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20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나는 새로운 밀레니엄에 큰 두려움을 가졌었다. 오죽하면, 그 즈음에 쓴 한 에세이에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인공 문명에 내 삶의 끝자락만 걸쳐 있다는 데 다행감을 느낀다”고 고백했을까. 내가 『새로운 글쓰기와 문학의 진정성』(1997년)에 연작으로 쓴 문학 이야기들은 새로운 문명 체계에 젖어들면서 글쓰기와 문학 그리고 작가의 위상이 틀림없이 변해갈 것이고 그것도 변두리로, 하위 문화로 밀려나고 말 것이라는 의혹을 드러낸 것이었다. 인류가 새로운 문명 체계의 시대를 맞고 있다며 환호하던 내가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을 읽고서는 그 새로운 자동화 기술 때문에 뒤로 밀려나고 직장을 잃는 불행한 노동자 사회의 실상을 깨닫고 21세기에 들어 더욱 왕성해질 첨단 과학 기술의 세계에 노골적인 회의를 느끼고 있는 참이었다. 그 첨단 과학 기술은, 케빈 켈러의 훌륭한 문명 비평서 『기술의 충격』(이한음 옮김, 민음사, 2011)의 정리에 따르면 ‘GRIN(Geno-, Robo-, Info-, Nano)’로 대표되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실생활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될 생명과학과 정보과학에 가장 큰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생명과학은 인간이 생명을 만들고 혹은 조작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제2의 창조주가 되는 것이었고 정보과학은 천부의 인간 능력을 넘어 인공 지능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호모 사피엔스를 지배할 새로운 지성의 탄생이 예상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세기에는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켜 ‘인공 낙원’의 면모를 띠며 오늘의 세계를 압도할 것으로 여겼고 그때 닥칠 혼란과 인식의 변혁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지레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시간은 흘러 전 지구적 기대와 환호에 찬 행사 속에서 세계는 21세기의 새 날들을 맞았다. 2000년 정월의 첫 아침, 다행히도 세상은 밤새 바뀌지 않아, 어제와 같은 태양이 다름없이 다시 떠올랐고 내 일상의 생활 방식도 하루 만에 변할 리 없어 새로운 천년대의 시간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서기 2000년대의 첫 몇 해를 보내면서, 글을 쓰고 봉투에 넣어 우체국으로 가던 것에서 이메일로 편지와 원고를 보내고 받는 일이 더욱 잦고 편안해져 이 전송 시스템에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고 10여 년 전 「핸드폰, 노트북을 살까 말까」(1998) 고민하던 중 아들의 선물로 받은 휴대전화는 이제 외출만이 아니라 집안에서도 손 가까이 두어야 할 필수품이 되었으며 이 원고도 외국 여행중의 편의를 위해 2000년에 구입한 노트북으로 작성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두려워해오던 새로운 시대에 잘 적응하고 있었던 것이며 “뭐, 21세기란 것도 별것 아니군” 하며 조금씩 안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년의 몇 가지 새로운 기기들과 그 용도들이 그런 내 편안함을 다시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스마트폰이며 아이패드, 3D영화,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SNS 같은 용어들로 한꺼번에 닥쳐온 뉴미디어들이 그것이었다. 뉴스로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매뉴얼을 읽으면 더 알 수 없는 것들이 소개되고 내가 사용할 줄도 모르는 갖가지 소통의 방법과 수단들이 물밀 듯 닥쳐오는데, 나로서는 굳이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보수 꼴통’의 내 무식을 흔들고 있는 것이고, 그것들이 선거며 여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듣고 실감하면서도 정작 옆에서 무력하게 구경만 하고 있는 내 초라한 몰골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고서, 내가 아날로그 세대이니까 하고 포기할 수도 없는 불편을 구체적으로 당하게 되었다. 