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은성_극작가, 극단 <달나라동백꽃> 대표. 1977년생
희곡 「시동라사」 「목란언니」 「연변엄마」 「순우삼촌」 등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 때 견딜 만해진다. 이 멋있는 말이 나의 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든다면 견딜 만해진다.’ 극작가 딘센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이야기’였다.
나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짓말을 잘 하는 소년이었다. 나의 거짓말 속에서 해외근로자 아버지는 세계 곳곳을 누비는 오퍼상으로 둔갑했고 가출하신 어머니는 남도 어느 섬의 선생님이 되었으며 한량이셨다던 할아버지는 군수를 역임한 비운의 사업가로 재탄생되었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탁구대가 놓여있으며 안방에는 최신비디오와 게임기가 설치되어 있고 냉동실에는 투게더가 가득한 집에 살고 있던 나의 별명은 ‘뻥꾼’이었다.
나는 전라도 보성에서 태어나 열 살 때부터 그러니까 1986년 겨울부터 서울에서 살았다. 면목동 천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주로 전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골목길에는 무허가 단칸방과 반지하방이 많았는데 때밀이, 공순이, 파출부, 식당종업원, 노가다, 청소부, 리어카좌판, 술집아가씨들이 빽빽하게 모여 살았다. 내가 얹혀살던 스무 평 남짓한 이모 집만 하더라도 안방에는 이모식구 넷, 작은방에는 우리식구 넷, 건넌방에는 술집아가씨 셋, 문간방에는 공장에 다니는 누나 둘이 살았다. 지지리 궁상. 옆방이건 마당이건 골목이건 하룻밤도 조용하게 넘어간 적이 없었다. 치고 박고 싸우는 소리가 일상이었다. 면목천 다리 위 갈기갈기 찢어져 내려앉은 포장마차가 떠오를 때면 아직도 손바닥에 땀이 고인다.
나는 그 시절 나의 거짓말들을 ‘견디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였다고 미화시키고 싶지 않다(이 문장을 써 놓고 한참을 본다. 정말 나는 구제불능의 거짓말쟁이가 아닌가. 스스로를 슬쩍 속이고 넘어가려는 거짓말 패턴의 원숙함에 감탄한다).
나는 그 시절 나의 거짓말들을 ‘견디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였다고 미화시키고 싶다. 그 욕설, 그 신음, 그 울음, 그 절규가 나를 극작가로 키워냈다고 미화시키고 싶다. 그 슬픔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뻥꾼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희곡집 『시동라사』에 실린 희곡들 역시 ‘견디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과 다르지 않다고 고백한다.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부서졌던 그 순간들, 뜨거웠고 차가웠고 열망했고 포기했던 그 순간들을 통과하며 나는 여전히 간신히 살고 있다. 간신히 견디고 있다. 몹시 견디기 힘들 때 나는 또 거짓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희곡을 쓴다.
김은성 희곡집 『시동라사』는 김은성이라는 한 청년이 무슨 이야기를 하며 삶을 견뎌왔는지 기록되어 있는 그의 거짓말 창고다. 요즘 세상에 희곡을 누가 읽느냐? 한국희곡들 수준 낮지 않느냐? 시 쓰다 접은 자들, 소설 쓰다 포기한 자들이 희곡 쓰더라, 하시는 분들 많은 것 알고 있다. 부분 인정한다. 그러나 『시동라사』는 재미있다. 읽을 만하다. 수준 있다. 깜짝 놀라실 수도 있다. 한 번 읽어보시라. 어려서부터 거짓말로 날리던 뻥꾼이 쓴 희곡집이 아닌가.
얼마 전에 배우인 후배가 물었다. 형, 희곡 어떻게 쓰는 거야? 응, 벼랑 끝에 매달려서 긁어내린 손톱자국, 그게 희곡이지. 희곡은 그렇게 나오지. 감동한 후배는 서둘러 노트에 받아 적었다. 어쩌자고 나는 또 거짓말을 했을까?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 때 견딜 만해지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