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황석영의 방북(1989. 3. 20.)은 이 코너에서 이미 다루어진 바 있다(2001년 상반기호). 여기서 하려는 이야기는 황석영의 출옥과 그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다. 방북 이후 귀국하지 않고 독일과 미국에 머물던 황석영이 귀국한 것은 1993년 4월 23일이었다. 당시는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직후였고, 정부와 여당에는 황석영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동지’들이 여럿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4년이 넘도록 북한과 해외를 떠돌며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 오던 작가로서는 귀국하기에 적절한 시점이라고 판단했을 법하다. 최소한의 조사와 ‘형식적’ 처벌을 거치면 사안이 일단락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음직하다. 그러나 막상 귀국하고 보니 사태는 기대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전개되었다. 작가는 호된 조사를 받았고, 재판에서는 무려 7년의 징역형이 내려졌다. 그렇지만 선고와 수감 이후에도 한동안은 희망의 끈을 이어 갔다. 길어야 절반 정도의 형기를 채우면 석방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러나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작가는 무려 5년 가까운 옥살이를 마친 뒤인 1998년 3월 13일에야, 3·1절 특사의 형식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이날 오후 2시 공주교도소 정문 앞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지금의 한국작가회의) 회원 등 문인 40여 명과 가족·친지 등이 모여 그의 출옥을 기다렸다. 회색 싱글에 자줏빛 넥타이 차림의 그는 옥문을 나선 뒤 기다리고 있던 아들 호준씨와 딸 여정씨를 끌어안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은 시인과 이시영 시인은 그의 입 안 가득 두부를 넣어 주었다. 문인들은 그를 하늘 높이 헹가레치며 석방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는 함께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을 향해 “양심수 200여 명의 절반도 안 되는 70명만 이번에 석방되었을 뿐”이라며 남은 양심수들의 빠른 석방을 촉구했다.
장인인 조각가 김영중씨의 승용차에 실려 서울로 올라가는 그를 나는 경부고속도로 죽전휴게소에서 따로 만나 단독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앞으로 적어도 5년 동안은 작품을 쓰는 데 전념하겠다”는 말로, 거의 작품을 쓰지 못하고 보낸 지난 9년여의 세월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북한을 방문한 뒤 아직 베를린에 머물던 무렵 그는 《한겨레신문》에 ‘흐르지 않는 강’이라는 소설을 연재하다가 중단한 바 있다). 그는 5년 가까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몇 개의 작품을 구상하고 대학 노트 10권 분량의 메모도 해 두었노라고 밝혔다. 그 가운데 “일종의 ‘후일담 소설’” “현재 문단에서 통용되는 부정적인 어감이 아니라 제대로 된, ‘후일담 소설의 결정판’을 목표로 한다”는 『오래된 정원』과 “20세기 들어 한반도에 들어온 서양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룰” 『손님』은 각각 2000년과 2001년에 책으로 나왔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90년대 문학은 거품뿐인 ‘사이비문학’이었다”면서 “한국 문학은 다시금 시대의 아픔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그는 “동아시아적 형식에 현실주의적 내용을 담는 새로운 형태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겠노라고 밝혔다. 작가는 나중에 이 방법론을 흔히 쓰는 ‘동도서기’ 대신 ‘서도동기’(西道東器)라는 말로 개념화하는데, 말하자면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는 주제를 한국과 동아시아의 전통적 예술 형식에 담는 방법론이다. ‘동도서기’가 근대에 적합한 방법론이었다면, ‘서도동기’는 후기근대 또는 탈근대에 어울리는 방법론이라 할 수도 있겠다.