구글이나 위키피디아에서 내게 필요한 논문의 제목을 찾는 데 성공했지만 그 중 ‘e-북’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냥은 볼 수 없이 구입해야 하고 거기에 또 무슨 필요한 프로토콜을 밟아야 하는가 본데, 그 단계에서 무지와 소심 때문에 무력해지고 말아버린 것이다. 무얼 준비하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묻거나 알아보면 불가능할 것도 아니겠지만, 그걸 위해 설명을 구하고 구입 또는 사용의 방법을 배우는 절차에 수고를 들이는 일이 멋쩍고 과람하게 여겨진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책의 진화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종이책의 장점들이 더욱 간곡해졌다. ‘진화’란 생물학적인 용어는 외계 상황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생물체가 따라 변모해가는 것인데, 지질과 장정의 개선, 활판에서 컴퓨터 인쇄와 같은, 종이책의 형태를 유지하는 가운데에서의 변화는 ‘발전’이겠지만 글자를 쓰는 게 아니라 치고, 종잇장을 넘기는 게 아니라 클릭으로 화면을 바꾸는 ‘비종이책’에 대해서야말로 ‘진화’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진화된 책’에 비해 ‘구시대의 책’이 지닌 장점을 새삼 짚어보았다. 우선 그건 아무 데서나, 어떤 자세로나 읽기 편한 것이었고, 책장에 으레 끼적거리는 댓글 쓰기나 밑줄 긋기의 재미도 좋았고, 무엇보다 종이책 특유의 물질성과 양감을 뿌듯하게 안아보는 것이어서 희귀본, 수택본, 예술서의 값진 책들이 지닌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종이책의 이런 덕성은 일찍부터 인식되어 베이컨은 화약, 나침반과 함께 책을 “세상을 바꾼 실용 기술 세 가지의 하나”로 꼽았고 나 자신도 지난 1천년 동안 이루어진 위대한 성과로서 종교 개혁, 산업 혁명, 민주화와 근대화 등 인류사적 변혁을 추동한 가장 강력한 기여로서 인쇄술의 발명을 짚어왔다. 그런데 그 책이 그 거대한 장점과 6세기에 걸친, 인쇄물이 아닌 벽돌이나 양피지의 수고본까지 포함하면 수십 세기에 걸친, 문화적 시간들의 축적에서 비켜나고 물질적 카테고리를 벗어나, 양감이 없는 사이버의 공간으로 옮겨가다니! 그것은 내 개인적인 불편함과 불만을 넘어 ‘GRIN’의 신세계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발전될 만한 것이었다.

이런 내 불만을 의식하는 중에 문득, 어느 역사 속에서도 새로운 문명과 기술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는 글을 본 일이 생각났다. 기차의 발명으로 실직하게 된 마차꾼 노동자들의 이른바 러다이트 운동 비슷하게, 바로 구텐베르크가 새로운 활판 인쇄 기술을 개발하자 이에 대한 비난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는 대목이었다. 찾아보니 아리에스와 뒤비가 편찬한 방대한 전 5권의 『사생활의 역사』(새물결, 2002) 중 로제 샤르티에가 편한 제3권 『르네상스』(이영림 옮김)의 「글의 관행」에서였다. 인쇄술의 개발로 인간의 문자 생활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는 새삼 돌이켜보지 않아도 되겠거니와 표준어와 표기법의 제정, 작가의 문체 정립과 저작권 인식 등 근대의 글쓰기 관행도 거기에서 얻은 성과였다. 그런데 이 거대한 문화 변혁의 기폭제도 당시에는 상당한 반발을 샀다는 것이다. 필자 샤르티에에 의하면 경제적인 이윤 추구 때문에 오류투성이 인쇄물이 늘어나고 텍스트들을 손상하고 마는 무책임한 상업화의 폐해, 교회 당국의 통제를 벗어나 부도덕하고 이단적인 내용을 전파하며 인간 정신을 타락시키는 신성 모독, 무지한 자들에게 문자를 마구 노출하여 지식 그 자체를 싸구려로 만드는 대중화와 지식의 오남용 등이 그 비난의 이유들이었다. 그래서 “펜이 숫처녀라면 인쇄기는 매춘부”란 야유도 생겼는데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구세희, 김정희 옮김, 21세기북스, 2011)도 인쇄기를 당대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사악한 기관’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실업자 신세가 되는 필사자들도 인쇄 러다이트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발명들도 그 당초에는 불만자, 반대자들과 싸워야 했다. 