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들꽃’이 피었던 길을 걷다, ‘황혼의 집’에 이르렀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기획특집 ｜ 가깝고도 먼나라, 새로운 한국과 일본 ①열 채의 이불까지는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②진짜 자기문제로 돌아가는 순간은 타자의 인생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때 ③차이와 상호 무지에 대한 인정 ④독재가 통하지 않는 외교무대
①어느 한 詩人의 음악사랑 ②잠시 기다려주세요, 신호가 끊겼습니다 ③지도와 여행
①한국문학은 여전히 건재하다 ②제2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 ③영역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미국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톱 10’ 선정
조선 여자로서의 삶을 벗고 자신으로 살다
- 『삽교만록』의 여성 천하제일검 검녀와의 대화
조혜란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 『고전서사와 젠더』 『고전소설, 몰입과 미감 사이』 『옛 소설에 빠지다』, 역서 『삼한습유 역주』 등
검녀(劍女), 춘향이나 심청 혹은 홍길동을 아는 이들은 꽤 많을 것이다. 혹은 양소유나 운영 등도…… 그런데 조선시대 이야기 중에는 조선의 여성 천하제일검 정도 되는 인물이 있다. 그녀는 18세기 조선에서 여종 신분으로 태어나 쌍검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자신의 길을 간 여성이다. 그녀에게는 버디무비 같은 서사가 있다. 이 여성의 이야기는 18세기 안석경(安錫儆: 1718~1774)이 쓴 『삽교만록(霅橋漫錄)』에 들어 있다. 안석경은 이 이야기를 단옹(丹翁)에게서 들었다고 적었다. 단옹은 그의 친구인 민백순(閔百順, 1711~1772)으로, 민백순은 이 이야기를 호남 사람에게 들었다고 했다. 어쩌면 민백순이 아버지의 귀양지였던 나주에 따라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을 수 있겠다.
조선시대 여성이 검객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꿈속에서라도 이루기 어려운 소망이었을 터인데 이 작품에는 검을 사용하는 여성 두 명이 등장한다. 한 명은 어떤 세도가에 의해 자기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양반집 소저이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몸종이다. 이 둘 중 궁극적인 주인공은 몸종인 여종이다. 원래 이 이야기에는 제목이 없었는데 요즘 연구자들이 이 이야기에 <검녀(劍女)>라는 제목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 또 그 두 명의 여성 중 한 명, 여종 출신인 그녀를 ‘검녀’라고 부르기로 한다.
나는 지금 영추문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서 어떤 여성을 만나기로 했다. 햇살 좋은 가을날이었고, 거리에는 드문드문 화려한 개량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다들 이십 대를 넘지 않아 보였다.
근처가 경복궁이라 익숙한 풍경이다. 예전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복을 빌려 입고 이 근처를 활보하는 장면도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외국인 관광객 숫자는 줄어들었다. 화려하게 개량된 한복 차림의 여성들 곁을 휙휙 지나 걸음을 재촉한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부리나케 걸어야 한다. 내가 만날 그녀는 18세기에서 시간 여행을 온 분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가 늦을 수는 없다. 가을 햇살을 뒤로하고 카페로 들어섰다. 안쪽에 오리지널 한복차림의 한 여성이 보인다. 그녀는 남색 쾌자를 걸쳐 입고 있었다. 안전거리만큼 떨어진 옆 테이블의 손님들 눈에는 유니섹스 모드 같은 그녀의 복색이 오히려 힙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조혜란 |
■ 조혜란(이하 조) : 저…… 혹시 인터뷰라는 걸 하러 오시지 않으셨나요?
검녀 네, 맞습니다. 전 방금 전에 도착했는데요, 제 얘기로 글을 쓰고 싶다는 분을 기다리던 중입니다.
조 아, 네. 바로 제가 그 사람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거의 250여 년의 시간을 건너 이렇게 뵙게 되다니요. 정말 반갑습니다.
검녀 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지금 인간 세상이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천상세계에 잠시 말미를 얻어 내려왔지요. 그런데 21세기 한양 사람들이 제게 다들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게 뜻밖입니다. 제 복색이 벌써 몇 백 년 전 차림일 터인데요…… 실은 너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습니다.
게다가 여자인 제가 남자 복색을 하고 있는데도 다들 자연스럽게 여기는 듯하니 오히려 제가 어색할 지경이네요.
조 아마 10년 전에 오셨다면 그때는 좀 튀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요즘 경복궁 근처에는 개량 한복 입고 고궁을 즐기거나 주변 거리를 관광하는 젊은이들이 종종 있지요. 제법 많아졌어요. 그러니 그렇게 입고 나타나셔도 아마 다들 한복을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패션에 관심 많은 사람인가 보다 할 것 같아요. 게다가 방탄소년단이라는 지금 글로벌하게 핫한 남성 그룹이 쾌자 비슷한 의상을 입고 춤을 췄거든요. 이래저래 사람들은 당신 복장을 뭐 그런 류의 한복 차림으로 생각할 것 같아요.
