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진달래꽃

호놀룰루로 쓰는 편지

‘김수영문학관’을 지키는 명예관장 김수명 선생과의 대화

온몸의 존재 : 바람과 양극의 긴장

기획의 말 ①사야(買) 살(住) 수 있는 집 ②2013년과 2021년, 그들도 다른 그들처럼 ③집을 쫓는 모험 ④잠시 중지된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역사하는’ 작은 역사가들

코로나 시대의 희망

저항은 살아가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것

미신(未神)

맹인 김씨 아저씨와 국어선생과 아, 이성복 시인

그 날의 초상(肖像)

팔레트, 늪, 사랑 - 지구 반대편에서

그림 속에 펼쳐진 창덕궁과 창경궁의 장대한 경관

①의심을 품자, ②명품 위에 쓴 시,우리가 웅덩이를 안다 해도 갈 데가 없다

①제천 1907 ②무급휴가

체험 학습

①강물을 읽다 ②누가 길 위에서 우는데 ③이게 내가 하는 일이에요

①매혹과 응답 ②새로운 풍경과 감각으로 우리 문학의 가능성을 열다

역병의 시대, 한국소설을 호출하다

영웅은 그대 품 안에

아궁이샘물 시인과 《작가세계》 탄생

내 생애를 지시하는 나침반

풍경이 있는 단 하나의 길

눈물을 연기하는 눈물 없는 신파극

비극은 누가 만드는가?

첫 역주본 한국한문소설

한국판 ‘백년의 고독’에 함께 울다

초학자와 어린이를 위한 당송시(唐宋詩) 입문서

대산창작기금 등

2021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우리문학의 순간들

아궁이샘물 시인과 《작가세계》 탄생

이경호
평론가, 1955년
저서 『문학과 현실의 원근법』 『문학의 현기증』 『상처학교의 시인』 등


아궁이샘물 시인을 평창동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1989년 1월 1일 저녁, 나의 고려대학교 영문과 대학원 논문 지도교수이며 《세계의문학》 편집위원인 문학평론가 김우창 선생의 자택에서였다. 그런데 친구인 문학평론가 이남호와 함께 새해 인사를 드리기로 약속한 김우창 선생 집에 그가 먼저 찾아와 있었다. 그는 사진으로 친숙했던 검은 뿔테안경 너머로 우리에게 고요한 눈인사를 건넸다. 몇 년 전 시 문예지에 실렸던 그의 시작 메모가 선연하게 가슴으로 스며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장마철이면 셋방살이 아궁이에 맑은 샘물이 고여 있는 일상을 확인하며 시 창작의 마음가짐을 다잡는다던 그의 글을 읽은 후 나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아궁이샘물 시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바 있었다.
그의 이름은 최승호, 처음으로 그와 마주친 그곳에서 검은 안경테 너머의 크고 맑은 눈망울이 아궁이샘물 같다는 느낌을 아로새겼다.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춘천교대를 선택했으며 시 창작에 대한 열의로 사북이라는 강원도의 탄광촌 오지를 발령지로 선택했던 그였다. 1977년에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나 기대했던 청탁은 드물었고 이어지는 무명의 나날은 그에게 쓸쓸함과 실의를 안겨줄 따름이었다. 하지만 시 쓰기의 결의를 곧추세운 그가 다시 공모에 응한 1982년의 종합문예지가 벅찬 보람을 안겨주었으니 그 보람을 안겨준 은인이 바로 《세계의문학》 <오늘의 작가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우창이었다. 김우창은 이듬해 발간된 그의 첫 시집 『대설주의보』의 해설을 집필하는 인연을 첨부하였다.

 최승호 시인

《작가세계》 창간호 (삼성출판박물관 제공)   

 