오늘날 우리가 문자의 기계화 시대 속에서 더욱 감사하게 되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도 최만리에 의해 비판받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최만리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은 1)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난다 2) 다른 오랑캐들처럼 문화가 퇴보한다 3) 쉬운 언문에 빠져 배움에 게을러진다 4)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이 생기는 것은 한문을 국문자로 쓰는 중국에서도 그래왔다 5) 그 실용에 긴 준비 없이 급하게 서두르고 있다 6) 교육의 육예(六藝: 禮樂射御書文)를 버린다는 등,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에 대한 반발 내용에 못지않게 신랄했다. 최만리의 상소와 그에 대한 세종대왕의 대답을 나는 최근 일본인의 한글 연구가로 ‘문자라는 기적’을 부제로 하여 한글을 경이로운 문화적 발명품으로 평가하고 있는 노마 히데키(野間秀樹)의 『한글의 탄생』(김진아 외 옮김, 돌베개, 2011)에서 읽었는데, 세종대왕의 답변도 당당하고 논리적이거니와 최만리의 비판도 당대적 의식으로 보아 부당하다거나 편협하다고 나쁘게만 볼 수 없는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인쇄술을 비롯한 새로운 발명품들이 초래한 엄청난 성과를 당연하게 평가하면서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자책’에 대해 내가 부정적인 의견을 갖는 것은 모순인 정도를 넘어 지적 태만 혹은 위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그래서 들었다. 따져보니 전자책의 장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 짐작으로도, 요즘 지하철에서 태블릿으로 독서하는 광경을 보아 언제 어디서나 읽을 수 있다는 종이책의 장점이 오히려 더욱 크고 넓게 활용될 수 있을 것 같고, 더구나 글자의 크기나 모양도 바꿀 수 있다는 점은 종이책의 고정된 형태가 갖는 약점을 근본적으로 벗겨낸 것이다. 여기에, 밑줄 긋기와 댓글 달기도 가능해질 것이고 무엇보다 보관, 관리가 편하다는 것, 아주 중요한 이유가 될, 값이 싸다는 것, 탈물질화됨으로써 리프킨이 말하는 소유가 아닌 접속의 생활 시스템에 잘 적응될 수 있다는 것, 저술과 출판에 기존 출판사의 까다로운 문턱을 제거함으로써 문화적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 등 편리와 강점에 미덕까지 더욱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점들을 납득한다 해서 전자책에 대한 내 불만이 아주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 불만을 더 부추겨주는 것이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최지향 옮김, 청림출판사, 2011), 에코와 카리에르의 대담집 『책의 우주』(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1), 로버트 단톤의 『책의 미래』(성동규 옮김, 교보문고, 2011) 같은 책들이 제시하고 있는 종이책의 덕성들이다(이 책들이 모두 2011년에 번역 간행되었다는 사실은 책의 진화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나뿐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전자책에 대한 불만을 품은 이 책의 저자들과 나 자신의 생각을 섞어 정리해보면 그 불만이 단순한 정서적 문제만이 아니라 상당한 논리적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에 이른다. 구글과 위키피디아 등 각종 검색 사이트들이 제공하는 정보들은 95% 이상이 남발과 오용으로 가득찬 ‘쓰레기’라는 것, 저작권, 창작, 하이퍼텍스트들이 새로운 개념들로 개정되어야 하거나 혹은 그러지 못해 저술계의 상황을 혼란시키고 있다는 것, 출판이 쉬워지기 때문에 책이 저질품으로 되기 십상이라는 것, 따라서 출판의 상업주의화, 작가의 주변화와 익명화가 확대된다는 것, 책의 물질성이 휘발됨으로써 아우라를 상실하고 만다는 것, ‘스타카토’ 식의 독서와 ‘F자 형의 읽기’(책을 겅중겅중, 혹은 행문을 뛰어넘어, 대충 읽기) 때문에 책과 더불어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 필요한 정보나 지식만 단발적으로 얻어내고 끝낸다는 것, 모니터만 들여다봄으로써 인간을 자폐적이고 소외적인 관계와 행태로 위축시킨다는 것 등등이 그 불만들이다. 