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

웹진 대산문화

정체성을 찾아가는 로드무비처럼

안개속의 풍경, 해피투게더, 바이브레이터, 이지 라이더, 아이다호, 델마와 루이스, 기쿠지로의 여름,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중앙역, 파리 텍사스를 비롯한 빔 벤더스의 영화들…… 모두 내가 좋아하는 로드무비들이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나는 줄곧 로드무비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가 그 숱한 로드무비들을 보면서 기대하는 것은 도대체 뭘까. 황량한 세상속의 쓸쓸한 주인공들. 그들의 여정엔 다양한 사건들이 놓아지면서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기도 하고 거세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주인공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번 문학기행, 나의 첫 유럽여행을 앞두고 이 ‘여행은 곧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라는 공식이 두려웠던 것 같다. 기대도 없었다. 내가 과연 감동 받을 수 있을까? 나 정말 떠나서 정체성 찾고 돌아와야 돼? 어이없는 걱정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것이다. 그렇게 파리행 비행기는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이륙할 때 요란스럽고 위태롭게 흔들리던 비행기의 날개는 허공 속에서 안정을 찾았다. 여유롭고 오만한 그 날개를 보며 나도 이번 여행의 어떤 역할모델을 찾았나보다.

드골공항에 내리자마자 테제베를 타고 리옹으로 이동했다. 차분하게, 빠르게…… 매끈한 표면이 짙은 푸른 안개 속을 스치며 끝없이 달릴 것만 같았다. 터널이 없다는 것이 이런 느낌을 만들어주는구나…… 아직 일행들과의 어색함에 음악을 들으려던 나는 테제베의 기분 좋은 소리에 이어폰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리옹의 밤은 조금 차갑고 조금 달콤했다. 허전하고 쓸쓸한, 그러나 견고한 도시의 느낌. 일행들은 특이하고 크고 그로테스크한 가로수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다. 그날 밤, 나는 잠들 수가 없었다. 잠시 잠이 들었으나 수시로 눈이 떠져 어둠을 확인하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마다 귀에 감기는 소리들. 창밖의 정적과 화장실의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방 안, 누군가의 작은 한숨소리……

이른 아침. 우리는 전철역에서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15분 이상 연착된 클레르몽 페랑 행 열차를 기다리며 역 앞에서 익숙한 모습으로 아르바이트생이 나눠준 신문을 들고, 밥벌이를 위해 출근하는 리옹의 사람들 속에 섞여. 우리가 그들의 일상을 너무 침범한 것일까. 좀 더 눈 마주치고 뭔가 더 소통하고 싶은데, 혹은 그들과 섞이고 싶은데 나와 일행은 동양인 관광객의 신분으로 그들로부터 자꾸 분리되고 말았다.

이름 모를 작은 마을들과 눈 쌓인 허허로운 시골 풍경들을 지나 클레르몽 페랑에 도착했다. 웃지 않는 스튜어디스처럼 유럽과 프랑스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멋지게 무시해준 작고 소박한 도시 클레르몽 페랑. 클레르몽 페랑 영화제는 ‘단편영화제의 칸’이라 불리는 국제단편영화제다. 올해도 몇 편의 한국작품들이 경쟁부분에 초청되었지만 스케줄상 볼 수는 없었다. 배우 유지태 씨가 심사위원이었지만 그 역시 스케줄상 볼 수는 없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본 것은 상영관을 가득 메우는 다국적 사람들의 활기와 여유로움,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인근 대학생들의 열기와 애정, 그리고 소통의 수단으로 영화를 고른 세계 독립영화 연출가들의 노력과 욕망이었다. 모든 영화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나레이션은 계속 흘러나오고, 배우는 카메라와 눈을 마주치고, 사변적인 이야기와 이야기의 구조에서 느껴지는 일련의 어떤 경향, 유행 같은 것마저 느껴졌는데, 사람들은 단편영화를 단편소설이 아닌 시에 비유하기도 하고, 미래의, 대안의 영화라고 하지만, 사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고민과 취향과 한계점은 모두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클레르몽 페랑에서 좋았던 또 다른 두 가지. 도시 중심에 있는 광장의 자유로움, 그 나른하면서도 밝은 문화의 냄새와 점심에 먹은 햄버거 집이었다. 실내는 흡연, 비흡연 구역으로 정말 공정하게 반반씩 나눠져 있었는데 흡연구역 테이블마다 잘 세팅되어있는 재떨이들이 보기에 어찌나 흐뭇했던지. (일행 중 유일한 흡연자였기에 일종의 소외감과 외로움이 꽤 심했는데, 여행 내내 유럽에서의 행복한 ‘길빵’으로 인해 애정이 식었다고 생각되어 마침 한번 끊어볼까 생각했던 담배를 다시,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다는 비화 아닌 비화가……)

