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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특수성의 이해는 보편성에서의 출발

편집자 주) ‘둠스펠 시리즈’로 영국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판타지 작가로 부상하며 세계 16개 국가에서 번역, 소개된 클리프 맥니시와 제4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가들이 만났다. 이들은 현지 시간으로 2006년 2월 13일 오후 4시 반부터 런던 영국문화원 본부 일층 리셉션 룸에서 만나 약 1시간 30분 동안 판타지문학과 맥니시의 작품세계에 대해 좌담을 가졌다. 통역은 런던 SOAS대 한국학과 고은주 교수가 맡았다.

- 맥니시 : 이제 막 본격적인 글쓰기의 길로 접어든 한국의 청년 작가들을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2003년에 대산문화재단과 주한영국문화원이 공동주최한 ‘한영 판타지문학포럼’에 참가하면서 한국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 저희들도 반갑습니다. 이번 간담회에 오기 전에 『둠스펠』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유난히 마녀가 많이 등장하더군요. 어떤 장면에선 그 많은 마녀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다니기까지 합니다. 왜 무서운 마술사나 남자 괴물이 아니라 하필 여자 마녀뿐인지 궁금했습니다.

- 맥니시 : 마녀는 서구 문화에 있어 전통적인 악역입니다. 영국 어린이들은 마녀를 떠올릴때 무섭고, 못생긴 악당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한국에도 마녀와 비슷한 귀신이 있지 않나요? 예를 들어 여우(구미호)나 처녀 귀신같은. 최근 영국에 스즈키 코지의 『링』 연작이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이 반향을 일으키면서 서양 사람들도 동양의 귀신에 대해 비슷한 공감을 갖습니다. 『둠스펠』의 마녀도 『링』의 여자 귀신처럼 공포스러운 초자연적인 대상일 뿐이지 여성이라는 성별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둠스펠』의 마녀는 내 딸의 주문이기도 합니다. 딸이 나에게 마녀 이야기, 그것도 아주아주 미워서 결국 다 죽게 되는 마녀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설정된 것입니다. 『둠스펠』의 마녀는 한국의 처녀 귀신이나 구미호처럼 어린이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어떤 소재일 뿐입니다.

▲ 하지만 선생께서는 2003년 '한영 판타지문학포럼'에 참석한 자리에서,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판타지 쓰기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지나친 폭력이나 섹스는 절대 표현해선 안될 뿐 아니라, 아동용 판타지를 구입하는 일에 지갑을 여는 사람은 아이들 자신이 아니라 부모라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고. 그래서 어린 소녀를 쫓는 적대적인 대상을 마녀로 설정함으로써 마녀가 아닌 다른 이, 이를테면 부도덕한 남성을 연상케 하는 몬스터를 등장시킴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성적인 오해를 피하고자 이런 설정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 문제를 특별히 의식하며 글을 쓰지는 않는지요? 있다면 특별히 그런 문제들을 피해가는 글쓰기 비결이 있는지요?

- 맥니시 : 성인을 대상으로 한 판타지라면 성적인 이슈가 문제가 될 리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린이 독자의 경우는 무척 예민합니다. 특히 성적인 문제는 치명적이지요. 그렇다고 글을 쓰는 단계에서 특별히 자기 검열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원고가 완성되면 출판사에서 그런 문제들은 검토해 줍니다. 저는 아동판타지를 쓰고자 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일단은 그냥 써라. 하지만 자신이 쓰는 글이 어린 독자에게 적합한지는 작가 자신의 판단력의 문제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해 줍니다.

▲ 그렇다면 선생께서는 작품을 쓰는 동안 무엇에 가장 집중하는지요.

- 맥니시 : 인물형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작품의 주인공, 소재, 메시지 등등…… 특히 메시지는 독자들이 자연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2003년 한국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작품의 주제에 도덕성(morality)이 깃들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린이 책을 쓰는데 있어서 도덕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냐는 요지였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도덕에 매달리기 보다는 줄거리와 주인공, 특히 인물 형성에 노력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메시지는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독자를 배려하는 글쓰기라고 믿습니다.

