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등단은 70년대 말 암울했던 유신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나는 떠돌이 생활을 이어가며 어렵게 대학원 과정에 몸담고 있었다. 입주 또는 그룹 과외나 영세학원 강사생활을 전전했던 대학생활의 고단한 연장이었다. 다시 받은 신검에서 고도근시로 병역면제 처분을 받자, 미처 석사과정을 수료하기도 전에 취업을 단행한다. 그만큼 생활이라는 압박과 궁지에 몰린 셈이었다. 근무하던 회사에서 소문처럼 ‘광주’ 소식을 들었고, 몇 편의 신변토로 같은 시편들을 발표했고, 자주 지각출근이 있었으며, ‘콜라 한 잔’의 가난한 데이트가 있었고, 어설픈 결혼식과 변두리 단칸방 연탄가스 냄새의 신혼시절이 있었다. 나의 80년대는 그렇게 ‘상투적’이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학교로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본격적인 글쓰기를 하겠다는 각오 만만하였지만, 웬걸, 내 딜레탕트 생활은 오히려 전보다 더 강화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87년 여름에 결정적으로 병이 들고, 육체적 고통과 현존의 한계와 절망이라는 심연을 거치게 되면서, 비로소 나는 문학적으로 거듭나게 된다. 90년의 재등단작 ‘놀라운 죽음, 침엽수림에서’는 일종의 오도송처럼 씌어졌다. 재등단 무렵의 산문 두 토막.
내 대신 80년대를 치열하게 채워 주었던 기형도의 죽음도, 또 그의 죽음에 놀라던 평론가 김현선생의 갑작스런 죽음도, 비어버린 나의 80년대로선 그저 아득한 애석함이었다. 시는 먼 이웃나라의 이야기였고, 간간이 그림엽서처럼 가볍게 나를 방문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딜레탕트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젠 '내 차례'가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지워진 80년대를 향해 때늦은, 우울한 산책을 나서기에 이른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것은 울울한 침엽수림이었다. 그곳은 아름다웠다. 무섭도록! 거기서 내 상투적인 인식과 교양적인 삶은 여지없이 살해된다. 한없는 부끄러움을 딛고, 나는 다시 시인이 되었다. 어떤 예감에 무섭게 휩싸이면서…… 희망과 낙관, 건강이 육체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듯, 질병의 고통과 절망은 분명 영혼을 일깨워주는 부분이 있다. 질병의 고통으로 쇠잔해진 육체들의 퀭하니 맑은 시선들에서, 삶의 고뇌와 욕망을 고스란히 통과한 영혼의 평화를 느낄 때가 있다. 여기서 절망은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끝내 따라가야 할 어떤 것으로까지 승화된다.
첫 시집 『침엽수림에서』는 이렇듯 육체적 고통과 현존의 한계, 절망의 심연에 바쳐진 헌사였던 셈이다. 죽음은 그렇듯 느닷없이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처럼 보였지만, 생의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엄연히 현존하는 실체였던 것이다. 그때 내게 들이닥쳤던 일생일대의 인식적/미적 충격은 나를 수렁 같은 절망에 빠뜨렸고, 그 대가인 듯, 고통의 어두운 한 심연에서 세상의 어떤 지극한 아름다움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은총 같은 것이었고 거듭난 것이었지만, 그 치열하면서 행복했던 기간은 그러나 또 그리 길지 않았다.
