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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_ * 판타지와 비인간들

글 / 이영도_소설가. 1972년생. 소설 『드래곤 라자』 『퓨처워커』 『폴라리스 랩소디』 『눈물을 마시는 새』 등


  1. 컴퓨터 게임은 예술인가. 

  영화, 사진, 만화 등이 제 7, 제 8, 제 9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에 합류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제 10의 예술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습니다만 타자(붓을 쥐는 筆者가 아닌, 키보드 두드리는 打者)는 조심스럽게 컴퓨터 게임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현재로서는 무리가 많은 예측입니다. 컴퓨터 게임은 그 정수가 놀이에 있지 예술에 있지 않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놀이와 예술 사이의 장벽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잘 만들어진 게임을 끝냈을 때는 예술적 카타르시스와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게임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법을 알아야겠지만, 모든 능동적 참여에는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서도 최소한의 감상법은 익혀야 하지요.

  하지만 현 시점에서 컴퓨터 게임을 제 10의 예술로 규정짓긴 어렵습니다. 현재의 컴퓨터 게임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입니다.

  물론 도피가 타파해야 할 무엇은 아닙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한 잠깐 동안의 휴식은 필요한 일이며, 타자는 일상 탈출을 외치는 관광업자들의 분노를 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도피 행위가 예술이 되기 위해선 현실에서 도피하더라도 인간으로부터 도피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모든 전통적인 소설 작법을 거부했던 누벨바그 문학들도 인간을 거부하지는 않았으며, 데가주망은 사회로부터의 일탈이지 인간으로부터의 일탈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컴퓨터 게임이 제공하는 도피처는 어떠할까요. SF조차도 오래 전에 사용을 꺼리게 된 ‘비인간을 안타고니스트로 삼는 플롯’을 컴퓨터 게임이 아직까지 즐겨 사용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타자의 빈약한 독서 경험을 통해 볼 때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보다 더 공감가도록 외계 지성체를 그려 낸 소설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솔라리스』에서 주인공이 만난 안타고니스트는 동료들이거나(물론 인간 동료입니다) 자기 자신의 기억이었습니다. 아서 찰스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에서는 오버로드라는 외계인이 등장하지만 이 작품의 테마는 인간과 외계인의 대립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다음 세대의 갈등에 있었습니다. 같은 작가의 『라마와의 랑데뷰』는 퍼스트 컨텍트를 다룬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아예 외계인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외계인이 인간의 거울 노릇을 하는 엄숙한 SF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반영하는 거울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유를 계속 적용한다면 외계인은 오목 거울이거나 볼록 거울이며, 그 앞에서 기성을 지르며 좋아하는 어린이들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런 거울들은 인간의 자아를 비추어주는 도구가 아니라 놀이의 도구입니다.

  SF가 비인간 캐릭터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SF와 과학은 떼어 놓을 수 없고, 과학이 찾아 낸 것은 인간의 외로움입니다. 지구상에는 인간과 대등하게 교류할 수 있는 존재가 없으며 천문학이 관측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우주에서도 그런 존재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인공지능학이 내놓은 개발품들은 도저히 지적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없으며 근시일 내에 그것이 가능해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복제 인간은, 글쎄요. 타자의 견해로 복제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무한책임을 질 수 없다면 복제 인간의 탄생에 함부로 관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도 책임지지 못하면서 다른 인간을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요. 어쨌든 과학은 아직 인간 이외의 지적 존재를 찾아내지는 못했고 과학이 밝혀 낸 사실들을 무시할 수 없는 SF는 인간 이외의 지적 존재에 대해 심드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SF에 대해 떠올리는 선입견과 달리, SF는 꽤 오래 전에 외계인이나 앤드로이드, 미확인 생물체, 돌연변이, 인공지능 같은 비인간 캐릭터에 대한 열광을 잃었습니다. 현대의 SF가 비인간 캐릭터를 이용한다면 그것은 오브제로 취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다른 우리를 자극해서 일깨우는 오브제는 우리 자신을 재조립하게 하는 거울과는 조금 다릅니다.

