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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등가성을 넘어 의미의 등가성으로- 『이상 시선집 Perspective à vol de corneille』

  글을 쓰고 싶었다. 시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았던 삶의 굴곡을 따라 2000년 프랑스에 정착하게 되었고 번역을 시작했다. 사실 현대소설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고 100권에 달하는 한국소설문학대계 전집 외에도 상당수의 고전과 현대소설을 함께 실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상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것도 「날개」가 아닌 『오감도』를 먼저 시작하게 되었는지 되돌아 생각해 보면 무모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대학 시절부터 언젠가는 연구해 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작가이기는 했다. 그래서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비록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긴 했지만, 이상에 관한 연구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냥 부딪쳐 보자, 첫술에 배부르랴,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상 시전집’을 이 땅에 내랴, 하는 치기어린 생각도 있었을 터였다. 어쨌건 이 ‘우리’가 이상 시의 번역을 추진하게 된 동력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공역자인 주비아트 씨는 문학교수이자 비평가이며 무엇보다 보들레르, 랭보, 본느푸아로 이어지는 프랑스 현대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 이상의 시를 접한 그는 가히 애호가들의 열정에 버금가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이상의 비정형적 정신과 언어에 곧바로 매료된 그는 문화적․시간적 거리를 초월하여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이상을, 그리고 그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그러나 막상 번역을 시작하고 보니 번역 외적인 작업량이 너무도 많았다. 원전을 정해야 했고 이를 위해 자료를 수집해야 했으며 일문(日文) 시를 참고하기 위해 일어 학습까지 병행해야 했다. 그나마 일문 원전이 남아있는 경우는 행운이었다. 이와 더불어 현재 남아있는 이상의 작품들 간의 불균형한 수준 문제도 드러났다. 이것은 이상이 생전에 시집을 한 권도 낸 적이 없다는 사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으로 사후 발견된 미발표 원고의 경우에는 습작으로 여겨지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상 이상의 시는 대부분 잡지를 통해 소개되었으며 그나마 묶음으로 발표된 것은, 비록 15편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오감도』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작품간 수준의 불균형 문제는 미숙한 상징을 은유라든가 음성적 특징, 불어의 단어 순서 등 암시적 작업으로 일부 보상하기 위해 노력하긴 했지만 결국 전집이 가지는 한계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한편 공역자가 시인이라는 사실은 가끔 작업을 얽어매는 사슬이 되기도 했다. 시인은, 웃자고 하는 말만은 아니다, 고집쟁이인 경우가 많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나긴 하지만 예술가들이 자주 독단적 성향을 가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간혹 이상 시의 도발적 언어가 공역자에게 지나친 감정이입을 유발하여 ‘부풀림’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때가 있었고 시적 도발과 의미의 전달 사이의 균형을 찾는 노력은 순전히 필자의 몫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비아트 씨의 이해도는 가끔 필자를 경악하게 할 정도여서 조판상의 오류나 일한 번역상의 어색함을 짚어내는 경우조차 있었다. 시의, 나아가 정신의 ‘보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었고 번역 첫작품으로 이상 시를 택한 무모함에 동기를 부여해 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번역은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필자는 이미 정석이 된 해석이나 역자 자신의 해석에 기대지 않고 가급적 원전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는 데 중점을 두어 1차 번역에 임했으며 공역자가 이를 바탕으로 운율, 리듬, 음성적 효과 등을 고려하면서 교정 작업을 했다. 이후 공동 작업을 통해 함께 원작에의 충실도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는 동시에 시적 작업을 수행했다. 우리는 번역된 시가 독자에게 주게 될 반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이 도발 혹은 선동은 시어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며 이상의 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독자로부터 어떤 감정의 표출을 도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번역된 언어권에서의 가독성을 염두에 두고 그 번역권에서 통용되는 문학성을 우선시하여 정형적인 ‘번역된 시’의 모습을 지양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사실 서구어로의 번역에서 제기되는 의미와 문체 등의 ‘등가성’의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만약 이에 대한 법칙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모든 텍스트에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쨌건 우리는 이미 여러 선배 번역전문가들이 지적한대로 이 ‘등가성’의 문제가 ‘단어의 등가성’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번역에 임했고 우리의 이러한 입장은 작업 종료 후 발간을 앞두고 스스로 감수를 자청했던 코드전환식 번역을 추구하는 한국학 연구자와의 마찰을 가져오기도 했다. 