다시 리옹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리옹에서 2박을 묵는다는 것은 참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창밖으로 아침에 보았던 풍경들, 아침에 보았던 소떼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곧 다시 보게 될 리옹처럼 같은 풍경을 두 번 본다는 것이 좋았다. 무엇이든 한 번쯤은 하고, 보고, 듣고, 느끼면서 사는 인생이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사실 무엇이든 두 번은 하고, 보고, 듣고 느끼면서 사는 인생은 전자의 그것과 상당히 다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곧 벽에 부딪혔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일정상 2박3일 동안 리옹의 낮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니스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사람 욕심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이튿날, 니스로 향하는 길. 우리는 계속 흐린 날, 새벽과 밤만 보다가 햇볕 따스하고 봄 냄새 가득한 마을들을 지나고 있었다. 마르세이유 역에 꽤 오랫동안 정차한 기차는 노곤한 몸을 누이고 잠시 낮잠이라도 자는 듯 했는데, 마르세이유의 빽빽한 주택가들, 풋풋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빼곡히 널려있는 색색의 빨래들, 빨래들. 벽이면 벽마다 공들인 낙서와 한적한 학교 운동장. 농구하는 아이들이 만들어 보이는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들을 보며 아, 이런 날 마루에 누워서 오후 내내 라디오나 들으면 딱 인데 하고 생각하며 피식 웃을 수 있었다.

드디어 니스 해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본 지중해의 큰 물과 해변에 드러누워 단잠에 빠진 사람들이 주는 기분 좋은 충격에 우리는 무거운 코트를 벗고 바다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날리며 한참을 떠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숙소도 코앞이었기 때문에 틈만 나면 해변을 들락거렸다. 밤에는 조심스럽게 자갈 위에 누워보았는데, 그 부드러운 차가움과 끊임없는 파도소리가 서럽고 촌스러운 나의 눈물까지 모두 씻어주고 달래주었다. 수많은 로드무비에 등장하는 바다와 실제로도 쉴 새 없이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우리는 바다에 꽤 많은 빚을 지고 사는 것 같다.

니스에서의 평온함과는 달리 기차로 15분 만에 내딛은 모나코는 너무 멋지고 슬펐다. 하얗게 빛나는 수많은 백색의 요트들과 몽테카를로의 카지노, 휘황찬란한 명품 숍들이 주는 위화감에 머릿속이 수축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울컥 니스가 그리워졌는데 니스로 다시 돌아오고 나니 모나코에서 보았던 요트 무리들이 니스까지 내려와 있었다. 우리는 저렴하고 맛있는 케밥 집의 야외테이블에서 커다란 접시에 수북이 담긴 케밥을 배부르게 먹으며 요트 무리들을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아, 나만 그랬던가. 난 참 평범하고 슬픈 사람이었다.

드디어 파리행 기차를 탔고 다섯 시간 뒤, 첫날 공항 안에서만 보았던 파리의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에펠탑만 아침에 급히 올라가보고 개선문이나 퐁네프다리, 샹젤리제(몽테카를로의 여파로 별로 가보고 싶지 않았다, 정말)를 뒤로한 채 카미유 클로델에 대한 열망으로 로댕 갤러리로 직행했지만, 비엔날레를 떠났는지, 세계 어딘가에서 특별전이라도 하는 것인지 분명히 있다던 그녀의 작품은 단 한 작품도 없었다. 나는 황망히, 그리고 차분히 몇 년 전 서울에서 보았던 로댕의 작품들을, 그의 작품 속 완벽한 근육들과 거대담론을 하나씩 곱씹으며 카미유 클로델 작품들의 늘어지고 탄력 없는 살들과 삶의 황량함을 감히, 내내 그리워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도 비슷한 상황은 이어졌다. 뭉크와 클림트, 마네 등은 출타 중이셨다. 하지만 오르세에서의 경험은 정말 짜릿한 것이었는데, 정말 원작의 아우라가 너무나 경악스러웠기 때문이다. 책이나 웹상에서 늘 보았던 그 그림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평소 무시하곤 했던 드가와 로트렉의 재발견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집요함과 광기어린 그림들을 보며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캔버스를 긁는 나이프의 소리가 계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날 밤. 촉촉하게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숙소 앞의 몽마르트 언덕에 올랐다. 성당에서 미사하는 것도 보고 카페에서 맥주도 한 잔씩하고 일행들과 함께 기분이 좋을 법도 했지만, 나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서 말문도 닫고 있었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매일 저녁 찾아왔을, 절박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과 지치고 초라한 행색이지만 성당 안에서만큼은 한없이 편안해 보이는 해외노동자들, 그리고 우리 일행을 비롯해 관광의 한 코스로 그 성당을 찾은 사람들. 그 거짓 같은, 너무도 잔인한 평화로움에 나는 외관의 모습도 찍지 못하고 카메라만 바보처럼 들고 서있었다. 그때 성당을 등지고 계단에 앉은 한 젊은 남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뿌옇게 보랏빛으로 잠기는 파리 시내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노래하는 그 쓸쓸한 뒷모습을 동영상으로 오래도록 기록해두었는데, 찍는 순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볼 때마다 이렇게 숨이 막힐 것 같다. 우리 일행들이 뒤에서 너무 소란스럽게 굴었던 것일까. 그는 데미안 라이스의 노래를 비롯한 정체 모를 세 곡의 노래를 간신히 부른 후, 한숨 한 번 내쉬지 않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비에 젖은 기타를 챙겨, 천천히, 침착하게 몽마르트르의 계단을 내려갔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유치하지 않게. 의연하게.