  하지만 컴퓨터 게임은 과학적 사실에 구애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인간 이외의 지적 생명체로 가득한 세계를 꾸며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컴퓨터 게임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로써 그것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거기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이외의 지적 생명체를 어떻게 대하는 존재인지 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과 대등한 존재들에게 어떻게 대하는 생물인지 직접적으로 알아 볼 방법은 없습니다. 지구상에는 인간과 대등한 존재가 인간 자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얻기 위해선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봄으로써 간접적으로 짐작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작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세계보건기구가 2002년 10월 3일 발표한 「폭력과 보건에 관한 세계 보고서」를 보면 2000년 전 세계에서 폭력, 전쟁, 자살 등의 형태로 인간에 의해 죽은 인간의 숫자는 1백65만9천여명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은 현재 만명 당 세명 꼴로 인간을 살해하고 있다’입니다. 몇만명씩 입장하는 경기장에 가는 일은 역시 목숨을 거는 일이었던 셈입니다. 단 하나의 자료를 통해 도출한 예측이기 때문에 비약이거나 오류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만약 우리 인간에게 자신과 대등한 이웃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19초 당 한명 꼴로 그들을 살해할 거라 예측해볼 수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타자로서는 긍지를 느낄 수 없는 예측입니다.

  이런 인간의 인간에 대한 폭력성과 컴퓨터 게임이 애용하는 비인간 캐릭터를 함께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과 대등한 존재를 살해하려는 충동을 가진 생물입니다. 그렇다면 컴퓨터 게임이 그려내는 세계는 인간을 비추는 거울로 가득한 세계가 아니라 증오를 투사할 적으로 가득한 세계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게임에는 코믹하게 표현되었든 무시무시하게 표현되었든 적대자나 라이벌, 몹, 자코 등이 등장합니다. 게임 내의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적대자들을 압박하고 구축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컴퓨터 게임의 기본 규칙입니다. 바꿔 말한다면, 컴퓨터 게임은 가장 많은 증오를 행동으로 표현한 인간이 인간의 궁극적 목표에 가까워진다는 패러다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비인간 캐릭터에 대해 좀 복잡한 폭력을 행사하는 컴퓨터 게임도 있습니다. 아바타라 불리는 플레이어 대응물을 이용하는 종류의 컴퓨터 게임입니다. 컴퓨터 게임 개발자들은 아바타가 플레이어를 대신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며 그 아바타에게 많은 것을 주는 것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바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바타에겐 가장 저능한 애완동물 수준의 지적 능력도 없습니다. 그들의 왜곡되고 과장된 용모는 바비 인형처럼 인간을 대신할 의도 같은 것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을 하진 않지만 아바타 디자이너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요. 결국, 아바타는 왜곡된 형태의 비인간 캐릭터이며 그들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일은 애정의 투사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폭력일 뿐입니다. 통제의 폭력이지요. 그래서, 외견상 폭력적이지 않은 것 같은 컴퓨터 게임에서조차 우리는 인간의 폭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컴퓨터 게임은 예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술은 인간에게서 도피하는 대신 인간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동족의 피를 손에 묻힌 카인의 후손이라면 그 사실을 담담하게, 혹은 격노에 차서, 혹은 비꼬듯이 말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입니다. 말하는 방식은 예술의 종류만큼 있을 테지만 어쨌든 모든 예술은 인간을 말합니다. 하지만 컴퓨터 게임은 인간을 말하는 대신 인간에게 영합합니다. 컴퓨터 게임은 우리에게 우리의 형제 아벨을 제공해 주고는 그를 죽이거나 그를 통제해 보라고 부추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아벨의 몸값을 받아가지요.

  따라서 컴퓨터 게임은 아직까지는 놀이입니다. 물론 컴퓨터 게임이 이대로 비예술 활동으로 남는다 해도 유감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예술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타자는 축구가 예술이 아니라서 안타까워하거나 폄하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게임을 폄하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런데 컴퓨터 게임처럼 비인간 캐릭터에 대해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문학 장르가 있습니다. 바로 판타지입니다.