▲ 한국에서도 판타지 소설은 인기가 높습니다. 고등학생들도 직접 작품을 써서 인터넷 등을 통해 독자를 형성하고, 몇몇은 출판까지 해서 높은 판매 부수를 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 판타지 소설은 모두 비슷비슷한 클리셰들이 반복됩니다. 어둡고 음침한 세계, 뛰어난 주인공,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결 등. 비슷비슷한 작품이 반복해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판타지의 한계로 지적받기도 하는데요. 이런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 맥니시 : 영국도 그렇습니다. 영국 판타지 문학, 특히 어린이 독자를 상대로 한 작품의 90%가 J.R. 톨킨의 세계관과 작품 형식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톨킨의 작풍이 판타지 장르의 형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비슷비슷한 작품이 자기 복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경향에 대해 무척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클리셰가 없는 완전히 새로운 판타지를 쓰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어쩌면 판타지를 읽는 일은 그런 클리셰를 즐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 경우, 『둠스펠』은 판타지 장르의 클리셰들이 차용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작품인 『실버 차일드』부터는 새로운 세계관과 형식을 드러내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판타지 중에는 톨킨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특출한 작품들도 있지만 그런 작품들은 안팔리고 출판이 안되는 일이 많습니다. 솔직히 새로운 시도보다는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팔리느냐, 얼마나 알려지느냐가 더 중요하게 여기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 『해리포터』『반지의 제왕』『둠스펠』등의 영국 판타지 문학이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으로 보는지요. 반대로 영국에서는 왜 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판타지는 잘 팔리지 않는지요.

- 맥니시 :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항상 그 질문을 받습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왜 한국에서는 영국 판타지 소설들이 인기인지, 한국 판타지는 얼마만큼 읽히는지?

▲ 몇몇 히트작들이 있지만 그 작품들은 서구 판타지를 원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 판타지 소설들에 대한 자기반성도 일고 있습니다. 반면에 『해리포터』가 제3세계 작가가 썼다고 해도 이렇게 전 세계적인 반향이 일었을까 하는 의문과 영미 문학가이기 때문에 누리는 문화적 프리미엄에 대한 생각도 있습니다.

- 맥니시 : 서양의 판타지 문학 역사가 오래된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테리 브룩스라는 작가에 의해 성인 판타지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불과 3년 전의 일이니까요. 때문에 결코 한국 판타지가 서양에 비해 늦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해리포터』의 경우 영미 작가이기 때문에 누리는 문화적 프리미엄이 있다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해리포터』의 주인공은 전형적인 영국 학생의 모습을 담고 있고 작품 또한 정말 영국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 독자들은 그러한 지역적 차이보다는 보편적인 메시지에 먼저 공감하게 됩니다. 문화적 특수성의 이해란 보편적 공감대의 형성 없이는 국제적인 성공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역으로 생각해서 정말 한국적인 판타지를 쓰고,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해도,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면 성공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 자리에서 나눈 많은 이야기가 이제 문학의 길을 시작한 우리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끝으로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맥니시 :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일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한국에서 평가 받는 것이 외국에서 평가 받는 것보다 못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영미 출판시장에서 인정받는 것에 판타지 문학의 진로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누구 문화다, 이건 내 문화다 하고 나누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런 구분을 뛰어 넘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잘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를 바랍니다. 단 한 사람의 작가라도 한국적 판타지가 성공하게 된다면 이후 세계적인 반향은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때문에 여러분들과 같은 젊은 작가들의 분발이 절실합니다. 오늘 우리의 고민들을 해결해 줄 한국문학을 기다리겠습니다.

* 정리 : 임태훈(성균관대 독문과 4년, 제4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 클리프 맥니쉬(Cliff McNish)

1962년 잉글랜드 타인위어주 선덜랜드에서 태어나 잉글랜드 남동부로 이주한 뒤 그곳에서 계속 살아왔다. 원래 IT프로그래머였으나 이야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딸을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데뷔작이자 성공작인 『둠스펠 트릴로지』도 그중 하나이다. 『실버 차일드』『실버 시티』『실버 월드』 등 ‘실버’ 시리즈를 최근 완간하였다. ‘성공적인 판타지 쓰는 법’, ‘어린이를 위한 창작 교실’, ‘소설쓰기의 재능’ 등의 워크숍도 진행하고 있다.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는 듯한 생생함을 주는 묘사와 악의 세력인 마녀들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표현해 낸 것이 특징인 ‘둠스펠 시리즈’는 영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16개 국가에서 번역, 출간되는 등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2003년에는 대산문화재단과 주한영국문화원이 공동주최한 ‘한영 판타지문학포럼’에 참가하여 ‘작가로서의 나의 삶’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 둠스펠 시리즈

항상 같은 꿈을 꾸던 남매 레이첼과 에릭은 마녀 드래그웨나에게 잡혀 이스리아 행성으로 끌려간다. 마법을 가진 아이들을 모아 지구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가진 사악한 마녀 드래그웨나는 레이첼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 지구 정복을 실현하고자 한다. 상상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마법의 세계 이스리아에서 마녀에게 온갖 박해를 당하며 살고 있던 아이들은 레이첼이 자신들이 기다리던 ‘희망의 아이’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레이첼은 마녀의 시험을 견뎌내고 수많은 역경을 뛰어넘으며 이스리아와 지구를 구해내기 위해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