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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중의 만해문학상 수상
 
 
 
2004년 12월 13일 오전 10시 금강산 구룡연 들머리의 식당 목란관에서는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상식이 열렸다. 제19회 만해문학상 시상식이었다. 수상자는 북의 작가 홍석중(1941~).

출판사 창비가 주관하는 만해문학상이 분단 이후 최초로 북의 작가 홍석중의 소설 『황진이』를 수상작으로 선정한 것은 그해 7월 20일이었다. “최근 3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시집, 소설집, 장편소설, 희곡집, 평론집 등)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만해문학상이 2002년 평양 문학예술출판사에서 나온 『황진이』를 수상작으로 선정한 것부터가 분단 현실과 문학적 분단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황진이』를 비롯한 북의 문학작품들이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이라는 수상 규정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되, 그동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분단의 하중에 짓눌려 왔던 터.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분단 반세기 만에 그 하중을 떨치고 일어서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게다가 홍석중이 누구던가! 민족문학의 보고라 할 대하소설 『임꺽정』의 지은이인 벽초 홍명희의 친손자 아니겠는가(또한 그의 부친은 북의 저명한 국어학자 홍기문이다). 남쪽 출신으로 분단 뒤 북으로 올라간 벽초의 손자가 남쪽 출판사가 주관하는 문학상을 받는다는 것만큼 상징적 의미가 큰 사건이 따로 있겠는가. 게다가 『황진이』는 그런 문학 외적 요인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실제로 뛰어난 문학작품이었음에랴.

어쨌든, 만해문학상 시상식은 창비에서 주관하는 다른 문학상들과 함께 그해 11월 24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수상자인 홍석중이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해 상금을 전달하지 못한 터였다. 창비와 북의 조선작가동맹 사이에 시상식과 관련한 협의가 오간 결과 금강산에서 ‘지각’ 시상식을 열기로 한 것이었다(당시만 해도 남쪽 주민들의 금강산 관광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남북 당국자는 물론 사회 각 부문 및 기관 사이에 연락과 회합이 빈번했던 시절이었다.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지만 불과 7년여 전의 일들이다!).
 
▲ 만해문학상 시상식에서 이선영 운영위원장(왼쪽)이 홍석중에게 시상하고 있다

목란관에서 열린 만해문학상 시상식에는 수상자인 홍석중과 함께 북의 시인 박세옥과 장혜명이 참가했다. 남쪽에서는 백낙청 창비 편집인과 이선영 만해문학상 운영위원장, 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인 한기욱 인제대 영문과 교수, 소설가 정도상 등이 참석했다. 나 역시 유일한 기자로서 현장에 입회했다. 통일문학사의 중요한 순간으로 남을 시상식을 취재해서 기록으로 남기라는 주최측의 배려였을 것으로 헤아린다.
 
이선영 운영위원장이 수상자 홍석중에게 상패와 상금 1천만 원, 그리고 부상으로 노트북 컴퓨터를 전달했다. 수상자 홍석중은 수상 연설에서 “북에서 글을 쓰고 남에서 상을 주고, 남북 문인이 함께 모여 수상을 축하하는 일은 장구한 분단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며 “6․15 공동선언이 없었다면 이런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인 만큼 작가로서 앞으로도 6․15 정신을 살리는 일에 매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수상에 앞서 백낙청 편집인도 인사말을 통해 “오늘의 뜻 깊은 만남으로 인해 남과 북의 민중이 분열 이전보다 한층 떳떳하고 빛나는 살림으로 다시 뭉치며 세계 만방에 자랑할 찬란한 민족문학을 공유할 날을 앞당기게 되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 시상식 후의 기념사진    

여기까지는 공식 일정이었지만, 기자인 나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수상자 인터뷰였다. 여느 시상식이라면 수상자를 상대로 한 언론 인터뷰란 지극히 당연한 순서였겠지만, 이것은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행 중에는 북의 대남 정보 담당 ‘일꾼’들도 들어 있었다(물론 남쪽에서도 통일원 관계자가 동석했다). 그들은 시상식의 원활한 진행과 차후의 남북 문학 교류를 위한 논의를 측면 지원하는 한편, 전반적으로 상황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역할 역시 겸하고 있었다. 북쪽 작가를 상대로 한 남쪽 언론의 인터뷰는 불가하다는 것이 그들의 공식 입장이었다(현장에 북의 기자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터뷰는 할 수 없는 것인가!