다음 날 파리 7대학 앞에선 번역가 한유미 씨를 만났다. 지난 기수 문학상 수상자들의 기행문에 늘 등장하던 분들을 한 분씩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대학 도서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초라한 한국어학과 도서실을 살펴본 후 가진 점심식사 자리에서 난 쉽게 질문을 건넬 수가 없었다. 굳이 답변을 듣지 않아도 한국학의 현실이 얼마나 지독하게 어려운지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국학과엔 여자 친구가 한국 사람이라서 진학을 희망한 학생들이 많다고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덤비기엔 너무 어려워서 졸업하는 학생들은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대부분의 유럽에선 한류의 흔적이 없다고 해야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한국에 대해 삼성과 한국 영화, 한국 여자에 대해서만 인식하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이 훌쩍 더 멀게만 느껴졌다.

7일째 아침. A조와 B조는 헤어져 서로 너무도 다른 나라로 떠났다. 작고 허름한 비행기를 타고 폴란드에 도착한 순간 놀라움에 웃음을 터뜨렸던 우리 B조. 온 세상이 하얀 눈밭이었다. 반면 굉장히 어두운 공기의 느낌과 조용한 사람들. 우리는 바르샤바 대학 바로 옆 숙소까지 오면서 폴란드가 막연히 조금씩 좋아지다가, 짐을 풀고 시내를 걸으면서 완전히 반하고야 말았다. 폴란드에는 관광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었다. 체코처럼 영리하게 굴지 못하고 전쟁 때 많은 문화유산을 잃어야했던 폴란드의 자격지심이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듯했다. 숙소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에서 주인공이 숨어 있던 방에서 내려다본 참혹한 풍경이 막연히 떠올랐다. 물론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그 아우라라는 것은 정말 강하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눈이 20센티 이상 쌓여있어 걷는 일은 힘들었고, 장화 한 켤레가 절실했지만 신발에 감기는 독특한 질감의 눈 때문에 걷는 내내 묘한 기분에 빠져들곤 했다.

