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

웹진 대산문화

조기축구와 나

본래 내게 떨어진 제목은 ‘축구와 나’였다. 축구 이야기라는 바람에 덜컥 쓰겠다고 했으나, 돌아서 생각하니 도무지 가당치가 않은 일이었다. ‘축구와 나’라는 제목은, 펠레나 마라도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축구에 뭔가를, 인생이나 명예나 젊음이나 간에 뭔가 묵직한 걸 건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엄청난 제목을 약간 손질해 보니 그럭저럭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하여 ‘조기축구와 나’

동네 조기축구회에 나가기 시작한 지 이제 만 5년쯤 되었다. 평균 잡아 일주일에 두 번쯤은 나갔으니 꽤 성실한 조기 축구인이었던 셈이다.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런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나 역시 땀을 흘리며 몸을 쓰는 재미에 홀딱 빠져버렸다. 물론 조기회에 착륙하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텃세도 만만치 않았고, 나는 나대로 속으로 기가 죽어 있었다. 층층시하로 버티고 선 ‘족쟁이’(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선수 출신들을 이렇게 부른다)들과 함께 발을 맞춰 보니, 지금껏 공 못 찬다는 소린 안 듣고 살았다고 자부했던 내 축구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던 탓이다. 그런데도, 지기 싫어하는 천성과 뻣뻣한 됨됨이는 감추어지지 않았으니 기존 멤버들과, 특히 ‘족쟁이’들과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운동장에 나가기 시작한 첫 번째 주의 일이다. 정식 경기를 시작하기 전, 작은 골대를 놓고 미니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야, 골대 뒤로 빼!” 좀 먼 데서부터였으나 분명히 나를 향해 들려온 말이었다. 반말의 명령조였다. 나보다 나이가 예닐곱쯤 많은, ‘족쟁이’ 출신에다 조기 축구회의 왕고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보아 하니,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았지만 나는 정답대로 하지 않았고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 옆에 있던 눈치 빠른 회원이 재빨리 골대를 옮겨놓는 바람에 그럭저럭 넘어가게 되었지만, 마음은 이미 꼬일 대로 꼬였다. 한번만 더 건드려 다오. 저런 인간들을 응징하는 게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잠시 후 벌어진 시합에서 그와 나는 같은 편이었다. 그는 오른쪽 공격수였고 나는 중앙 허리수를 맡았다. 나는 상대 수비 뒤 공간을 찌르는 패스를 넣었고, 그는 공을 받아 멋진 크로스를 올리고 난 후 나를 향해 달려오면서 말했다. “야, 너, 너, 진짜, 패스 좋았어, 잘 했어!” 어, 이 인간 봐라, 또 반말이네 싶으면서도, 이미 마음은 녹작지근하게 풀어져 내리고 있었다. 정의 실현의 큰 뜻은 팽개쳐버리고, 공 잘 찼다는 ‘족쟁이’의 칭찬 한 마디에 초등학생처럼 기뻐지는 마음을 나는 그저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갈등이 이처럼 순조롭게 해결되었던 것만은 아니었으니, 한 ‘족쟁이’와 충돌로 인해 잠시 동안 운동장을 떠나 있던 일도 있었다. 당시 조기회의 회장이었던, ‘족쟁이’들의 왕으로 군림하던 한 인사 때문이었다. 40대 후반인데도 워낙 공 다루는 솜씨가 좋고, 재력이 있는 데다 손도 크고 너스레도 좋아 조기회의 중심인 인물이었다. 그러다보니 너무 잰 체 하고 잔소리가 심해지는 게 문제였다. 함께 같은 편이 되어 축구를 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잔소리를 듣는 게 참 난감한 일이었다. 왜 패스가 그 모양이냐, 이쪽으로 줬어야지 등등, 전혀 팀워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를 경기 중에 해대는 것이었다. 어느 하루 내가 그 잔소리 폭탄에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입회한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은 신입회원이었고 그쪽은 막강 카리스마의 회장이었다. 경기가 중단되었지만, 싸움은 서로 고성이 오고가는 수준에서, 상소리와 물리적 폭력으로 점화되기 직전에 무마되었다. 반말쟁이 ‘족쟁이’ 회원(그는 회장과 동갑내기 친구였고 운동장에서는 누구에게나 반말이었다)의 능란한 솜씨 덕분이었다. 상대가 회장이라서 문제였던 것이지 사실 운동장에서 이 정도의 언쟁은 매우 준수한 수준이었다. 어떻든 그 후 잠시 동안 운동장에 나가지 않았다. 절치부심, 혼자서 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술이야 짧은 시간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체력은 또 다른 문제가 아닌가. 나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들에게 체력에서 밀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비밀 훈련으로 몸을 만들고 다시 운동장에 나가 복수 혈전을 벌였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대충은 그렇다. 6개월 정도 규칙적으로 달리기를 하고 나니 체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기술이 안 되니 그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렇게 했다. 때 마침 히딩크식 압박축구가 한국축구의 새로운 전형으로 부각되고 있을 시절이라, 거친 몸싸움이 환영을 받았다. 세계적인 조류에 부응하여 비록 동네 축구지만 할 것은 다 한다는 자세로, 여기서도 압박, 저기서도 압박이었다. 나도 텅텅 부딪치고 밀고 잡아당기고 하면서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그래, 이게 진짜 축구야, 속으로 감탄을 하면서.

