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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이며 또한 성실한 한국문학 연구자로서 이상옥 선생은 우리 시대의 인문학을 표나지 않게 대표하는 학자 중의 한 분이다. 1936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김천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토니브룩 소재 뉴욕주립대학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5년부터 2001년 8월 정년퇴임 때까지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임하면서 미국학연구소장, 인문대학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영문학을 비롯한 외국문학 전공자들에게는 『조셉 콘라드 연구』라는 저서로, 국문학자들에게는 『이효석의 삶과 문학』으로, 일반 독자들에게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 『암흑의 핵심』 및 『로드 짐』 등의 번역서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영어영문학회장, 한국비교문학학회장, 한국현대영미소설학회장 등의 이력이 말해주듯이 선생은 평생 국내의 영문학 및 비교문학 발전에 이바지하는 한편, 평론집 『문학과 자기성찰』과 『문학 인문학 대학』 및 산문집 『두견이와 소쩍새』등을 내기도 했다. 선생을 2006년 1월 12일 오후 선생이 사는 경기도 산본의 아파트에서 두 시간 반 동안 만났다.

대학을 떠나신 지 5년이 가까워오는데, 요즈음 건강을 어떻게 관리하시고 또 소일하시는지요?

이럭저럭 지냅니다. 매일 아침 3~4분간 중학교 시절에 배운 맨손체조를 하지요. 70~80년대에 테니스를 좀 했지만 그만둔 지 오래되고 평생 헬스클럽 같은 데는 가보지 못했어요. 혼자 걸을 때는 좀 빨리 걷는 편인데 운동 삼아서라기보다 그저 습관이지요. 이 사진? 내가 산에 다니면서 찍은 거지요. ‘꽃향유’라는 들꽃으로 원래는 보라색인데 이놈은 흰색이라 좀 귀한 편이랍니다. 사진 동호인 전시회 때 출품했던 것이지요. 마애불 사진도 더러 찍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황동규 선생 시에서 언급된 적이 있어요. 나는 평생 들꽃 사진을 찍어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자 3년 전에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약 7백 종의 꽃 사진 1만여 장을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지요. 가끔 들꽃에 대한 잡문을 써서 사진을 곁들여 동호인 사이트에 올리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에 시작된 등산이 차츰 야생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되더니, 이제는 등산보다도 꽃 사진 찍기에 치중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가끔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반성도 합니다. 요즈음 하는 공부요? 체계적 독서는 집어치운 지 오래되고, 개화기에 우리나라가 외국에 어떻게 비쳤는지를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작가들도 더러는 읽는데, 최근에는 교보문고에 나갔다가 김연수와 문태준의 작품을 몇 권 사왔습니다. 소문대로 읽을만한 작가들이더군요.

오랫동안 강단에 서셨는데 회고하시면서 소감이라도 한 말씀 해주시지요. 혹시 학생들을 강의실에서 대할 기회가 없어 아쉽지는 않으신지요?

나는 수업시간에 늘 텍스트 읽기, 그것도 ‘꼼꼼히 읽기’를 강조했지요. 사실 강의실에서는 주요 대목을 읽으며 생각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랐지요. 물론 문학작품을 공부하면서 이념과 역사를 배제할 순 없겠지만, 어떤 특정 이념에 의해 공부가 좌우되는 것은 문제지요. 학생들에게는 훗날 일가를 이루거든 그때 가서 특정한 주의주장을 내세우더라도 학창시절에는 좀 더 개방적인 자세로 공부하라고 늘 충고했지만 70~80년대의 분위기에서는 그런 충고가 먹히지 않더군요. 나는 늘 교양과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학 차원의 교양과정 개편과 교과목 개발에도 깊이 관여했었지요. 그리고 전공과목에서도 개관 과목을 많이 선호한 편입니다.
퇴임하고 나서 강의실이 그립지 않느냐고요? 천만에요. 퇴임하기 전 몇 해 동안은 내가 너무 오랫동안 강단에 서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들더군요. 용기가 없어서 명예퇴직 신청까지는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만.