폴란드에서의 둘째 날. 바르샤바 대학의 한국학과 학생 두 명, 에바 리나제흐스카 교수와 간담회를 가졌다. 세 분 모두 한국말이 너무 유창했고, 한국문학에 대한 열정이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너무 강해 놀라웠다. 폴란드에서 개봉한 한국영화도 상당수 되고 영화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 개인적으로 키에슬로프스키와 로만 폴란스키에 대한 자국민들의 견해도 묻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과 한국영화에 대한 반응도 자세히 들을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두 제자 분들이 하루의 시간을 통째로 내준 덕분에 우린 알차게 돌아다니고, 맛있는 폴란드 가정식도 먹을 수 있었다. 여름엔 날씨도 좋고 아름답다는 구시가와 젊은이들의 온상(실제로 커다란 온실 같은 디자인이다) 같았던 너무나 멋진 국립도서관, 쇼팽의 심장이 있는 성십자가 교회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추모물결이 끊이지 않았다던 넓은 광장 등을 우리는 우산을 쓴 채 눈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다. 걷는 내내 거리는 한없이 조용했지만 사람들은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단지 차분하고 조금 우울할 뿐이었다. 단 한 달이라도 폴란드에서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잘 접어두고, 쇼팽공항에서 프라하행 작은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때마침 창밖으로는 이라크로 파병되는 폴란드의 군인들이 거대한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여행한 4개국 중 가장 가난하고 가장 미국에 우호적인 나라, 폴란드의 이름을 나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1시간의 짧은 비행 후 도착한 곳은 폴란드와 비슷한 날씨, 그러나 전혀 다른 나라 체코. 그곳의 테마파크 프라하.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주 보았던 오래된 건축물들과 현대식 간판들의 부조화에 나는 순간 장님이 되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넘치는 동양인 관광객들. 그 중 90%는 한국인이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서로를 부끄러워하며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물가도 예상외로 높았는데 프라하의 노동인구는 관광도시의 특성답게 90%가 서비스업이고 10%만 제조업이라고 하니 비싼 물가와 압도적인 독일제 물건들이 이해가 되었다. 그날 밤. 체코의 전직 대통령이 갇혀있었다는 감옥을 개조한 숙소에서 나는 편협해진 나의 시선을 재정비하기 위해, 이튿날 처음 보는 듯 프라하를 다시 만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처럼, 고딕양식의 프라하성이 멋지긴 했으나 내게 보이는 것은 카를교 위에서 고행하고 있던 많은 걸인들과 유난히 빤질빤질하게 빛나던 소원을 들어준다는 청동상과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고 ‘아싸라비아!’를 연발하던 기념품 상점의 흑인 ‘삐끼’와 묘하게 푸르긴 했으나 인파속에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카프카의 작업실, 유네스코 지정 교회였지만 낡고 초라하고 싸늘하기만 했던 그곳에서의 작은 오르간과 바이올린의 협주 등과 같이 모두 슬프고 우스꽝스러운 모습들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일정보다 반나절 일찍, 첫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출발했다. 정말 꼴 보기 싫을 땐 묵묵히 돌바닥만 보고 걸었던 나였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프라하를 그토록 미워할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 정말 못 말리는 건 역시 사람이니까 말이다.

드디어 다시 합류한 A조와 B조. 5일 내내 햇빛 한 자락 보지 못했던 우리 조는 영국의 엷은 햇빛조차 반갑기 그지없었다. 프라하를 잊고 상쾌하게 런던을 누비던 우린 우연히 시간이 맞아 버킹검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을 운 좋게 보게 되었다. 철문이 열리자 ‘처억!’ 하고 일제히 올라가는 일본 디지털 카메라와 한국의 핸드폰들이 재밌는 풍경을 만들어냈다. 서양인들에 비해 키도 작고 좋은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 나는 근위병들 대신 그 무수한 손들을 찍을 수 있었다.

런던에서의 일정은 제법 여유로웠던 것 같다. 빅벤, 템즈강, 피카딜리 서커스와 트라팔가 광장 등을 수시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블록마다 눈에 띄는 스타벅스에서 먹었던 진한 커피와 부도덕으로 점철된 대영박물관에서 만난 자극적인 이집트 미이라들, 피시 앤 칩스 전문점에서의 맛있고 푸짐한 식사, 해롯 백화점에서 최고조를 달렸던 위화감, 중고 CD가게에서 발견한 데이비드 보위의 명반과 골드프랩, 너무 좁고 화장실이 한 개뿐이라 결국 숙소를 옮겨야 했던 한인민박집과 한참을 웃고 떠들던 민박 앞 놀이터 등 재밌고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너무나 많았다.

영국문화원에서의 공식일정 또한 예상 밖으로 흥미진진했는데, 우선 통역을 해주신 번역가 고은주 씨가 너무 멋진 분이었기에 그렇기도 했고, 영국문화원의 철저한 보안과 문화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과 그에 못지않은 포용력이 그러했고, 여행 전 우리의 골칫거리였던 『둠스펠』의 작가인 클리프 맥니시가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재밌는 분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이렇게 빠짐없이 주저리주저리 쓰고 나니 갑자기 여행 전과 마찬가지로 작은 내 방,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가 보인다. 그러나 누구나 당연하게 말하는 것처럼 여행은 분명 많은걸 배우게 하나보다. 나 자신의 초라함만 복습하고 돌아오게 될까봐 떠나기 전부터 걱정만 앞섰던 여행이었지만, 이렇게 반추하며, 그리고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로 가슴 두근거리는 나 자신이 다행스럽다. 어쨌든 이제 다시 시작이다. 수상작인 시나리오를 영화화해야 하고, 새로운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 성급하게 눈앞의 문제들만 닦달하며 거칠게 시작할 뻔 했던 내게 크게 숨 한번 들이켜고 넓은 시야로 차근차근 걸어 나갈 수 있도록 해준 이번 여행 자체에 고마운 마음 그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