  2. 판타지에는 왜 비인간들이 등장하는가. 

  요정, 난쟁이, 용, 유니콘, 마귀, 흡혈귀, 유령, 그리고 변신능력자들은 판타지의 세계에서 아직까지 인간과 동급의 위상을 유지한 채 활약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다면 역시 『반지의 제왕』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를 불의 산까지 가져가기 위해 모인 반지원정대는 인간을 포함하여 다섯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호빗과 요정, 난쟁이, 인간, 그리고 마이아). 이들은 나즈굴과 오크의 도전과 추격을 받았고 요정과 엔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리아의 깊은 지하에서 발록과 대치했고 사자의 길에서 유령들을 소환했습니다. 이 정도의 예로 『반지의 제왕』에서 비인간 캐릭터가 가지는 비중을 짐작하기 어렵다면 『반지의 제왕』에서 비인간 캐릭터를 모두 건너뛰고 읽어 보면 된다고 말하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즉, 『반지의 제왕』은 비인간 캐릭터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인간 캐릭터와 인간 캐릭터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반지의 제왕』이 그리고 있는 세계 자체가 그런 세계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타자는 조금 전 제거나 통제의 대상으로 비인간 캐릭터를 제공하는 컴퓨터 게임은 예술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인간의 거울이 될 수 있는 것은 인간 뿐이기 때문에 SF는 비인간 캐릭터에 대한 열광을 잃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비인간 캐릭터를 즐겨 등장시키는 판타지는 컴퓨터 게임처럼 예술이 아닌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비인간 캐릭터도 인간의 거울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우선 후자의 질문부터 대답한다면, 인간의 거울이 될 수 있는 것은 역시 인간 뿐이라는 것이 타자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타인을 관찰함으로써만이 우리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예이긴 합니다만, 아말라와 카말라는 끝내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상태로 이행하지 못한 채 사망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인도 소녀들에게는 동일시의 대상이 될 다른 인간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타인을 관찰함으로써 얻게 되는 우리의 이미지와 실제의 우리가 일으키는 불일치, 혹은 우리 마음 속의 거울에 비친 타인의 이미지와 실제의 타인 사이의 불일치는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을 거울로 삼거나 타인의 거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너’가 있은 후에야 ‘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판타지는 예술이 아닌 것일까요. 타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판타지는 제거나 통제의 대상으로 비인간 캐릭터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결론에는 이론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뒤에 말하겠습니다. 판타지가 비인간 캐릭터를 등장시킬 때 거기에는 컴퓨터 게임과 다른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신화의 재현입니다. 신화의 세계에서 온 인사들이 마일리지의 지불을 요구한다면 판타지는 아마 파산에 이르겠지요. 판타지는 이토록 전설과 신화의 영토에서 비인간 캐릭터들을 즐겨 소환하며 이들은 외계인이나 인공지능 컴퓨터, 돌연변이보다는 훨씬 뚜렷하고 유서 깊은 신화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와 신화가 분리된 탈신화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상징하는 바를 명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화라는 드라마의 주역들이 상징으로서 활동하는 방식을 흉내내어 볼 수도 있습니다. 톨킨의 호빗은 신화의 세계에서 직항로를 타고 온 존재는 아닙니다. 호빗이 등장하는 전설이나 신화는 없습니다. 하지만 호빗의 모습에는 신화의 주역들이 보여준 많은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톨킨 자신이 신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톨킨은 신화라는 상징 체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이런 신화의 재현을 통해 우리는 지식을 얻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경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화는 이야기의 형식을 빌린 원초적 체험의 고백이니까요.

  두번째는 희생자의 제공입니다. 컴퓨터 게임이 우리에게 파괴의 대상을 제공하듯이 판타지도 우리에게 파괴의 대상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유명한 세 가지 판타지를 보겠습니다.