검녀 그나저나 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요? 전 그때 한 번 시속을 떠나 강호로 들어간 후에는 자취를 감추고 살았고 그 이후 저라는 사람을 아는 이들도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조 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뵙자고 했어요. 사실 지금 사람들도 조선시대 이야기를 조금은 알고 있어요. 성춘향이나 심청 혹은 홍길동 같은 인물들은 아마 익숙하게 들어봤을 이름일 것 같고요. 그런데 실은 훨씬 다양하고 신선한 인물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인물들에 대해서는 대개는 모르고 있지요. 그중 요즘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정말 잘 맞았을 텐데 싶으면서 알리고 싶은 인물 중 한 분이 바로 당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인 이야기를 좀 자세히 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 생각합니다.
검녀 글쎄요…… 제 어떤 이야기가 21세기와 잘 맞을 것 같다고 하시는지요? 전 그냥 저대로 살아갔을 뿐인데요……
조 맞아요. 바로 지금 말씀하신 바로 그 지점이 제겐 설득력이 있었어요. 그냥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것. 실은 그게 쉽지 않거든요. 제가 알기로 당신은 여종 신분이었는데요, 어떻게 자신의 방식대로 사실 수가 있었나요? 이런 말 씀드리기 좀 죄송하지만 조선시대에 종이란 주인집 재산이자 주인이 원하면 사고 팔리는 그런 존재였지 않나요?
검녀 맞습니다. 저는 한양의 어떤 대감댁 여종이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없고요, 제 첫 기억은 제가 주인댁 아기씨와 같이 놀던 장면이지요.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제가 아기씨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주인께서는 저를 아씨의 몸종으로 삼으셨지요. 그리고 시집갈 때 같이 따라 보내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요. 아는 이 하나 없는 시집에서 그래도 마음으로 의지할 사람을 하나 마련해 주시려 하셨던 게지요.
그래서 전 어렸을 때부터 아기씨 옆에서 마치 친구처럼 단짝처럼 꼭 붙어 지냈더랬지요. 그러다가 아홉살 되던 해 주인댁이 그만 어떤 세도가에게 풍비박산이 나고 맙니다. 살아서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저와 아기씨 그리고 유모가 전부인 줄로 알아요. 멸문지화를 당한 셈이지요. 그 이후 아기씨는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고요……
조 그러셨군요.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방식대로 사실 수 있으셨는지는 아직 말씀해 주시지 않은 것 같은데요?
검녀 하하, 그렇게 무슨 정답 맞히기처럼 단박에 설명이 되는 부분이 아니랍니다. 이리저리 제 이야기를 들으시다 보면 절로 아시게 되지 않을까요? 그 첫 번 계기는 외람되게도 주인댁의 비극에서 비롯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물론 제 마음속에 아기씨는 지금도 여전히 아기씨지만 형편이 그렇게 되자 아기씨의 삶이 양반댁 지체 높은 규수의 삶과는 아주 거리가 멀게 되었고, 겉보기에는 저나 아기씨나 거기에서 거기인 듯하게 보였을 겁니다. 열 살이 지나자 아기씨가 제게 의논을 하면서 함께 해 주기를 원하셨어요. 남장을 하고 멀리 떠나 스승을 구해 검술을 익히자는 제안이었는데 남녀가 유별했던 세상에서 지체 높은 아기씨가 남장을 하고 게다가 검술을 배우시겠다니 처음에는 저도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지요. 그런데 아기씨께서는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하셨어요. 혼자 살아남았으니 그게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요. 우리 아기씨 앞날이 아득해 보였습니다. 소원이 이뤄진다 해도 그 끝은 결국 살인이 되려나 싶고 그러면 아기씨 삶은 어떻게 되나 싶기도 했지만 저는 결국 아기씨의 간절하고 견고한 뜻에 함께 하기로 했지요. 제가 기억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제 삶에는 아기씨가 있었고, 그리고 그때 그런 아기씨 곁에는 오직 저밖에 없었거든요. 유모는 아기씨가 그냥 규수로 살 수 있기만을 바랐으니 계속 그런 아기씨를 말리려고만 했거든요. 하하, 어쩌다 보니 저만 너무 길게 말을 하고 있나 봅니다.
조 아닙니다. 이렇게 들으려고 오늘 뵙자고 청한 것이니 더 길게 하셔도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몸은 편하셨을 것 같긴 해도 어렸을 때는 미천한 신분이었고 열 살 이후로는 어쩌면 떠돌이 같은 삶이거나 원수를 찾아다니는 그런 삶이 이어졌을 것 같은데요, 그리 행복한 삶은 아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지금 되돌아보신다면, 행복하셨는지요? 행복감을 느끼셨다면 그때는 또 언제였는지도 궁금하네요. 소응천이라는 호남의 선비와 부부의 연으로 함께 사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혹시 그때였을까요?
