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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웠던 시절의 어지러운 책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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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청소년들에게 권장할 만한 책 한 권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면 나는 곤혹스러워 진다. 청소년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소개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던 탓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제 70이 다 되어 가는 우리 세대가 자랄 때에는 지금처럼 읽을 책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믿기지 않겠지만 어린 시절, 지금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권의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읽은 적이 없다. 8․15해방이 되자마자 인민학교에 입학한 나는 졸업할 때까지 방정환 선생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톨스토이나 베토벤을 알게 된 것도 부산 피난 시절 중학교에 입학한 뒤였다. 해방 직후 물자가 귀해 연필이나 공책도 제대로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어린이가 읽을 만한 책도 없었거니와 학교에서 매일같이 스탈린 대원수와 김일성 장군을 찬양하는 교육 이외에는 받은 것이 없었다. 철저하게 공산주의형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한눈팔기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나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책과는 먼 독서문맹의 시기였다.
1․4후퇴 때 부산에 피난와 중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나의 독서환경은 크게 나아지질 못했다. 판잣집에서 겨우 연명하며 월사금도 제대로 못내며 다녔던 천막교실에서 교과서 이외의 책을 구해 읽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살던 판잣집 앞에 소설책을 빌려주는 좌판장사가 등장했다. 그 사람은 매일 좌판에 벌려 놓았던 책을 저녁이 되면 우리 집에 맡겨 놓기 시작했다. 나의 독서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좌판의 책들은 모두 대중소설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히 방인근이나 김내성의 탐정소설류를 읽게 되었다. 나의 독서는 이렇게 탐정소설을 읽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차차 『진주탑』과 같은 번안소설로 옮겨지고 마침내 『쿼바디스』를 만나게 된다. 내가 처음으로 감명받았던 책이다.
학교 선생님이나 사회의 저명인사들은 싸구려 탐정소설을 읽는 아이들을 나무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어른들이 보기에 나쁜 책이라고 금서 취급을 하지만 우선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건 상관없이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이고, 독서를 습관처럼 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책 읽기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크게 달라졌다. 2학년 때부터인가 나는 『사상계』와 『현대문학』을 애독하기 시작했다. 이들 잡지를 수업시간에도 읽었다. 그랬으니 학과 공부가 제대로 되었을 수가 없다. 『사상계』를 읽고 얻은 지식으로 친구들과 논쟁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본격적인 책 읽기는 대학생이 된 뒤부터였다. 서울대학교 문리대라는 대학 분위기 덕도 있었겠지만 나는 주어진 자유시간이 고맙기만 했다. 그 많은 시간을 문학책 읽기에 보냈다. 그 때 마침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이 출간되었으며 대한교과서에서 국가의 보조를 받아 세계의 명저를 번역출판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 책을 닥치는 대로 구입해 읽었다. 뿐만 아니다. 틈만 나면 혼자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걸어 다니며 헌책방을 모조리 뒤져 일제시대나 해방 직후에 출판되었던 책들을 사기 시작했다. 이때 이태준, 이기영, 한설야, 박태원 등의 소설과 김동석의 평론집, 임화와 김기림, 정지용, 오장환 등의 시집을 구하기도 했다. 『자본론』이나 레닌의 저작도 구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그때 구했던 황순원 선생의 단편집 『기러기』의 초판을 갖고 있다가 황 선생께 드리기도 했다.
나의 성장기와 청소년기에 영향을 끼쳤던 책들을 소개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그만 객쩍은 소리를 늘어놓고 말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워낙 난독을 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슨 교훈을 얻을 만한 책을 소개하기가 한편으론 쑥스럽기도 해서 책을 편력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무슨 영웅전 같은 책을 들먹일 생각은 아예 없었다. 내가 읽었던 모든 문학작품과 철학․사상서들이 똑같이 내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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