그 후로 지금까지 여전히 그런 자세로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있다. 어느덧 50을 넘어선 회장과 반말쟁이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래서 잔소리는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반말쟁이는 여전히 반말이고, 나도 여전히 늘지 않은 실력을 몸으로 때우고 있는 중이다. 나이 차가 있지만 그들과는 이제 만나면 즐거워지는 사이가 되었다. 매주 같이 뛰고 목욕하고 밥먹고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힘든 일이다.

이런 정도가, 내가 좋아하는 우리 동네 조기 축구인들이 사는 모양새다. 나처럼 가방끈이 예외적으로 긴 ‘먹물’도 있고, 사무원이나 고급 관료도 있지만, 대개는 자영업자거나 몸을 써서 사는 사람들이 다수다. 그리고 직업이 뭐건 간에 운동장에 들어오면 계급장이 없어진다. 거칠고 투박하고 종종 상스럽기도 하지만, 위선이 없어 좋다. 그리고 이들은 무엇보다 말보다 몸이 빠른 사람들이다. 처음 운동장에 나갔을 때 나를 감동시켰던 장면이 있다. 용달차에 굵은 H빔을 달고 운동장을 고르고 있는 굉장한 모습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손질된 운동장을 그들은 세계 최고의 맨땅 구장이라고 자부했고 정말로 그래 보였다. 축구 골대가 부서졌을 때도 간단했다. 필요한 굵기의 쇠파이프와 절단기 용접기가 등장하여 잠시 뚝딱거리니, 페인트칠까지 말끔하게 끝난 새 골대가 나왔다.

그렇게 몸이 먼저 가니 쓸데없는 말이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다. 내게 축구란, 어떤 사념도 끼어들지 않은 순수한 몸의 움직임에 몰입하는 것이다. 말보다 몸이 빠른 사람들과 축구, 이 둘은 서로 닮았다. 다만 하나 가슴 아픈 것은, 몸싸움을 하면서 제대로 운동장을 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금껏 지켜본 바로는 아무리 뛰어난 ‘족쟁이’도 만 50 정도가 한계였다. 그 이후엔 나도 우아한 ‘노인정 축구’의 세계로 가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니 벌어놓은 기술이 없어 노후 대책이 걱정이지만, 그래도 몸을 쓰는 일인데 설마 몸으로 때우는 방법이야 없을까 하는 희망으로 적당히 위안을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