 이웃과 세계의 아픔을 위무하면서 깊은 슬픔의 정서를 표현하는 주모적 상상력을 통해 이후 한국 여성 시의 한 계보를 형성시킬 만큼 큰 시적 파장을 던졌다. 두 번째 시집 이후에 시도되는 끊임없는 변모는 그녀의 시를 새로운 시 쓰기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데, 특히 2001 년 펴낸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의 시들은 외국 생활에 서 오는 고독,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 고고학적인 사유 등을 결합해 문 명사적이고 신화적인 시선으로 인간과 세계를 거시적으로 조감하면서 전위적이고 젠더적인 시 쓰기를 개척한다.
나는 허수경 시인의 시 세계에서 초기 시의 주모적 상상력과
멜랑콜리 못지않게 중기 시 이후의 묵시록적 비전과 기억의 변증법을
한국현대시의 소중한 자산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허수경 시인의 1주기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 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이 시집의 표제시인 「내 영혼은 오 래되었으나」에서 허수경 시인은 화자의 “영혼”을 통해 과거로 회귀하는 ‘반추적 기억’에 미래를 내다보는 ‘예 언적 기억’을 결합하면서 ‘문명사적 시선’으로 인류의 역사를 응시하고, 그것을 세속적인 동시에 신화적인 장면으로 묘사한다. 화자의 “오래” 된 “영혼”이 “빛”을 매개로 “아이”의 ‘영혼’에 스며듦으로써 전쟁·폭력·죽 음의 문명사라는 비극적 운명에 맞서 정신적·영적인 차원을 대응시키는 것이다. 2005년에 펴낸 네 번째 시 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은 세 번째 시집의 특성을 전체적으로 유지하면서 ‘문명사적·신화적 시선’을 강화하여 ‘묵시록적 비전’을 심화시킨다.
“아이들 자라는 시간 청동으로 된 시간/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 속에서 감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 이 시집에 수록된 「물 좀 가져다주어요」에서 허수경 시인은 화 자를 통해 인간의 실존과 인류의 역사를 ‘영혼의 눈’으로 조감하면서 ‘청동의 시간’과 “감자의 시간”에 대해 사유한다. 화자는 ‘반추적 기억’에 ‘예언적 기억’을 개입시켜 현재의 “아이들”에서 과거의 “감자”를 응시하는 동시에 미래의 “군인”을 응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 및 시간 구조는 낙관적 의식보다 비관적인 의식이 지 배하면서 ‘폭력의 문명사’ 및 ‘욕망의 인간성’을 더 큰 비중을 가지고 표현한다. 그러나 허수경의 시는 이에 대응하는 ‘아가’와 ‘아이’, ‘어머니’와 ‘여자’, ‘흰 꽃’ 등의 이미지를 등장시켜 두 세계를 상호 대립시키고 길항 하면서 비관과 희망을 왕복하며 ‘묵시록적 비전’을 심화시킨다. 나는 허수경 시인의 시 세계에서 초기 시의 주모적 상상력과 멜랑콜리 못지않게 중기 시 이후의 묵시록적 비전과 기억의 변증법을 한국 현대시의 소 중한 자산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허수경 시인의 1주기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