다시 안개의 군단처럼 진군해 온 일상이라는 미망의 덫은 나를 거듭 혼미하게 했고, 나는 정신없이 일상이 제공하는 안락한(?) 의자에 올라앉아 버린 셈이 되었다. 그리고 한참 뒤, 다시 정신을 추슬러 시를 쓸 수밖에 없는 끈질긴 운명의 끈을 다시 붙잡았을 때, 시는 더 이상 내게 행복한 미적 충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내가 질질 끌고 다니며 먹여 살려야 할 부양가족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 그로부터 몇 년간, 내 일상은 일주일에 사흘씩 어김없이 병원에 바쳐졌고, 나머지 사나흘은 또 어김없이 소읍의 ‘견딤’에 바쳐졌다. 일주일 단위로 반복되는 일상은, 내게 삶이 ‛견디는 것 이라는 명제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탈색되게 했지만, 탈색된 채로, 나는 그 견딤을 통해 역설적으로 오히려 이 삶이 왜 소중한 것이고, 살만한 것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멸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각성은, 삶의 가혹한 한계들을 통해서 오히려 이 실존적인 인식을 담보해 준다는 점에서, 이 삶을 인정하고 껴안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즈음 직장이 있는 대구 근교의 하양읍에서 인근 금호, 진량읍 등으로 자주 점심을 먹으러 다녔다. 그리고 출퇴근길 산업도로에서 하염없이 길 위로 끌고 다닌 상념들…… 그 변두리의 풍경에 몸을 맡기게 되면서, 소읍의 폐허와 쓸쓸한 존재들은 내 병과 한몸을 이루었다. 나는 그 ‘견딤’들에서 위안을 얻은 셈이었다. 나만 견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거기엔 견디고 있었다. 버려진 듯 살아가는 허술한 차림새 사내들의 노동과 흡연에 절은 초췌한 얼굴과 손마디들, 혼자 밥 먹는 외로운 여자의 눈물, 고기 비린내 가득한 정육점 허술한 목로와 주인 사내의 무료함, 구석진 골목 안 식당의 쓸쓸한 흙바닥, 없는 듯 허술한 담뱃가게 아주머니의 심술, 낡은 의자와 작은 수족관으로 장식된 다방 마담의 농담…… 그런 익명의 부박한 존재들이 아픈 내겐 유달리 절실하게 다가왔으니, 동병상련! 그 현존의 가장자리에서 위태롭게 견디고 있는 존재들은 모두 내 병든 육체 속으로 흘러들어와 한몸이 되었다. 두 번째 시집 『소읍에 대한 보고』는 그렇게 씌어졌다. 이후, 다시 몇 년간을 밥벌이 업무에 겨자씨만한 열정마저 빼앗기며 시를 쓰지 못하다가, 2003년 안식년을 계기로 또다시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운명과 맞닥뜨린다. 그 덕분에 2007년에 발간된 세 번째 시집 『물방울 무덤』은 무려 12년 만에 발간된 시집이었다. 지나고 보니 순식간인 듯하지만, 그리 짧지 않은 세월인 25년간을 나는 단 하루도 면제 없이 이틀에 하루씩 병원에 누워 투석기계에 몸을 맡기는 시간을 지나왔다. 자연스레 내 시도 병상에 누워 티브이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에 촉수를 대게 되었다. ‘인간극장’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참 무던히도 많은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곤 했다. 『물방울 무덤』 2부의 인물 시편들을 나는 다큐멘터리 시편이라 작명해 부르곤 했다. 그 어떤 지극함이라 해야 할 제 각각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생의 모습들을, 서정이 배제된 몇 문장으로 단면처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예컨대 ‘절대 단면’이란 표현이 가능할진 모르겠습니다만, 내공 높은 고수의 단 일 초식, 즉 단칼에 베어진 대상의 생경한 듯 선명한 단면처럼, 시는 그런 존재의 본질 혹은 비의적 이면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카메라 루시다』의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 소설이 스투디움(Studium)에 가깝다면, 시는 푼크툼(Punctum)에 제 핏줄을 대고 있는 것이라 하겠지요. 같은 맥락의 비유를 제 인물 시편들에 적용시켜보자면, 단 한 편의 시편으로(그것도 서정을 배제한 교술 같은 줄글 몇 연으로) 그 사람/인물의 전모를 가늠케 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생의 굴곡과 곡진한 단층” 혹은 “지극함의 우듬지, 곡진함의 벼랑”에 대한 공감의 서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칼이 가능한가 하는 화두였다는 말씀이지요.
요즘의 내 시적 관심은 인물들뿐만 아니라 나무나 숲, 풀꽃들과 폐가 같은 사물들이거나, 무상(無常)한 시간성에까지 그 대상을 넓혀가고 있다. 몇 년째, 혁신도시 부지를 지나 초례봉 산자락을 맴돌다 돌아오는 산책을 거의 매일 다니면서 생긴 현상이다. 사물들은 인물들과는 달리 단면보다는 이면들에 더 관심이 많이 가는 편이다. 이면이 단면보다 더 간취(看取)하기가 어렵다. 이면은 말 그대로 대상의 배후에 숨어있듯 비의나 상징처럼 존재한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아우라처럼 얼비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은 구도자들이 본질을 꿰뚫고 궁구하듯 들여다보아야만 보이는, “깨달음의 심안(心眼)으로만 보이는 실재의 세계” 같은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저간의 사정이 내 시작을 또 하나의 과도기로 몰아가고 있으며, 나는 또 얼마간 주춤거리고 있는 중이다. 요컨대 평소에는 좀체 드러나지 않던 존재의 이면을 포착해 내어, 단칼에 드러난 단면처럼 익숙하지 않거나 불편하기까지 한 그것들을 또 하나의 실재로 현현(顯現)시키는 것. 이것이 요즘 내 시/문학의 화두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