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❶
이수명 ｜ 시인. 1965년생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물류창고』 등
창문을 열고 봄, 봄에서 초여름, 여름으로 시시각각 달라지는 공기를 감각하면 서 오전 몇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 한 시간이라도. 그러면 번다한 내게 세계도 섭 리도 잠깐 순조로운 듯이 보인다.
적당한 사람
핸드폰 할인 행사장 앞을 지나간다. 확성기로 흘러나오는 노래 앞을 지나간 다. 새로 생긴 카페 앞을 지나간다. 카페는 아직 오픈 시간이 아니다. 주문이 되 지 않는다. 헤어샾 앞을 지나 극장 앞을 공원 앞을 지나 주유소 앞을 지나간다. 오늘은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배치가 되지 않는다. 총이 없는 초소 앞을 지나 중학교 앞을 지나간다. 중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한 떼의 중학생들이 떠들며 내 앞을 지나간다. 중학생들이 다 지나가고 나면 홈플러스가 있다. 홈플러스 앞 을 지나 홈플러스로 들어서는 기나긴 줄의 앞을 지나 오늘은 진정이 잘 되지 않 는다. 진정해도 어디에도 합류가 되지 않는다. 카센타 앞을 지나 주차가 잘 되지 않는 주차장 앞을 지나 하늘이 검게 변한다. 술집 앞에는 사람들이 나와 술을 마시고 그중 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찾는 중이라 한다. 적 당한 사람을 찾는 중이라 한다. 앞에서 앞으로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앞으로 앞으로 앞이 전시를 멈추지 않는다. 어느 새 묘지가 앞에 와 있다. 묘지 앞을 지 나간다.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다.
정적이 흐른다
같은 데서 잠들고 같은 데서 일어나고
같은 일을 한다. 어제와
같은 에스프레소를 들고 같은 문을 열고 같은 책상에 앉는다. 차가 멎는 소리
차가 떠나는 소리 정적이 흐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신발을 꿰신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방울들을 닦는다.
바닥의 어느 곳에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어 바닥을 이리저리 살피며 같은 물방
울들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들을 닦는다.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늘이 구름을 떨어뜨리는 것을 바라보며 어떤 구름이 세상을 뜨는지 바라보
며 머리를 손질한다. 헝클어진 머리를 옆으로 넘기고 뒤로 빗고 머리를 하나로
묶는다. 머리를 밀어버린다. 머리카락을 멀리 떨어뜨린다.
정적이 흐른다. 빛이 흐리다. 밀고 들어오는 빛이 흐리다. 빛의 짧은 비치
빛을 꺼내들고 이상할 건 없다. 빛이 중심을 잃고 추락한다고 이상할 건 없다.
빛이 바랜 일을 한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쓴다. 구불구불한 글 사이에
잘못 끼워진 구불구불한 손가락들 똑같은 손가락들을 빼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빛이 세상을 뜨는지 바라보며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같은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눈앞에서 사라지는 빛을 다시 놓친다. 영영 놓치고 만다.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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