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수권    © 운영자

오늘도 산문(山門) 안에 법고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세상에는 웬 고통이 그리도 많은 것이며 잠재우고 일깨워야 할 것이 그리도 많은 것일까? 인간의 목숨은 참 모질게도 억세 만년을 돈다 하니 석가세존께서는 그 목숨이 돌고 돌다가 지옥에 떨어진 뭇 중생까지도 가여이 여긴다. 하여, 여기 종소리는 만리 바다를 건너 지옥에까지 닿으리라.
얼마만인가 이 산문 안에 다시 온 것은. 젊은 날의 한 해를 난 여기서 보냈다.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나날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의 영혼을 추스를 길이 없었을 때 영혼이 울고 거기서 시혼이 솟고 그 끝에 「山門에 기대어」가 있었다.
산문(山門).
그것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경계의 문이다. 윤회의 끝없음과 부활(환생)이다. 시력 30여 년을 돌아보면 나의 첫 출발은 이 문을 하나 짊어지고 나섰던 것이다. 여기엔 한 생명의 부활과 윤회가 끝없이 한(恨)의 가락을 이루고 있다. 엊그제도 폭설이 내리는데 멀리서 온 한 독자와 함께 선암사에 올라갔다. 일주문을 들어서다 말고 한 발은 일주문 안에 한 발은 일주문 밖에 세워두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들어서기도 어설프고 나오기도 어설픈 그 자세로 산문에 기대어 서 있는 것 - 이승이 곧 저승이고 저승이 곧 이승인 불이문(不二門).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경계 허물기가 곧 산문이 아닐까. 이승과 저승을 뒤집어 놓는 체험 없이 시를 쓴다는 건 상처가 없는 행복한 시쓰기로 시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누이야 / 가을산 그리메 빠진 눈썹 두어 낱을 /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의 그 “눈썹”이야말로 한의 끈적끈적한 덩어리인 것이다. 즉 무주고혼(無主孤魂)이다. 야산 같은데서 이장을 하다보면 뼈는 다 삭아 내렸는데 머리칼과 눈썹만이 그 음습한 웅덩이에 고여 있음을 본다. 백발이 아니라 그것이 검은 터럭일 경우, 얼마나 섬뜩하고 한에 젖어 있는 터럭들인가? 그래서 이따금 화장실 출입을 하다 수세식 좌변기에 묻어 있는 ‘털’ 하나를 보았을 때, 나의 온몸에 우선 경련부터 일어나는 공포의 대상이다. 이런 날은 오래 잠자던 불면증이 다시 겹쳐지기도 한다.

또 뱃길에서 죽은 자의 혼풀이를 할 때 무당들이 식기를 바다 속에 매어 처넣고 건져 올린 후 열어보면, 거기에 들어 있는 것 역시 터럭이다. 또 출가할 때도 머리를 깎는다. 땅 속에서도 삭지 못하는 그 원한이 젊은 죽음일 때 이 무주고혼은 가을산 그리메에 떠도는 넋이 아니겠는가? 이 덧없는 죽음 위에 돌을 눌러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은 부활의지, 그 부활 끝에 누이는 이제 산다화를 꺾어 나에게 스스럼없이 건네주는 생명의 인과법칙과 윤회 속에 환생하여 있음을 본다.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 그렇게 만나는 것을”

바람 부는 늦가을, 기러기가 공중에 길을 내는 것만 보아도 누이(자살한 남동생)의 선험적 이미지인 눈썹(동생은 숱이 짙은 눈썹이었음)의 행방을 보게 되고, 동생의 무덤을 찾아가 술 한 잔을 나란히 따라 놓고 그가 와서 나의 빈 잔을 채워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이 대화체 형식의 독백 속엔 이 설움이 깊게 배어 있는 제의식(진오귀굿)의 재생적 시적 의지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넋풀이로서의 해한(解恨)이며 역동적인 한, 생기로 피는 한의 극복의지다.
후일담은 제1회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당선작인데 그때 나는 서울을 떠돌며 생존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는 점이다. 어느 여관방(서울경기여관)에서 백지에 써갈긴 채 응모했는데 원고지에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휴지통에 넣은 것을 심사 과정에서 다시 보게 되어 당선작이 된 것이다.

주소도 이름도 낯설어 그 1년 후에야 수소문 끝에 시인을 찾아내게 되었던 것, 두 번째 화제는 76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작이 이 시를 상징표절(리듬)했다 하여 취소된 사건으로 열병을 앓는 문학도에게 엄청난 주가를 상승시킨 점이며 세 번째는 1966년 봄, 24살 난 남동생이 제대한 그 다음날 어머님의 묘소 앞에서 음독자살한 사건을 다룬 추모형식의 비가라는 점이다. 나는 아직도 그 묘소 앞에서 아침 이슬에 젖어 찔레꽃 같은 알약의 정제들이 소복이 피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이후 11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 터득한 고전적 엄격성과 토속적 정서로 시종여일 전통시의 맥을 잇는 내 삶의 극복 의지와 대안으로 시를 써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