▲ 이상옥 교수가 촬영한 '꽃향유' 사진. 보라색이 아닌 흰색 꽃향유는 귀하다고 한다.    © 운영자

선생님께서는 평생 영국의 소설가 조셉 콘라드에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콘라드를 전공하시게 된 동기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1964년에 서울고등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브리티시 카운슬 장학금으로 영국의 서섹스대학에서 수학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 그 대학의 영미학부에는 유명한 영문학자 데이비드 데이쉬스 교수가 학장으로 계셨어요. 그분은 내가 제출한 현대소설 분야의 연구계획서를 훑어보더니 “나는 현대영문학의 대표 작가가 콘라드, 로렌스, 조이스 및 울프라고 생각한다. 자네는 학사논문으로 로렌스를 썼고 석사논문으로는 조이스를 썼구나. 이 두 작가를 좀더 깊이 공부해보겠는가, 아니면 콘라드나 울프를 한번 공부해보겠나”라고 묻더군요.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망설임도 없이 콘라드를 읽겠다고 대답했어요. 그 이유는 내가 그때까지도 콘라드를 거의 읽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그러자 데이쉬스 교수는 자기가 지도해주겠다고 하면서 첫 과제로 『로드 짐』을 읽고 페이퍼를 하나 써오라고 합디다. 그렇게 해서 서섹스에 머무는 동안 나는 20여 권에 달하는 콘라드의 전 작품을 구해서 읽으며 데이쉬스 교수에게는 7편의 페이퍼를 제출했지요. 그게 계기가 되어 훗날 미국 대학에서는 콘라드를 학위논문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시는 작가는 누굽니까?

영문학에서는 디킨스와 로렌스를 좋아한답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만큼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가도 없을 겁니다. 콘라드 전공자가 콘라드는 왜 빼느냐고요? 연구하는 재미와 읽는 재미는 별개의 것이지요. 콘라드는 최초의 현대소설가로서 그 나름으로 위대한 작가임을 인정하지만, 읽는 재미는 많이 떨어집니다. 작가는 인간이 생각하는 양식이나 사는 모습에 대해서 진지하고 설득력 있는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콘라드가 가령 로렌스나 디킨스보다 훨씬 못하지요.

선생님께서는 영미문학의 국역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번역을 하셨지요?

영어선생을 시작한 후 영문학 발전에 큰 이바지는 못하더라도 고전 몇 편을 우리말로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번역한 것이 70년대 중엽에 나온 『젊은 예술가의 초상』입니다. 처음에는 열 권을 번역하겠다고 목록까지 작성했었는데 그 한 권을 번역하고는 일단 손을 들었습니다.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번역가는 우선 원문해독의 어학적 어려움 및 텍스트 속에 깔려 있는 문화적 역사적 함의를 파악하는 어려움과 부딪쳐야 합니다. 텍스트를 수려한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그 다음 문제지요. 직역이냐 의역이냐를 놓고 원문과 역문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도 힘들지요.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역자가 원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근본 문제에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을 할 만한 역량을 갖춘 사람들은 번역을 꺼리고 번역은 대학원생들의 아르바이트 감 정도로 여겨지기 일쑤지요.

그래서 번역을 그만 두셨나요?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참 후에 몇 권을 더 했습니다. 소설은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 및 『로드 짐』 그리고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 』 등이 있고, 시는 『루바이야트』 『프로스트 시선』이 있고, 산문집으로 기싱의 『기싱의 고백』(원제: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찰스 램의 『엘리아 에세이즈』를 번역하고 있는데 너무 어려워서 언제쯤 끝낼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늘 저 유명한 콘스탄스 가넷의 도스토예프스키 영역본이나, 스콧 몬크리프의 프루스트 영역본 같은 고전적 번역이 우리나라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만, 나에게는 늘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제는 한번 번역하면 적어도 50~60년간은 읽힐 수 있는 좋은 번역이 나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차제에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 학계에서는 왜 번역을 학구적인 성과로 간주해주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번역의 학술적 가치를 강조해왔고 요로에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지만 그 방면의 제도적 개선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유감입니다.