그래서 니콜라스 카는 “우리의 자연스런 능력 중 가장 사적이고 인간적인 것들, 즉 이성, 인식, 기억, 감정 등은 마비된다”고 비관하면서 “유장한 인간의 역사를 다룬 『전쟁과 평화』 같은 책을 읽어낼 수 있을까”라고 탄식하면서 ‘팬케이크 인간형’의 출현을 걱정하고, 움베르토 에코는 자기 전공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글을 다시 쓰기 위해 검색해본 결과 2천여 건의 논문이 올라와 그 방대한 숫자에 질려버려 학위를 준비할 때 마련한 노트와 카드를 찾아야 했다고 전자화가 빚어낸 자료의 양적 방대함과 질적 무분별력을 힐난한 바 있었는데, 샤르티에와의 이번 대담에서는 전자책을 통해 잡다한 정보를 알려주는 ‘지식(savoir)’은 쉽사리 얻어내지만 삶의 체험과 지혜로 변화시킬 수 있는 참된 ‘앎(conaissance)’은 멀어지고 말게 되었다고 근본적 약점을 지적한다. 역사학자 로버트 단톤은 하버드대학에 입학하자 도서관에서 허먼 멜빌이 읽으며 댓글을 단 에머슨의 수필집을 찾아보고 그 두 위대한 문학인을 한 자리에서 만난 감격을 토로하면서 1968년부터 1984년 사이에 “미국 의회도서관이 도서의 전자화를 수행한다며 9,300만 페이지를 촬영하느라고 1,000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자산을 내버렸다”고 비난한다.

내 정서는 전자책에 대한 회의와 종이책에 대한 애정으로 기울어져 있지만, 그러나 내 이성은 디지털과 사이버로 변모해가는 인류 문화 전반의 거센 움직임을 거부할 수 없다는 체념적 비관의 결론으로 향한다.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여주는 것은 아니며 인간은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타협과 적응의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6세기의 성직자들은 구텐베르크의 소행이 매우 못마땅했겠지만 그의 인쇄술은 결국 현대 세계로의 발전적 동력이 되었고, 최만리의 상소가 당시의 인식으로는 가장 지적 비판이겠지만 오늘날 한글이 없었다면 문자생활은 고사하고라도 우리의 컴퓨터 사용은 또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은 것이다. 문명의 대세는 아무리 그럴 듯한 저항이라도 역사의 흐름 속으로 묻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내 양보심 많은 생각은, 그렇다면 종이책과 전자책의 공존을 도모할 수는 없을까 하는 쪽으로 기운다. 구식의 도구가 새로운 발명품으로 위축되었다가 되살아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이 환기된 것이다. 예컨대 교통용으로 개발된 자전거는 자동차의 보급으로 사라지는 듯했지만, 오래잖아 다시 살아나 도심지의 차도 옆에 자전거 전용로를 만들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다만 이때의 자전거는 교통용이기보다 운동용으로 그 주목적이 바뀌고 있다. 중요한 정보원이었던 라디오가 이제는 TV 앞에서 음악청취용으로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는 것, 활쏘기가 전투용에서 궁도의 스포츠로 바뀐 것도 그렇다. 그렇다면, 빠른 정보 획득을 위해서는 구글이며 위키피디아 혹은 ‘비종이책’을 이용하고 구시대의 종이묶음책은 사유와 명상에 젖으며 삶과 역사를 반추하고 꿈과 미래를 그리는 정서의 샘으로 유지된다면 그 두 가지 상극적인 것이 상보적인 관계로, 가령 이어령이 말하는 『디지로그』(생각의나무, 2006)에서 피력하는 “디지털+아날로그”의 관계로 화해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다른 방식으로이지만, 독일의 잡지 편집자인 크리스토흐 코흐는 작심하고 모든 전자 기기로부터 벗어나 『아날로그로 살아보기』(김정민 옮김, 율리시즈, 2011)를 시험해본 전말을 보고한다. 처음부터 한 달 동안의 시한부였지만, 친구들 전화번호를 잊어버려 생긴 오해(소크라테스는 문자의 발명이 인간의 기억력을 감퇴시켰다고 불평했다. 휴대전화 때문에 나는 우리집 전화 번호만 겨우 기억한다)부터 시작하는 갖가지 불편을 겪게 되지만 결국 예정을 넘어 40일간 ‘디지털 안식일’을 즐기는 데 성공한다. 그는 전자 기기로부터 자유로워진 시간 동안 “고독과 소유, 사유와 흡수”를 가진 데 만족해하며 다시 디지털 문명 속으로 돌아가지만, 그러면서도 『웰든』을 읽던 “예전의 좋은 시절을 재발견”한 일을 즐거워하게 된다.
