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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처럼 살고 싶다

분주한 한 주가 지나고 또다시 찾아온 주말 저녁, 차갑게 냉장시킨 맥주 두 병, 그리고 소파에 눕다시피 기대앉아 보는 프리미어 리그는 고단한 일상에 대한 최고의 위로다.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북미 지역에서는 축구보다 아이스하키가 더 대중적인 열광을 자아내는지라 스포츠 채널에서도 애써 편성표를 확인해야 챙겨볼 수 있지만, 그래도 로키 산맥을 타고 흐르는 빙하의 물로 만들었다는 맥주가 섭섭한 갈증을 대신 달랜다. 사방은 고요하고 나는 외롭다. 아니, 외롭지 않다. 화면 속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스물두 명의 선수들이 다 친구라고 생각하면, 나는 견딜 만하다. 내 심장은 아직 식지 않았고, 맥주는 맛있고, 축구는 여전히 재미있다.

축구는 역시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보아야 제격이다. 당연한 사실이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이동 중에 라디오를 통해, 지금 내가 그러하듯 인터넷으로 문자중계를 ‘읽고’ 경기가 끝난 후 VOD로 아쉬움을 대신하는 건 미지근하게 덥혀진 김빠진 맥주를 홀짝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어쩌랴. 하필이면 축구팬들을 가장 행복하고 황홀하게 하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 세계에서 몇 되지 않는 축구에 냉담한 나라에 머무르고 있으니. 나는 열심히 문자로 선수들의 동선을 따라 좇으며 상상한다. 어쩌면 상상 속에서 그들의 발은 더 가볍고 몸은 날래다. 순정하고 선명하다. 그들은 역시 더불어 사귀기에 족한, 뜨겁고 유쾌한 친구들이다.

작가가 축구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여성이 축구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호기심어린 관심을 받는다는 건 과히 즐거운 일이 아니다. 언제부터, 어떻게, 왜 축구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대답하는 일도 슬슬 따분하다. 타고난 근력과 순발력이 평균 이하인 데다가 겁이 많고 게으르기까지 한 내가 ‘감히’ 축구를 즐긴다고 말하는 데 대한 부담도 이젠 적이 익숙할 지경이다. 기실 좋아하는데 무슨 거창하고 대단한 이유가 있는가? 어떤 대상을 싫어한다고 할 때에는 그 까닭과 연유를 거듭거듭 확인해야 마땅하겠지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데야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도리어 구차하다.

다만 나는 어린 날부터 축구를 즐기는 환경에 익숙했던 것뿐이다. 스포츠 중계를 즐겨 보는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에 텔레비전 화면으로나마 중요 경기는 꼬박꼬박 챙겨 보았고, 이따금씩 외딴 변방의 작은 도시에서 ‘팬 서비스’ 차원으로 개최되는 실업팀들의 원정경기는 놓쳐서는 안 될 ‘문화행사’였다. 이미 내 고향의 축구 전통은 태어나 자랄 때부터 내게 흡수되어 있었다. 김도근과 설기현을 배출한 강릉상고와 김현석과 우성룡을 배출한 강릉농고의 이른바 ‘농-상전, 상-농전’이 벌어질 즈음에는 작은 변방의 도시가 활기로 들썩였다. 화려한 응원과 라이벌간의 신경전이 조용한 마을을 열기로 뒤흔들었고, 축구 게임이 끝나고 어김없이 벌어지는 일들까지도 어린 내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패한 학교 학생들이 상대방 학교에 몰려와 교문을 뜯었다느니, 동문들까지 함께 얽혀 패싸움을 했다느니…… 그런 것들이 위험한 ‘사건’이 아니라 동네 사투리로 ‘뽈을 차야만’ 벌어지는 한바탕 축제 행사로 자리매김 되어 있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축구와 관련된 소중한 추억이 있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 동네 리그에서 ‘조지 베스트’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누군가와 요한 크루이프와 펠레를 자칭했던 누군가, 차범근의 등번호 11번을 서로 갖겠다고 다투다가 친구들과 주먹다짐까지 했다는 누군가에게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의 셈속 없이 단순하고 명쾌하며 정직했던 꿈의 기억이다. 정열을 믿고, 모험을 꿈꾸고 시도했던 위험하나 아름다웠던 시절의 회상이다. 지금은 따라주지 않는 몸에 마음만 앞서 십분만 뛰고 나면 헉헉거리며 나동그라지는 형편없는 선수들이지만, 추억을 곱씹는 그들과 내 눈에는 절로 아련한 연기가 드리운다. 어둠침침한 눈으로 바라본 그들은 영락없이 날렵한 소년이다.

프랑스의 문필가 장 지로두는 숱한 구기 종목들 중에서도 유독 축구가 가장 많은 사람들의 가장 큰 열광의 대상이 되는 이유에 대해, 축구가 공이 지닌 최대한의 효과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공은 자립과 반동의 속성을 지닌 세계 위의 또 다른 위성이다. 이것을 손을 사용하여 다루었을 때 그것에는 교활한 인간성이 개입되며, 이미 더 이상 축구가 아니다. 지로두는 손을 갖고 속일 줄 아는 두 동물은 인간과 원숭이 뿐이라고 말한다. 공은 속임수를 용인하지 않는다고, 별들과 같은 자전(自轉)만을 허용한다고.

그 정직한 별을 향해 인간은 자신의 신체 중에서 가장 불완전한 발을 뻗는다. 나는 축구를 보다가 문득 슬퍼질 때가 있다.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인가 싶겠지만, 번연히 예정된 패배를 알면서도 끝내 그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감수하는 사람들은 내 괴이한 감상을 이해해 줄 것이라 믿는다. 아무리 위대한 선수라도, 아무리 철저히 훈련하여 조직력을 길러도 언제나 모두가 승리할 수 없다. 어지간히 실수에 대처할 능력이 생기고 익숙해질 무렵엔 육체의 한계가 발목을 잡는다. 승리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만큼이나 패배의 아픔은 쓰리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선수들 편이다. 아무리 어이없는 플레이에도 입 바깥으로 새어나오려는 비난을 기어이 참고, 어쨌거나 격려하고 응원한다. 그들만큼 잘하고 싶은 열렬한 소망을 품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만의 작고 어두운 골방에서 벗어나 푸른 잔디 앞에 서면 비현실적인 행복감에 젖게 된다. 사람들의 함성에 가슴이 설레고 선수들의 이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과 발끝에서 패어 튀는 흙에 긴장과 흥분이 교차한다. 뛰어라! 후회하지 마라. 달려라! 미련을 두지 마라. 공은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구르고, 우리의 덧없는 생도 그러하고, 나는 여전히 간절하게 축구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