▲ 이상옥 명예교수 © 운영자

선생님께서는 이효석론을 책으로 내시는 등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도 가지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1975년경에 도봉산 등산길에서 만난 어느 출판사의 사장이 작가론 총서를 구상하고 있다면서 나더러 한 권 써보지 않겠느냐고 합디다. 이미 중요 작가는 필진이 결정되었고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작가로 이효석이 남아 있기에 한번 써보겠다고 약속했지요. 그 후에 그 총서는 결국 나오지 않았고 내 책은 『이효석 - 문학과 생애』(1992)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증보판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이 두어 해 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고요. 영어선생이 국문학을 집적거리는 데 대한 자의식도 많았고 눈총도 받았습니다. 훗날 황순원 전집을 읽으면서 학구적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결국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내 나름의 소설이론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지만 내 가까이에 나보다 그 일을 훨씬 더 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하고 말았지요.

선생님께서는 한국문학의 해외소개 사업에 관여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네, 그런 일을 조금 해 온 셈이지요. 한 영어선생에 불과한 나를 이 자리에 초대한 것도 아마 내가 대산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번역지원 사업 및 번역상 등에 관여한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한국과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나 인지도는 아주 저조합니다. 이를테면,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 중에서 중국과 일본에 대한 구미의 관심은 그 역사가 오래되고 그 폭과 깊이도 대단한데 비해 한국은 거의 무시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이는 우리 문학이나 문화가 이웃나라들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라기보다, 한국의 국제적 지위에 대한 평가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지요. 구미의 학자들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듯이 한국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하면 이 문제는 자연이 해소될 것입니다.

그러면 현 단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구미의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한국 문학을 자기네 말로 옮기려고 들지 않을 뿐더러 또 그럴 역량을 갖춘 사람들도 드뭅니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우리가 나서는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면에서 우리 정부나 대산문화재단 같은 기관은 그간 수수방관만 하지 않았습니다. 능력 있는 번역가들을 선정해서 우리의 좋은 작품들을 번역해서 출판하도록 재정 지원을 해주는 등 여러 방면의 노력을 해왔으니까요. 그리고 원어민 역자들의 우리말 실력이 워낙 떨어지니까 우리나라 사람과의 공역을 권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급한 불이나 끄자는 식의 임시방편이지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자면 눈앞의 결과만 얻으려 하지 말고 좀 장기적으로 역량 있는 한국문학 전문가들과 번역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우리말을 익힌 원어민들이 사전 하나만 들고서도 한국 문학을 번역해 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미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일본어문학과 중국어문학을 전공해서 그것을 필생의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어영문학이나 불어불문학을 전공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해외에는 한국어문학에 관해서 이런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당장에는 우리가 도와야지요. 눈에 확 띌 정도의 인센티브를 내어놓음으로써 젊고 능력이 있는 한국문학 전공 지망생들을 여러 명 유치하여 그들이 마음 놓고 학업을 이수하고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장기간 재정지원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작가들도 이제는 노벨문학상을 받을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요.

글쎄요. 나는 “우리도 이제는 노벨상을……” 어쩌고 하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습디다. 그 권위 있는 상도 캠페인과 프로모션을 하면 수상에 도움이 된다는 설이 있습디다만, 설마 그렇기야 하겠어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우리 문학에 대한 해외의 인지도가 이렇게나 낮은데 어떻게 그런 큰 상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받는다면 기적이지요. 이는 우리 문학의 질적 수준이 높고 낮음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해마다 10월이 될 때마다 혹시나 하고 안달할 게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우리 문학의 해외 선양을 위한 근본적인 사업에나 긴 안목으로 아낌없이 투자해야 할 겁니다.

