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의 작가 페터 슈나이더와의 만남

페터 슈나이더(Peter Schneider)_독일 소설가. 1940년생
소설 『렌츠(Lenz)』『장벽을 뛰어넘는 사람(Der Mauerspringer)』『짝짓기(Paarungen)』『에두아르트의 귀향(Eduards Heimkehr)』 등

1월 26일, 베를린에 도착한 제10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들에게는 특별한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에두아르트의 귀향』 등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독일 작가 페터 슈나이더는 머나먼 이국에서 온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한반도 정세에 관한 국제적 관심이 높아진 요즘, 분단과 통일의 기억을 어떻게 문학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지 수상자들의 견문을 넓혀주고자 마련된 이번 만남은 김연신 번역가의 도움으로 성사되었으며 노선정 번역가의 통역으로 한 시간 반 남짓 진행되었다.

현재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며 최근에는 ‘열린 베를린’에 대한 신작을 집필 중인 페터 슈나이더는 막 문단에 얼굴을 내민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들에게 “끊임없이 쓰라, 쓰고 또 쓰라” 는 진심어린 격려와 함께 “여러분의 혁명을 바란다”는 인사를 건넸다.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이하 수상자) 한국에 소개된 선생님의 작품들은 주로 분단을 다루고 있습니다. 분단의 기억이 작가의 작품 활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페터 슈나이더(이하 슈나이더) 예전에는 동서독을 오가기 위해서는 세 개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검문소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그 길로 가는 것이 괴로워 먼 길을 돌아가곤 합니다. 저에겐 그렇게 강한 영향력을 가진 기억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분단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사람은 없나요? 분단의 현실이 현재의 한국 문단에서는 어떤 의미인지 독일보다 오랜 시간 동안 더 엄격한 체제 속의 분단을 겪고 있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수 상 자 ㅣ 젊은 세대의 경우에는 분단에 대해서 직접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아 중점적으로 다룬 작품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직접적 경험을 가진 작가들에게서는 역시 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작품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 을 보면 독일에서 분단에 대한 기억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잊기 위한 것이라는 구절이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는 치유되거나 잊어야 할 상처의 기억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뛰어넘어야 할 장벽조차도 없는 느낌입니다. 이런 세대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슈나이더 ㅣ 문제의 본질은 분단이 아닙니다. 문제는 공산주의 진영이 갖고 있는 억압입니다. 같은 민족의 사람들이 그러한 억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해야 합니다. 억압을 받고 있는 이들이 투쟁하고 벗어나고자 할 때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그것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분단의 기억은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작용할 것입니다. ‘머릿속의 장벽’이라는 개념을 제가 처음 썼을 때, 저는 장벽은 사실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장벽을 무너뜨리기까지가 실재하는 장벽을 부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독일에서도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머릿속의 장벽을 없애는 일을 계속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없애는 것은 오랜 노력이 필요합니다.

수 상 자 ㅣ 격동의 역사를 겪어오셨는데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 회의가 들었다거나 괴로웠던 기억은 없었나요.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슈나이더 ㅣ 처음 머릿속의 장벽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제 페터 슈나이더는 변절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선택을 한 적이 없습니다.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장벽, 창밖으로 보이는 그 시멘트벽을 봐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장벽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수 상 자 ㅣ 오랫동안 글을 써오셨는데 긴 시간 동안 집필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이제 출발선에 선 저희에게 앞서 간 사람으로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슈나이더 ㅣ 유명해지고 싶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고 하면 솔직하지 못한 거겠죠(좌중 웃음). 그리고 언제나 마음속에 정열이 있었어요. 문학 작품을 접하고 받았던 감동들, 그 감동이 마음속에 남아 직접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써보고 싶다는 열정이 되었습니다. 감동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에 빠져들 수 있어야겠죠. 그리고 끊임없이 쓰고, 또 써야 합니다.

수 상 자 ㅣ 작품 활동을 하시기 전에는 정치적인 글을 많이 쓰셨는데, 문학적인 글을 쓰실 때 정치적인 글을 쓰셨던 경험이 오히려 장애가 되지는 않으셨나요. 특별히 신경을 쓰시는 부분이 있을 듯 합니다.

슈나이더 ㅣ 정치적인 글과 문학적인 글을 완전히 분리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신문 기사를 쓸 때에는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글을 씁니다. 하지만 소설은 독자들을 설득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로지 어떠한 모순을 보여주기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알려주는 것이 소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랜 시간 실재하는 장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장벽이 생기고 만다는 사실, 다만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문학일 것입니다. 이미 해법을 다 알고 있는 문제라면 굳이 글을 쓰지 않겠지요.

수 상 자 ㅣ 최근에는 통일 이후 즉 ‘열린 베를린’에 대해 쓰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슈나이더 ㅣ 냉전과 분단, 통일을 겪으며 끊임없이 변화해온 베를린은 이제 새로운 시기에 접어듭니다. 모두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베를린.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베를린 중에서도 서베를린은 동독의 안에 갇혀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막히고 단절된 공간이었습니다. 물론 동독 사람들도 서쪽으로는 이동할 수 없었죠. 그렇게 분단 상황 속에서 폐쇄된 도시였던 베를린에서 통일이 된 현재의 개방된 베를린으로의 변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페터 슈나이더 작가, 노선정 번역가(앞줄 오른쪽)와 함께한 수상자들

수 상 자 ㅣ 그 이후에는 어떤 활동 계획이 있으신가요.

슈나이더 ㅣ 3월에는 전쟁 직후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 나옵니다. 역사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남기신 기록들과 함께 하는 당시의 시대에 대한 책입니다. 전쟁 직후의 가족을 이끌어 나간 것은 어머니들의 힘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어머니께서 남기신 친필 원고들을 복원하는 작업에 힘쓰고 있습니다.
페터 슈나이더는 베를린 68학생운동의 대표자 중 하나로 연설문과 팸플릿을 통해 68세대의 의식과 세계관을 명징하게 드러냈다. 현실 참여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던 그는 1970년대 이후로는 집필 활동에 전념한다. 1973년 데뷔작 『렌츠』를 발표하며 그는 문학의 정치적 선동 기능을 강조하던 기존의 입장을 포기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강조하는 새로운 문학관을 정립한다.

시대와 함께 소통하고 끊임없이 현실에 대해 사유했던 그의 이력 속 행보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에도 역시 이와 같은 시대와 현실, 사회에 대한 물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들은 페터 슈나이더와의 대담을 통해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사회와 소통하는 작가의 삶에 대해 고민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