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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무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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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길을 가는데 뒤에서 걷던 사람이 갑자기 친근하게 말을 걸어 소스라치며 돌아보니 휴대폰 통화 중이더라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휴대폰 통화를 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아주 흔하게 눈에 뜨인다. 저러다 사람들 목이 다 삐뚜름해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지경인데, 최근에는 ‘손떼고 즐기는' 헤드 잭 휴대폰이 나와 눈길을 끈다. 여느 휴대폰처럼 한 손을 귀밑으로 올리고 있지 않으니까 얼핏 보면 실성하여 중얼거리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무튼, 흔해지면 익숙해지는 것인지 전에는 그토록 거슬렸던 대중차량 안에서의 휴대폰 통화소리도 그럭저럭 덤덤해졌다.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출입문 옆에 달린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대면서 보니 18시 40분이었다. 내 뒤에 바투 누군가도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댔다. 얼핏 초록색 스웨터가 삐져나온 누르스름한 외투 소매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창 맛있더라. 나 막창 처음 먹어봤거든. 막창이라는 게 그렇게 맛있는 건지 몰랐어. 구워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라. 등갈비랑 막창 시켰거든. 처음에는 등갈비만 시켰었는데 은영 씨가 그러더라. 저번에 두 분이 오셨을 때 등갈비 이 인분 시켰었잖아요. 야, 다 기억하더라!”
이십대 초반 남자의 목소리였다. 우직하고 굵은 목소리로 그는 막창과 은영 씨 얘기를 순정하게도 했는데, 뒷얘기가 궁금했지만 아쉽게도 버스는 어느덧 정류장에 섰고 문이 열렸다. 서대문 경찰청 앞이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날은 어두웠다. 나는 서대문 사거리를 향해 걸었고 그는 어느 쪽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의 통화 내용이 들린 처음에는, 젊은 놈이 무슨 식충이같이 먹는 얘기를 저렇게 열성적으로 하나 한심했는데 곧 우습고도 애틋하고 풋풋하게 느껴졌다. 술도 아니고 담배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대나 떡볶이도 아닌 바로 막창에, 그 건강한 성년의 음식에 이제 막 맛을 들이고 저렇게 감동하는구나! 나도 막창에 막 연정이 생기려 했다. 나는 그가 호감과 존중심에 차서 은영 씨를 은영 씨라고 부르는 게 좋았다. 제 돈으로 식당을 드나들게 된지 얼마 안 된 듯한 그가 그 어린 신사의 마음과 언행을 길이 변치 않았으면 싶었다.
어쩌면 그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잠시 걷다가 광화문을 향해 정동 쪽으로 빠졌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한 달쯤 전 나한테 휴대폰을 빌려준 적이 있는 바로 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친구들과 한 이태리식당에서 저녁약속을 한 날이었다. 로비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헤치고 늠름히 식당에 들어서자 입구를 지키고 선 종업원이 누구 일행인지를 물었다. 그 식당을 적극 천거한 친구 이름을 댔다. 종업원은 명단을 훑어보더니 그 이름이 없다고 했다. 내가 당황하니까 안에 들어가서 찾아보라고 했다. 넓디넓은 홀 안에 테이블마다 손님이 꽉 찼지만 내 친구들은 없었다. 알고 보니 그 식당은 여덟 명 이상이 아니면 예약이 안 되는 곳이었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건지 친구들이 먼저 왔다가 식당을 바꾸기로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또, 자리가 비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기도 해서 이제라도 대기자 명단에 올려놔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일단 전화통화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종업원에게 공중전화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떳떳하게 자기네는 공중전화가 없다고 했다. 그가 떳떳한 게 왠지 당연한 듯해서 나는 풀이 죽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갔다. 왼편과 오른편 그리고 앞쪽으로 10미터 반경에 술집도 편의점도 은행도 있었지만 공중전화는 없었다. 최소한 50미터 반경 내에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원래의 건물 앞으로 돌아와 망설이다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청춘 남녀에게 다가가 휴대폰 좀 빌려달라고 했다. 유유상종이라고 모두 한결같이 흔쾌히 휴대폰을 내미는 태세였는데 그 중 내가 빌려 쓴 휴대폰의 주인은 두덕두덕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통화를 마친 내가 천 원 한 장을 주자 극구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받으며 익살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고맙게 용돈까지 주시고, 잘 쓰겠습니다.” 두 목소리의 무늬가 비슷하다. 시인 이문재의 청년시절을 연상시키는, 진지한 듯도 하고 허무한 듯도 한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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