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다’라고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에게 문학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다가온 가장 찬란한 빛이었다.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던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아름다움을 움켜잡았다. 그것이 소설이었다.
소설은 내게 두 번 찾아왔는데, 첫 방문 때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스스로 놓아버리고 말았다.
열다섯에서 열아홉 사이의 일이었다. 소설 읽기로 밤을 새웠고 짧은 소설들을 써댔다. 처음으로 픽션의 매력에 도취되었다. 그렇게 보낸 날들이 없었다면 일찍 아버지를 여읜 아픔에다 낯선 대도시에서 견뎌야 하는 삶의 신산함, 그리고 영혼과 육체를 장악해버린 사춘기의 고독을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기의 문학 사랑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빈번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었기에 나 역시 그런 징후로만 여기고 넘겼다. 소설은 아주 특별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거라 여기고는 일찌감치 작가되기를 포기했다.
소설은 조금 늦게 다시 찾아왔다. 서른한 살,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지던 절망의 순간에 나는 다시 글을 쓰고 있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실존적 고민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나를 아프게 했다. 시대에 대한 절망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한 때 심장을 흔들어댔던 이상사회의 꿈은 퇴물인양 버려지고, 엄혹한 자본의 논리와 질서가 감옥처럼 삶을 옥죄어오던 시기였다. 나는 가장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그룹에 속해 있었다. 절망을 토해내고 희망을 싹틔우고 싶었다. 가장 미약한 힘을 가진 나는 가장 약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그런 삶에서도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문학작품은 모두 나의 스승이었다. 앞 선 문인들도 대부분 나의 스승이었다. 인연이 각별한 은사와 선후배로부터 모두 빚을 졌다. 나는 가끔 기존 문단에 빚진 바 없는 신예가 출연했다고 떠들어대는 문학 광고를 접할 때면 가볍게 웃는다. 헤럴드 블룸이 지적한 대로 ‘영향의 불안’에 시달리는 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러 훌륭한 스승을 둔 행복한 사람인데, 그중 가장 나를 감동케 하고 오래 기억에 남아 문학의 길잡이가 되어준 스승 중의 한 명이 밀란 쿤데라였다.
소설 쓰기가 힘들거나 창작 열의가 시들할 때, 좀처럼 성에 차지 않는 신간 더미에서 우리 시대 소설의 왜소함을 확인할 때, 문학의 위기를 절감할 때, 그리고 시대의 우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나를 일깨우고 심장을 다시 박동하게 하는 것은 명작들을 다시 읽는 것이다. 명작들은 언제나 잊고 지냈던 실존적 인간을 재발견하게 하고 소설이란 장르의 위대함을 보여줌으로써 새삼 놀라게 한다.
밀란 쿤데라는 작품도 훌륭하지만 그의 소설론이 무척 매력적이다. 『소설의 기술』과 『커튼』에는 왜 소설인가, 우리 시대에 소설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 자신의 오랜 고민과, 진지한 성찰, 성숙한 답이 녹아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설은 근대의 시초부터 줄곧, 그리고 충실히 인간을 따라다니고 있다. 후설이 서구정신의 요체로 간주한 ‘앎에의 열정’이 이제 소설을 사로잡아 소설로 하여금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살피게 하고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세계’를 영원한 빛 아래 보존한다. ‘오직 소설이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라. 그것만이 소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라는 헤르만 브로흐의 말을 나는 이런 뜻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가 거듭 되풀이하는 이 말에 담긴 그의 고집에 공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인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역사를 이루는 것은 ‘발견의 계승’에 참여하는 것이라 보고, 그렇지 못한 작품은 ‘소설의 역사 이후의 소설’로 치부한다. 더 이상 존재의 정복을 추구하지 않고 실존의 어떤 새로운 면모도 찾아내지 않는 소설들은 단지 이미 이야기 되어 있는 것들만을 확인해 주는 것일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매우 진지하고 엄격한 쿤데라의 소설론에 짓눌리기도 한다. 내가 쓴, 혹은 쓰고 있거나 구상 중인 작품들이 소설의 역사 바깥으로 밀려나 벼랑 아래로 추락하는 상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아마 그것은 상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대부분 내 소설의 위치일 것이다. 부끄러움과 절망감이 밀려와 진땀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과 절망감은 다시 나를 곧추세운다. 시들어가는 열정을 흔들어 깨운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창작의 고통을 감내할 기운을 북돋는다. 소설의 첫 문장을 끌어내려고 나는 칠흑 같은 어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선다. 망막함이 엄습해 온다. 어떻게든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고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한 발 내딛는 순간 벼랑 아래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이 최고조에 달할 때, 그러나 앞으로 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절박함이 밀려올 때 그 첫발을 조심스레 뗀다. 소설의 역사의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면서.
큰 스승 앞에서 너무 심하게 부끄럽지 않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번번이 빗나가곤 했다. 하지만 스스로가, 그리고 내 마음의 스승이 흡족해 할 때까지, 발견의 계승을 이어가는 소설을 쓸 때까지는 소설을 붙잡고 놓지 않을 작정이다. 그때까지는 소설이 죽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소설은 ‘어떻게’ 죽게 되는가.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역사 바깥으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스승은 말했다. 그래서 그 죽음은 조용히, 눈치 채지 못하게 이루어지며 어느 누구도 화나게 하지 않는다고. 쉿, 조용히…… 지금 이 순간 혹시 소설이 죽어가는 건 아닌지…… 주변을 정갈히 하고, 소란을 잠재우고 잘 살펴봐야 한다.
다시,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야겠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이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뿜어져 나오는 빛’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땅거미가 내려앉는 역 근처에 서서 나는 망연히 세상을 바라본다. 빌딩 숲이 보인다. 그 사이로 난 복잡한 길들과 길 위에 선, 어딘가로 끝없이 밀려가는 군중들이 보인다. 그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눈동자들을 응시한다. 그들의 영혼은 오늘밤 어디에 숨어 있나. 어디에 숨어 고단하게 잠들 것인가. 혹은 빨갛게 달아오른 채 빛과 속도에 시달릴 것인가. 혹은 칼을 휘두르고, 숨통을 조이고, 피를 흘리고, 그러면서 다시 사랑하고, 이별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