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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미묘하지만 한없이 중요한 영혼의 드라마 -이디스 워튼의 『암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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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뉴욕에서 태어난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 1862~1937)은 주로 유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872년 가족과 함께 미국에 돌아왔으나 거의 매 년 수개월씩 유럽에 체류했고, 1885년 테디 워튼과 결혼한 후에도 장기간 유럽에서 생활하거나 여행하며 소설 및 유럽 여러 지역의 역사, 건축, 미술에 대한 글을 쓰곤 했다. 1937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묻힌 곳도 프랑스의 베르사이유였다.
그 동안 워튼은 주로 헨리 제임스의 친구, 그의 위대한 소설과 비교해 통속적이고 불완전한 “여성적” 작품들을 생산한 여류 작가로 이해되어 왔고, 지금도 주로 페미니스트 비평가나 여성학자들에 의해 연구되는 여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생전에는 대단한 대중적 인기를 누린 성공적인 시인 겸 소설가였다. 그리고 그녀가 쓴 최고의 작품들인 『순수의 시대 The Age of Innocence』나 『이선 프롬 Ethan Frome』, 『여름 Summer』, 그리고 『암초 The Reef』 등은 그 문학적 완성도와 문체의 정교함에 있어 당대 어느 작가의 작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걸작들이다. 이제 워튼은 제임스를 비롯한 “대가”들과의 차이보다는 유사성, 그리고 그녀만이 지닌 독특한 측면들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연구되고 평가되어야 할 중요한 작가라고 생각된다.
1912년 8월에 완성된 『암초』(1912)는 워튼이 작가로서의 개성과 자신감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이선 프롬』(1911)과 그 작품과 같은 주제를 훨씬 더 큰 스케일로 한결 더 풍부하고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는 『순수의 시대』(1920)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 중에서도 거의 연이어 쓰여진 『이선 프롬』과 『암초』는 쌍둥이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다.
두 작품은 모두 진정한 사랑과 아름다운 생명력을 대표하는 여성과 사회적 요구와 전통을 대표하는 여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 주인공을 다루고 있고, 그들이 사랑하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 또한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암초』의 소피 바이너는 『이선 프롬』의 매티보다는 유식하지만 그녀와 같이 재산도, 부모도, 집안 배경도 없고, 경제적 자립 수단도 거의 없는 중하류층 여성이다. 둘은 모두 아름답고 청신한 용모에 극도로 예민하고, 조신하면서, 마음 속에 엄청난 정서적 에너지와 사랑에 대한 갈망을 안고 있는 젊은 처녀들이고, 경제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극도로 결핍된 삶을 살지만, 남자 주인공에게는 청춘과 사랑, 아름다움의 화신으로 비치고, 예민함과 영적인 풍요로움, 용기와 자존심을 상실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리고 물론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둘은 모두 아내와 약혼자가 있는 남자 주인공들의 감성과 도덕성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지만, 남성들은 이들을 선택하지 못하고 끝내 불행한 반생을 살게 된다. 이들과 대조를 이루는 여성들 또한 서로 아주 비슷한 인물들이다. 『암초』의 애나 리스는 겉으로 보기에 『이선 프롬』의 지나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유식하고, 풍요로운 여성이지만, 대로에게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압력 내지 유혹을 대표하고 있고, 소피와의 관계에 대한 거의 편집증적인 질투를 통해 지나가 이선에게 행사한 압력과 비슷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애나와 조지 사이에서 소피는 일종의 시약(試藥)으로 작용한다. 활화산 같은 열정과 생명력, 엄청난 도덕적 용기를 지닌 그녀는 애나와 조지의 정연하면서도 이기적인 세계에 밀물처럼 갑자기 들어와 그들의 계획을 흩뜨려 놓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맹목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녀의 젊음과 매력, 순수함은 하나의 거대한 암초가 되어 두 사람을 낯선 도덕성의 해안에 좌초시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뒷부분이 구체적인 사건이나 행동보다 수많은 생각과 대화로 채워져 있는 것은 이처럼 소피가 두 사람에게 끼친 영향이 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고, 바로 이 때문에 소피는 그처럼 매혹적이고 생기발랄한 처녀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극히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철저한 도덕성과 정교한 플롯 및 상징들보다 더욱더 감동적인 것은 바로 그 예민함이다. 앞에서 말했듯 애나와 조지는 도덕적으로는 극히 무심하고 무감각한 상류층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나 정서적 상호 작용, 주변 풍경과의 교감은 다른 소설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섬세하고, 소피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작품이 별다른 사건이 없으면서도 전체적으로 그토록 흥미진진한 것은 이처럼 생생히 형상화된 내면의 드라마가 줄곧 독자의 주의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심미적, 정서적, 도덕적 예민함은 인간 정신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가장 웅변적인 증거의 하나이고, 왜 우리가 육체적 욕구와 동시에 그토록 강렬한 영적 욕구를 갖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작품이 소중하고 감동적인 이유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행동과 욕망의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작고 미묘하지만 한없이 중요한 영혼의 움직임을 적확하게 포착하여 그것을 감각적이고 풍요로운 문체로 형상화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초』에서는 이런 특징들이 등장 인물들이나 문제 의식과 잘 부합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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