  1) 존 로널드 로웰 톨킨의 『반지의 제왕』 : 간달프와 엘론드 같은 지혜로운 비인간들이 주장하는 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반지의 파괴입니다. 최후의 순간 주인공 프로도 배긴스는 반지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골룸이 그를 대신하여 반지와 함께 파멸했기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2) 미하일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 : 주인공 바스티앙 발타자르 북스는 전능한 힘을 얻었다가 후에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완전한 파괴를 경험합니다. 아트레유가 그를 보증하고 그의 사명을 대신하겠다고 맹세함으로써 바스티앙은 자신을 되찾고 아버지가 있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 어슐러 크로버 르귄의 『어스시의 마법사』 : 주인공 게드는 자신의 강대한 마법을 자랑해 보이려다가 세계의 틈에서 빠져 나온 그림자에게 무시무시한 폭력을 당합니다. 대현자 넴머를이 그를 대신하여 죽었기에 게드는 살아나서 자신의 그림자를 추적했고 그림자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세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파괴나 파괴에 상당히 근접한 상태를 경험합니다. 판타지는 이렇듯 개인의 파괴를 묘사하며 동시에 인간을 대신하여 파괴되는 희생자로서 비인간 캐릭터를 동원합니다. 2)의 예에서 아트레유는 희생되지는 않지만 대신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기꺼이 대신합니다. 그리고 아트레유는 또 한 명의 바스티앙으로서 그 자신이 이그라물의 독 때문에 죽음에 가까운 상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를 포함한 환상계 전체가 파괴의 위험에 처해 있기도 합니다. 3)의 예에서 게드를 대신하여 죽은 대현자 넴머를은 인간이었지만 위대한 마법사이니 만큼 비인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판타지가 자주 묘사하는 이런 개인의 파괴는 어쩌면 주이상스의 체험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타자는 좀 부드러운 단어를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신으로의 회귀를 가로막는 거짓 자아를 깨뜨린다고 표현하겠습니다. 파괴되는 거짓 자아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니기에 비인간 캐릭터들이 그 역할을 맡습니다(물론 예로 든 세 작품이 모두 기독교권의 작품이기에 다른 방식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인간을 대신하여 희생되는 제 2의 아담 이야기가 여러 가지로 변주 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 그것이지요.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타자는 아트레유를 예수의 알레고리로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골룸에 이르러서는 그러고 싶은 생각도 안 듭니다).

  신화는 인간과 세계가 대화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희생자는 자기 파괴적인 인간이 자신 대신 세계와의 장벽 - 거짓 자아 - 을 파괴하기 위한 대가입니다. 이제는 단물이 다 빠진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관계의 회복’을 위해 판타지는 비인간 캐릭터들을 동원합니다. 이것은 관계의 파괴를 위해 비인간 캐릭터를 동원하는 컴퓨터 게임과는 다릅니다.

  몇번이나 말했지만 인간의 거울이 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입니다. 따라서 판타지의 비인간들은 인간의 역할을 맡을 필요는 없으며 그러려 해서도 안됩니다. 그 비인간들이 겉모습이나 행동이 독특할 뿐 인간과 똑같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즉 외형이 다른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 순간 그들은 사냥감으로 전락합니다. 어쨌든 우리 인간은 동족을 살해하는 종족들이니까요. 정의로운 주인공의 강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을 살해하게 할 수 없으니 오크나 나쁜 마법사를 살해하게 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며, 이것은 컴퓨터 게임의 패러다임이지 예술이 아닙니다. 앞서 이견이 있다고 말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판타지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기도 합니다.

  비인간은 비인간으로 두어야 합니다. 그들은 인간 살해의 쾌감을 위한 실감나는 대용물이 아닙니다. 판타지의 비인간들은 인간 밖에서 인간과 세계의 대화를 매개하거나 촉구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겐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화와 전설이라는 인간 경험의 광대한 영토가 있으니까요. 그들이 희생할 때 그것은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죽음이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거기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부활하여 우리 곁으로 돌아오니까요. 카잣 둠의 다리 아래에서 부활하여 돌아온 간달프처럼.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완수하겠다는 아트레유의 담담한 말처럼.

  타자는 그런 비인간들과 인간의 판타지를 두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