▲  유두선 교수   © 운영자

선생님께서는 약 10년 전에 미국에서 1년간 한국 문학을 가르치셨는데 그 때의 경험을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미국 유타 주의 브리검영대학에 파견되어 한국 문학을 가르친 적이 있지요. 그 대학의 학부과정에서는 한국 문학 텍스트로 영역본은 쓰지 않고 우리말 원본을 썼습니다. 선교하러 한국을 다녀온 학생들이 많았기에 가능했지요. 주로 작품선 강독을 하는 외에 이두(吏讀)에서 현대 문학까지의 개관을 돕기도 했고 황순원 작품만 한 학기 동안 읽은 작은 클래스도 있었지요. 학생들도 대견스러운 것이 한국어로 된 문학작품을 한국어로 강의하는 것을 따라왔지요. 물론 내가 영어로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경우가 많았고요. 과제물 작성, 구두 발표 및 시험에서 원칙적으로 한국어를 쓰도록 했답니다. 그 때 만나거나 가르친 학생 중에서 두 사람이나 훗날 서울대학교에 와서 중문학과와 국문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는데, 특히 중문학을 한 학생은 황진이의 한시로 학사논문을 썼던 뛰어난 학생이었답니다. 두 학생 모두 귀국한 후에는 소식이 끊어졌는데 이런 우수한 학생들을 붙잡아서 장학금도 주고 해서 한국 문학 전문가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즈음 인문학이 처한 상황에 대한 논의가 빈번한데, 혹시 선생님께서도 의견이 있으면……

인문학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분명하나 나로서는 그 처방은커녕 진단하기도 쉽지가 않네요.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위기가 초래되었겠지요. 무엇보다도 금권만능주의와 출세지상주의 같은 사회적 요인에서 주된 원인을 찾아야 하겠지만, 대학이나 학계에서 그 위기를 자초한 측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대학에 다니던 50년대에는 비록 과별 모집으로 입학을 했을망정 영문학 이외에 국문학, 독문학 및 불문학 과목도 많이 수강했고 역사나 철학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이르러서는 학과이기주의가 팽배하여 학과 사이의 담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학과들은 세분화되어 왔습니다. 인문학은 개별 학문분야의 연합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도 분야간에 상호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유기적 복합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런 성격을 무시하거나 거역함으로써 오늘의 위기가 초래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요인은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마땅히 자기성찰의 노력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학사과정에서는 적어도 인문계와 사회계의 신입생들을 한 울타리로 선발하고 그 교과과정도 사실상의 교양교육과정이 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문학 분야만 하더라도 ‘19세기 영국소설’이니, ‘독일 낭만주의문학’이니 하고 학과목을 세분화하는 것도 좋지만 ‘한 장르로서의 소설’, ‘낭만주의는 무엇인가’, ‘문학과 철학’ 같은 학제적(學際的)이고 분야간 협동에 근거하는 통합적인 과목이 개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교문학 및 비교문화적인 성격을 띤 과목들도 많이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학생들에게는 단수전공이나 복수전공을 할 수 있게 하되 학과 배정 같은 것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법학, 경영학, 의학 및 치의학 같은 분야는 학사과정을 없애고 시급히 전문대학원 과정으로 개편되어야 인문학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요즈음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반대합니다. 오늘날 각계각층에서 이른바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런 추세는 피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앞으로 영어나 기타 주요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의 수요가 급증할 것입니다. 그러나 온 국민이 영어 때문에 너무 큰 소동을 벌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교육 차원에서는 영어교육 때문에 지출되는 비용이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하고 있고, 정부에서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나서고 있는 판입니다. 심지어는 근자에 대학의 교양영어마저 실용영어과정으로 대폭 대체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 국민이 영어를 잘해야 하는지 자못 의심스럽습니다. 설사 그럴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중등과정 6년간만 영어교육을 제대로 한다면 온 국민이 기초적인 영어는 구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입시제도다 뭐다 하는 고질적인 병폐 때문에 오늘의 영어교육이 엉망진창 상태에 있으니까 이런 소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최근에는 영어를 하지 못할 경우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만, 이는 영어 공용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부분적인 진실을 전면적인 진실인 것처럼 과장한 사례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