동행한 소설가 정도상과 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이 길을 터 주었다. 남북작가대회 추진을 위해 북쪽 인사들과 자주 접촉했던 그들은 홍석중 선생에게 인터뷰와 관계없이 자유롭고도 충분하게 말씀을 하시도록 부탁할 테니 그 말씀을 적절히 인터뷰 형식으로 녹여 내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상식에 뒤이어 마련된 점심 자리는 홍석중 선생의 독무대였다. 사전에 황석영 선생한테서 홍석중을 비롯한 북쪽 작가들에 관해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직접 만나 본 그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입심이 좋았다. 황석영 ‘황 구라’에 지지 않을 ‘홍 구라’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애초에는 시상식에 녹음기를 지참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당시만 해도 새로운 미디어였던 엠피3의 녹음 기능을 북쪽 인사들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금강산 출입 관리사무소의 북쪽 직원에게는 그것이 음악을 듣는 기계라고 설명하고 지니고 온 터였다. 나는 북쪽 인사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엠피3의 녹음 기능을 작동시켜 놓고 홍 선생의 말씀을 재미나게 듣기만 하는 시늉을 했다.

홍 선생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조부 벽초 선생에 관한 것이었다.
 “할아버지 벽초 선생은 왜놈들이 조선말과 조선 정조를 탄압하니까 그것을 살려서 널리 알리려고 『임꺽정』을 쓴 거였지 소설을 쓰려던 건 아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해방 뒤, 미완으로 끝난 『임꺽정』을 마저 완성시키시라는 주문에 대해서도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미완으로 놔두는 게 좋다’며 끝내 완성시키기를 거부하셨다. 나는 미완으로 끝난 뒷부분이 너무도 궁금해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자주 여쭤 보았는데, 할아버지는 좀체 말씀을 안 해 주셨다. 그나마 조금씩 조금씩 알려주신 것을 토대로 내가 직접 완결편으로 쓴 게 『청석골 대장 임꺽정』이다.”
 
그는 말년에 벽초 선생이 황진이를 소설로 쓰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하셨다고 소개하고, 자신의 소설 『황진이』를 상허 이태준의 『황진이』 등과 비교해 설명하기도 했다.
 “상허의 『황진이』는 읽어 보았는데, 상허의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예술성이 못한 것 같았다. 분단 이후 남쪽 작가들이 쓴 황진이 소설에 대해서는 좀 외설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본래 외설을 잘 모르는 작가인데, 이번 소설에서는 나도 늙음을 핑계 대고 외설을 한번 구사해 봤다(웃음).”
 
2004년 12월 13일의 만해문학상 시상식이 지니는 문학사적 의미는 그것이 이듬해 7월 평양과 백두산, 묘향산 등지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약칭 남북작가대회의 ‘예행연습’에 해당하는 행사였다는 데에 있다. 고은 시인을 단장으로 삼은 남쪽 문인 100여 명이 전세기 편으로 휴전선을 넘어가 5박6일 동안 북의 작가들과 발표와 토론을 벌이고 남북 문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6․15 민족문학인협회 구성 등에 합의한 것이 남북작가대회였거니와, 정도상․김형수와 장혜명․박세옥 등 남북의 문인들은 금강산에서의 만해문학상 시상식에서도 남북작가대회에 관한 실무 협의를 계속했던 터였다.
 
남북작가대회에는 당연히 홍석중도 참가했다. 대회 첫날 저녁 평양 인민문화궁전 연회장에서 마주쳐 인사를 건넸더니 그는 금방 나를 기억해 내고는 환하게 웃으며 다짜고짜 끌어안았다. 백두산 천지에서 있은 ‘통일문학의 해돋이’ 행사가 끝난 뒤에는 따로 불러 기념사진을 찍고 느닷없이 뺨에 뽀뽀를 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북한 정부의 초대 내각 부수상까지 지낸 할아버지 벽초와 아버지 홍기문의 무시할 수 없는 후광 덕분인 것 같기도 했다. 행사 기간 내내 그는 남쪽 문인들 사이에서도 단연 ‘스타’였다. 백두산 천지에서는 남쪽 문인들이 그와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설 정도였다.

▲홍석중(왼쪽)과 백두산 천지에서

남북작가대회에서 홍석중은 황석영과 오랜만에 재회했다. 남과 북의 두 소설가는 『임꺽정』과 『장길산』 『황진이』 등을 화제로 삼아 대담을 나누었다. “벽초 선생이 없었다면 『장길산』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황석영왴왴왴하자 “나는 『장길산』의 제일 애독자”라며 “『임꺽정』이 『장길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홍석중이 화답했다. 두 사람은 남과 북의 분단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문학의 뿌리는 하나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 더 나아가, 어떤 형태가 되든 두 작가가 같이 작품을 쓰자는 데에도 합의했다. 그것이 2005년 7월『장길산 그로부터 6년여가 지났지만 두 작가는 아직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게을러서픀의했다. . 상황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도록 강제한 탓이다. 금강산의 만해문학상 시상식과 평양․백두산․묘향산의 남북작가대회 모두 불과 6, 7년 전의 일들이건만, 써 놓고 보니 어쩐지 비현실적인 ‘꿈’을 글로 옮긴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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