검녀 하하. 제가 소응천이란 선비를 찾아가 첩이 되기를 자청하고 3년 동안 같이 산 일이 있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행복했던 때는 그때가 아니랍니다. 그때는 오히려 점점 회의와 고민이 쌓여가는 그런 시기였다고나 할까요?
조 아, 그러시군요. 그럼 도대체 언제가 행복했던 때였을까요?
검녀 두 번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첫 번째는 아기씨와 함께 남장을 하고 길을 떠나 검술을 연마하던 때랍니다. 그때 참 힘들었지요. 왜냐하면 저희 같은 소녀들을 제자로 두려고 하는 검술의 스승, 사부를 찾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꼬박 2년도 더 헤매 다닌 것 같군요. 오대산에서, 태백산으로, 태백산에서 묘향산으로 이름난 검객들을 정말 많이 찾아다닌 끝에 사부를 만나 수련을 할 수 있었지요.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스승을 모시고 계곡에서, 바위 꼭대기에서, 폭포수 밑에서, 울창한 송림 사이에서 아기씨와 나란히 검 다루는 법을 익히던 그때가 제게는 정말 아름다운 한때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깊은 산속에서 같은 사부를 모시는 제자로 한 5년여를 치열하게 무술을 익혔지요. 우리들의 검술은 일취월장하면서 경지에 오르게 되었고, 공중에 몸을 날려 허공을 달리면서 칼을 쓸 수 있게 되었지요.
아기씨와 나란히 검술을 연마하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기꺼이 돌아가고 싶군요. 하하.
 여성검객의 이미지는 영화, 드라마 등에서도 자주 활용되고 있다 |
조 그렇다면 두 번째의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였을까요?
혹시 원수 갚기에 성공한 후 아기씨와 함께 지내실 때였을까요?
검녀 두 번째를 말씀드리려 하니 갑자기 가슴이 막혀오네요.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생겨났고 그 끝에 얻은 결단과 평정심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어디에서부터 말해야 할까요?
조 뭔가 사건도 많고 사연도 많아 보이시네요. 천천히, 찬찬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검녀 그럼 한 번 해 보지요. 하긴 두 번째 행복감을 말하기 전에도 또 한 번의 신나는 한때가 있긴 한 것 같네요. 검술을 다 익히고 하산한 후 아기씨와 저는 큰 도시로 나아가 화려한 검술 묘기를 부려 돈을 벌었답니다. 당시에는 한양, 평양 같은 큰 도시에서 잔치판이 벌어지면 판소리 창자나 가곡창에 능한 기녀들 혹은 악공들 그리고 저희같이 검무를 추거나 검술 묘기를 선보이는 자들을 불렀답니다. 그때 아기씨와 저는 그렇게 해서 몇 천 냥을 벌 수 있었고, 그 돈으로 멋진검 네 자루를 사서 각기 두 자루씩 사용했지요. 온갖 잔칫집에서 검술을 시연해 보이던 그때도 참 신났었네요. 큰 도시의 잔칫집을 그렇게 넘나들면서 주인댁을 풍비박산 나게 만든 장본인들의 소문을 찾아다녔었지요. 신나게 돈을 벌면서 잔치자리에 불려다니던 화려했던 한때도 있었지만 막상 저의 두 번째 행복은 제가 조선이라는 사회의 체제를 벗어나 인적 드문 강호에서 혼자 살려고 마음먹은 이후의 삶에서 찾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무주공산에서 혼자 사는 삶이었지만 저는 비로소 제 삶의 주인이 되어 견고하게 살았구나 싶습니다.
조 자연 속에서 혼자 사셨다는 말씀이신가요?
검녀 그렇지요. 그렇게 살았기에 저는 조선의 남존여비나 주인과 종의 차별 그리고 불필요한 예법에도 구애받지 않고 제 나름대로 살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해요.
조 궁금한 게 있네요. 어떻게 해서 아기씨와도 헤어지고 남편과도 헤어지게 되셨나요?
검녀 어쩌면 그 두 가지가 제가 제 나름대로의 삶을 택하게 된 또 다른 계기들일 수 있겠습니다. 어느 날 드디어 원수의 집에서도 잔치가 있다면서 장안에 이름난 검술 묘기를 하는 사람을 찾았고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지요. 그날은 달이 아주 밝은 날이었습니다. 아기씨와 나는 검술 묘기를 보이는 척하다가 삽시간에 원수와 그 집안 수십 명의 목을 베고 복수에 성공했습니다. 원수의 집에는 사람들이 죽으면서 흘린 피가 낭자했지요. 거사를 마친 후 우리는 하늘을 날아 처소로 돌아왔는데 아기씨는 목욕재계하고 여자의 옷으로 갈아입고는 선산에 복수에 성공했음을 아뢴 후 제게 당부했습니다. 8년 동안이나 남장을 하고 천 리를 돌아다닌 데다가 이제 자기를 위해 중매해 줄 사람도 없으니 자신은 이제 죽겠노라고, 그러나 너는 노비이니 나를 따라 죽을 필요가 전혀 없고 천하에 특별한 선비를 찾아 아내나 첩이 되라고.