애초에 2002년 출간이 예정되었던 작품이 3년의 진통 끝에 빛을 보게 된 것도 알고 보면 한국어에 능통하다는 원어민의 개입과 무관하지 않은데 결과적으로 우리는 시간을 두고 작품을 재검토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시의 번역은 그야말로 시대적 정서를 고려한 시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역으로 누군가 랭보의 「취한 배」를 한국어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을 단지 프랑스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시를 특별히 마음에 두거나 읽지 않는 프랑스학 전공자에게 감수를 요청한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는 아무래도 문법적 오류부터 지적해낼 터이고 표준화되지 않은 문장이나 비사전적 표현에 거부감을 나타낼 것이며 이해가 어렵다는 점을 내세워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을까. 우리는 단지 이해가 어렵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이상의 정신이 머무는 공간을 범인의 그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호통당할 일이겠지만 중고등학생 시절 세계명시선집을 통해 접했던 보들레르는 어쭙잖은 문학소녀에게 단순한 감상주의자로 비추어졌었고 대학 신입생 시절 보들레르를 전공한다는 선배를 만났을 때 언감생심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 시인들의 시가 혹여 그런 오해를 사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명망있는 번역어권 시인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 같다.

  물론 ‘번역’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옥타비오 파스처럼 시의 번역도 창작에 못지않게 자신의 문학적 색깔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작업했던 경우가 적지 않다. 공역자가 한국어에 능통한가 아닌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그가 문학적 소양을 가진 자인가 아닌가가, 특히 시의 번역이 문제시되는 경우 그가 어떤 시를 읽고 쓰는 자인가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져야 할 것이다. 서구의 시에서 고전적인 운율, 리듬, 음성적 효과 등은 현대성에 반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측면은 더욱 중요하다 할 것이다. 원작이 가지는 시정(詩情)과 특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번역어의 시적 효과를 최대화시키는 것, 이것은 몹시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흥미로운 도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오감도』라는 제목은 그 자체가 이상의 시를 대변하는 점도 있거니와 ‘시전집’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밋밋함을 피하고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편집자와의 합의 하에 정한 것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프랑스인들은 시를 쓰되 남의 시를 읽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 표현의 가부여하를 떠나 이것은 프랑스 도서판매계의 일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며 또한 ‘시가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나라’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사족을 덧붙이는 것은 시를 번역함에 있어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우리가 번역하는 시가 지하철에서 프랑스인들이 읽는 책자가 되기는 힘들다는 뜻이며 나아가 번역된 시의 주된 독자가 몇몇 애호가를 제외하면, 최소한 시작은, 연구자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이번에 발표된 ‘이상 시전집’에 시와는 별개로 비교적 방대한 분량의 별첨을 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번역을 마친 지 만 4년이 지나 번역후기가 다소 두서없이 감상적으로 흘러간 감이 없지 않다. 첫 작업인 만큼 나름대로 열정을 쏟았지만 당연히 부족한 점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엮어져 나온 책자를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대산문화재단을 비롯하여 원전, 기존 해석 등에 관해 번역의 초석이 되는 조언을 주신 황현산 선생님과 후일 출판을 앞두고 많이 괴롭힌 이상연구가인 김주현 선생님께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 1930년, 그 암울한 시기를 빛처럼 살다간 한 천재의 고뇌하는 절망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언젠가는 그의 지적 동경의 대상이던 이곳 이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영혼들에게도 두루 가 닿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