1980년대 후반기부터 《세계의문학》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이남호와 그곳에서 시인으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한 최승호의 친분은 두터운 듯 보였던 바, 1989년 새해 첫날 저녁에 이남호의 제안으로 우리 세 사람은 역시 평창동에 위치한 이남호의 집으로 술자리를 옮겨갔다. 그 무렵 최승호는 『영웅문』이라는 중국 무협소설을 비롯한 베스트셀러 대중소설을 발간하며 장안의 지가를 올리던 출판사 고려원의 편집주간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리라는 암시를 던져서 나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 잡지를 만들 것 같아요.
문예지를 창간하겠다는 고백인데, 그 말이 바로 일자리를 옮기겠다는 암시였던 셈이다. 형식적으로 우리 두 사람에게 협조를 당부하던 그의 태도는 바로 전 해에 등단한 나에게 서평 한 꼭지를 청탁하는 행동으로 이어져서 시인 최승호뿐만 아니라 그가 새로 만드는 잡지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북돋았다. 그리고 그 해 5월, 1990년대 한국문학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확립하는 종합문예지 《작가세계》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마치 판화에 네 그루의 나무 형상을 거칠게 새겨놓은 듯한 표지의 제호(題號)와 그 무렵까지 문예지로서는 드물게 심플한 디자인 감각을 부려낸 여러 페이지의 사진 화보는 아직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이었던, 서울대학교 미대 출신의 편집부 직원 박상순의 솜씨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작가세계》의 가장 독특한 면모는 작가의 전기적 자료들을 발굴해내는 <문학적 연대기>를 출발점으로 구성되는 ‘작가 특집’이었다. <문학적 연대기>와 <작가론>, 그리고 여러 편의 <작품론>과 <작가 인터뷰>까지 포괄하는 ‘작가 특집’은 잡지의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면서 그야말로 작가의 문학적 생애를 취재하고 연구한 문학앨범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바, 이후로 한국 문예지들이 기획하는 작가 특집의 전형적인 모델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 내가 종로의 낙원동 부근에 자리 잡은 최승호의 출판사인 <세계사>에 들렀을 때 그는 《작가세계》 창간호를 내게 건네주며 초판을 1만 부 찍어냈는데, 이어지는 주문에 2쇄까지 간행했노라고 고백한 바 있다. 문예지가 1만 부라니, 그것도 2쇄까지 찍어내다니, 나는 창간호가 누리는 세간의 관심을 감안하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창간호의 ‘작가 특집’이 이문열이라는 당대의 베스트셀러 소설가라는 사실을 어림하면서 잡지 내용을 뒤적이다가 나는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기구한 인생사를 풀어놓은 <문학적 연대기>의 참신한 효과를 찾아낼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문학 독자들은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궁금해하듯이 유명 작가의 감추어진 인생사를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문학은 서양문학의 유구한 전통이면서 보고(寶庫)로 자리 잡은 ‘전기문학의 자산’을 거의 미답의 영역으로 방치해버린 과오를 저질러놓고 있었다. 그 과오를 벌충해 주는 작업을 <문학적 연대기>가 시도했던 셈이다. 훗날 내가 궁핍한 살림 탓에 최승호의 도움으로
<문학적 연대기>의 최다 필자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녹음기를 들고 특집작가들을 인터뷰하러 다녔을 때 작가들도 <문학적 연대기>에 대한 관심을 피력한 바 있었는데,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노골적으로 《작가세계》 지면 중에서 <문학적 연대기>가 가장 재미있노라는 고백을 내게 들려주기까지 했다.
그해 겨울로 접어들 무렵 내가 다시 낙원동의 세계사 사무실을 찾았을 때 최승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사를 설립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발행인의 변심으로 추가 투자비를 받아내지 못하고 출판사 문을 닫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가 작은 규모로라도 세계사를 지속해가고 싶어 했으므로 최승호와 나는 같은 또래인 연극인이며 시인인 이윤택의 안내로 그의 가마골소극장이 둥지를 튼 동숭동 일대의 빈 사무실들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하게 되자 최승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자신에게는 문단의 친가와도 같은 민음사의 박맹호 사장을 찾아갔다. 민음사의 박맹호 사장은 <오늘의 작가상>을 제정하여 최승호에게 시인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또 한 명의 은인이었으며 출판인으로서도 큰 성공의 입지를 마련한 대선배였으므로 최승호가 앞날을 상의할 적임자였던 셈이다.
박 사장은 두말 않고 최승호에게 민음사 주간으로 부임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제안은 세계사를 포기하라는 뜻을 내포한 셈이었다. 다른 대안을 찾아낼 여지가 없었으므로 최승호는 그 자리에서 박 사장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런데 운명은 참으로 얄궂은 기사회생의 출구를 최승호에게 마련해 주었다. 최승호가 민음사 주간으로 근무할 것을 수락한 바로 다음날 도서유통업으로 튼실한 기반을 마련한 최선호 사장이 최승호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최 사장은 도서유통사업과는 별도로 청한이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도서유통사업에 전념하기 위하여 청한출판사를 책임져줄 출판 편집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최승호가 청한출판사를 맡아만 준다면 최 사장이 세계사를 인수해 준다는 조건을 수락했기 때문에 최승호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탄식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 하루 만의 차이로 그가 그렇게 학수고대했던 돌파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계사를 살려내는 임무 못지않게 문단에서의 약속이나 신의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게 간주되었으므로, 최승호는 할 수 없이 최 사장에게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그 카드는 1년 동안만 세계사와 청한출판사 주간으로 취임하는 일을 유예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최선호 사장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혹을 떼러 왔다가 혹을 하나 더 붙이고 돌아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곤혹스러운 숙고와 침묵의 시간이 도래하고 마침내 이름도 비슷한 최승호 시인과 최선호 사장의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최승호가 1년 동안만 민음사에서 주간으로 복무한 후에 세계사로 복귀하도록 하고, 최승호가 세계사를 떠나있는 기간 동안 세계사에 근무하고 있는 최승호의 동생인 최계선이 세계사 편집장으로 취임하는 방안이었다. 절충안이라고는 하지만 최선호 사장이 백기투항하는 모양새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바꾸어서 생각해 보면 최선호 사장의 최승호에 대한 기대감이 그만큼 지대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고려원에서의 출판 안목과 짧은 기간에 문학계의 주목을 받는 신생 출판사를 만들어낸 편집 능력에 대한 기대감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때부터 1년 동안 최승호의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몸은 민음사에 남겨두고 있으되 마음은 콩밭과 다를 바가 없는 세계사를 향해야만 하는 분주한 나날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