『오래된 정원』이 자전적 테마를 에세이적 형식에 담은 작품이었다면, 서도동기의 방법론을 가장 그럴듯하게 구사한 작품이 바로 『손님』이었다. 황해도 신천의 양민학살사건을 소재로 삼은 이 소설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인류의 양대 이데올로기가 각축하는 양상을 황해도 지노귀굿이라는 우리 민족 고유의 연희 양식에 담은 작품. 이 소설이 독일 등 해외로 번역 소개되어 호평을 받은 데에는 한국의 굿이라는 형식적 새로움이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손님』에 대한 국내외의 호평에 고무된 작가는 서도동기의 방법론을 적용한 작품을 잇따라 내놓는다. 『심청』(2003, 2007년에 『심청, 연꽃의 길』로 개작 출간)과 『바리데기』(2007)가 그것들이다. 『심청』은 판소리계 전통 서사인 효녀 심청 이야기를 재해석해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을 돌아본 작품이고, 『바리데기』는 바리공주 이야기라는 전래 설화를 2000년대로 가져와 북한의 기근과 탈북 사태, 전 세계적 노동 이주, 테러 등 당대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다루어 본 소설이다. 『심청』과 『바리데기』에 대한 평은 『손님』에 비해서는 인색한 편이었다. 『심청』에서는 일차 자료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과도한 성적 묘사가 결함으로 꼽혔고, 『바리데기』에서는 작가의 거창한 포부와 목적의식이 서사를 인위적으로 끌어 갔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무게 있는 작품들을 통해 황석영은 21세기 한국 문학의 핵심으로 다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고은 시인과 함께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서도동기’ 삼부작이라 할 『손님』과 『심청』『바리데기』 말고도 그는 『모랫말 아이들』(2001) 『개밥바라기별』(2007) 『강남몽』(2010) 등을 숨가쁘게 내놓았다. 신문에는 자전 에세이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랫말 아이들』과 『개밥바라기별』은 각각 유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다룬 자전적 소품이어서 ‘작가 황석영’이라는 이름이 지니는 무게감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을 들었다. 『강남몽』은 치명적이었다. 작가는 몇 년 전부터 강남 개발 이야기를 통해 한국 자본주의 형성사를 다룬 작품을 쓰겠노라는 포부를 밝혔고 그 계획이 『강남몽』으로 실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 가까운 역사를 두껍지 않은 단행본 한 권에 압축해 넣으려다 보니 자료의 소설적 육화가 제대로 되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 일종의 소화불량이었달까. 게다가 소설 속에서 조직폭력배를 묘사한 대목이 기존 잡지와 단행본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작가를 코너로 몰아넣었다. 결국 작가는 참조한 자료들을 밝히지 않은 것이 ‘실수’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지만, 이 사태를 통해 그가 입은 상처는 매우 커 보였다.
게다가 『강남몽』 표절 시비가 있기 전인 2009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수행해서 중앙아시아를 방문한 길에 기자에게 한 발언들이 문제가 되어 작가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겼다. 이명박 정권을 ‘중도 실용’이라 규정하고, 광주학살을 ‘사태’로, 용산 철거민 참사를 ‘실책’으로 표현한 일은 참여적이며 진보적인 작가로서 그를 믿고 지지했던 독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가 속한 한국작가회의 후배 문인들은 ‘최근 황석영의 언행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입장’이라는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그를 호되게 비판했고, 그는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라는 장문의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 해명을 시도했다. 비록 그의 언행이 경색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고자 하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는 해도 그의 선의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후배 문인들과 독자들의 실망이 너무 컸다. 게다가 그의 문제의 발언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의 꽉 막힌 대북 정책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립서비스’가 헛된 것이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중앙아시아 발언과 『강남몽』 파문으로 연이어 타격을 입은 황석영은 2011년 전작 장편 『낯익은 세상』을 내놓으며 ‘재기’를 노렸다. 출판사는 이례적으로 신문사 문학 담당 기자들을 중국 리장으로 초대해 기자간담회를 여는 등 작가의 노력을 도왔다. 이 소설은 자전적 소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서도동기의 방법론을 적용한 작품도 아니었다. 그러나 소년 주인공 딱부리를 등장시킨 데에서는 『모랫말 아이들』의 분위기가 풍겼고, 주인공과 친구들이 죽은 이의 혼령과 대화를 나누는 데에서는 『바리데기』의 환상적 장치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 외곽의 거대한 쓰레기장을 무대로 삼아 소비 자본주의의 본질을 캐묻겠노라는 작가의 거창한 의도가 충분히 산 것 같지는 않았다. 『손님』과 『바리데기』에서 보여주었던 거장의 면모를 기억하는 독자들에게는 성이 차지 않는 노릇이었다. 황석영의 ‘두 번째 귀환’은 다음 작품을 기약해야 할 터였다. 그가 올 3월부터 연재하는 ‘이야기꾼’(가제)이 그 답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