제가 비록 여자이지만 남자 못지않은 기이한 뜻과 영웅의 기운이 있으니 평범한 남자와는 맞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는 곧장 자기 칼로 자살을 하셨지요. 저는 복수 후의 삶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해 볼 겨를도 없었는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하겠습니다.
조 아니, 그 아기씨는 복수에도 성공했는데 왜 죽음을 택했을까요?
검녀 지금 생각하면 아기씨는 양반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양반 규수가 음양의 법칙에 따르지 않고 남장을 하고 검술을 익히며 온 산천을 돌아다녔고 게다가 양반의 혼인은 중매해 주는 이가 없으면 정식 혼인이 아닌데 아기씨에게 중매를 주선해 줄 사람은 없었던 게지요. 아기씨가 그냥 그대로 사셨더라면 아마 저는 아기씨 곁에서 또 그렇게 살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기씨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본인이 양반이라는 사실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 양반으로 살기 어려워지자 자살을 선택하신 거고요. 전 아기씨의 보검 두 자루를 팔아 장례를 지내고 제사를 부탁한 후 어떻게 할까 하다가 여자 혼자 사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기에 그 후로 3년여를 남장으로 떠돌면서 같이 살고 싶은 대상을 찾았지요. 그 끝에 호남의 소응천이라는 선비만큼 명성이 훌륭한 인물이 없는 것 같아 그에게 찾아가 스스로 첩이 되기를 자청했던 것입니다.
조 그렇게 훌륭한 선비인데 그 선비를 떠나신 이유는 또 무엇 때문인가요? 조선시대를 생각해 보면 당신과 같은 신분의 여성이 선비의 첩이 되어 산다는 선택도 그리 나쁜 선택지는 아닌 것 같아 보이고요, 게다가 그 선비는 호남일대에서 유명했다고 하니 남들 보기에는 더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한데요.
검녀 제가 그 선비를 찾아가 첩이 되고자 했던 이유는 그에게 큰 학문이나 경륜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곁에서 살아보니 그는 자잘한 지식이나 좇는 자로서 그냥 선생 정도를 하면 적당한 인물이었습니다. 과장된 소문을 듣고 그 밑에 학생들이 모여들거나 하다가는 오히려 화가 미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충고도 해 주었지요. 결국 저는 그에게 이제 당신을 떠나겠다고 이별을 고하면서, 그래도 한때의 남편이었으니 제 내력을 다 말하고, 떠나기 전 복장을 갖춰 한바탕 검술을 펼쳐 보였습니다. 제가 그의 그릇을 아는지라 제 칼바람을 견디지 못할까 염려되어 술을 열 잔도 더 권했는데 그래도 그는 내 검술을 보고는 벌벌 떨며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죠. 저는 그의 입안으로 더운술을 흘려 넣고는 남자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섰던 겝니다.
조 그 검술 시연을 저도 한번 보고 싶군요. 멋있을 것 같은데요.
검녀 하하, 네, 두 자루의 연화검으로 펼치는 제 검술 묘기는 아름답고 화려하고 섬세하면서도 살벌한 바람이 이는 그런 묘기입니다. 그나저나 그 선비는 제 검술을 제대로 보지조차 못하더군요. 그 이후로 저는 남장을 하고 훌훌 떠나 살았습니다. 다시는 여자가 되어 유순하고 공손한 태도로 음식하고 바느질하는 그런 삶이 제게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지요. 소응천과의 3년여의 시간은 제가 조선에서 여자로서의 삶을 벗고 자유롭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몇 번의 계기를 거쳐 저는 조선 여종의 삶에서 그냥 저 하나로의 삶을 선택해서 살 수 있게 되었던 게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왜 산속에서 혼자 그렇게 모나게 사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저는 사람들의 시선과 판단에 맞춰 사는 삶보다 제가 훌훌 살 수 있는 삶이 더 좋았습니다. 하하.
조 역시 인터뷰 요청을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말씀하신 선택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여전히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삶의 방식이 아닐까 싶군요. 지금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는 알기 어렵고, 또 안다고해도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자기 마음속을 명징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야겠구나 싶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뚝 실천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오늘날을 살아가는 진짜 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는 제 인터뷰 요청에 응해 주셔서, 오늘 이렇게 강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