그렇다면 ‘책의 미래’에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먼저는 대세에 따라 종이책이 전자책에 투항하고 그 제작과 보급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지금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것들은 ‘명품진품’이 되거나 자식들도 보관하지 않을 쓰레기가 될 것이고 도서관은 전자화할 것이며 책방은 없어지고 리프킨이 말하는 ‘사이버 접속’을 통해 지성과 감성이 전자 미디어와 연결되는 양상으로 바뀔 것이다. 그 다음은 종이책과 전자책이 공존하면서 정보, 지식, 교육을 위해서는 디지털 IT로 접속하고 혹은 ‘e-북’ 같은 ‘비종이책’으로 읽으면서 사유와 정서를 위해서는 전통의 종이책으로 독서(검색이 아닌)를 하는 방법인데 이럴 경우 전래의 문학과 인문학은 아무래도 변두리 장르로 밀려나고 내려앉을 것이지만 여전히 그 의미는 유효할 것이다. 이 둘 사이에 크리스토흐 코흐처럼 ‘디지털 안식일’을 즐기는 방법도 있겠고 종이책을 여전히 소장한 전통 도서관을 박물관처럼 운영하는 방안도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책의 앞날을 엉성하게 생각하면서도, 결국에는 도서의 전자화 추세에 인류 문화가 승복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을 버리지 못한다. 불과 한 세기여 전만 해도 우리의 선비들은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야만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비탄했지만 그로부터 한 세대가 못 되어 그 ‘금수의 것’들을 적극 받아들이고 많은 인재들이 일본 등 외국으로 유학하여 개화를 주도했으며 그로부터 또 한 세대가 지나서는 전통의 문화로서의 한문은 퇴색하고 또 한 세대가 지난 이제는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는 데도 힘들어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역사는 이렇게 쉽게 길을 바꾸고 문화는 예상보다 재빠르고 자유롭게 새로움에 적응한다. 그것이 세대의 교체이고 문화의 진화일 것이다. 우리는 멀지 않아 공원의 벤치에서 시집 읽기보다 모니터 앞에서 갖가지 콘텐츠를 즐기는 일(아니, 벌써 지하철 안의 풍경에서 보고 있다)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거기서 ‘디지털 휴머니즘’(노소영, 「네트워크가 ‘욕망 발전소’… 끝없이 잡종, 변종 욕구 생산」, 《중앙SUNDAY》, 2011. 10. 23)을 키우는 세대를 만나리라고 예상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것이다. 여기서 실감되는 것이 『아날로그로 살아보기』의 코흐가 인용한 더글러스 애덤스의 말이다. “첫째,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존재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일상적이다. 둘째, 출생에서부터 30세 이전에 발명된 것은 놀랍도록 흥분되고 창의적이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다. 셋째, 30세 이후에 발명된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의 종말을 뜻한다. 그것이 약 10년 이상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과 천천히 친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열린 눈이 말하는 사유는 3/4세기를 살아오며 가쁘게 변하는 시간과 문화 체험을 하면서 그것들을 어떻게 보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고심해야 했던 내게만이 아니라 여러 문화 패러다임을 경험한 나이든 세대와 집단이라면 모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의 부닥침과 그것에의 적응을 위한 착잡한 소감일 것이다.

* 이 글은 2011년 10월 4일 열린 <파주북소리>의 강연에서 같은 제목으로 발표한 메모에 기초하여 글로 옮긴 것이다. 이를 허용해준 파주북소리 추진위에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