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들꽃’이 피었던 길을 걷다, ‘황혼의 집’에 이르렀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기획특집 ｜ 가깝고도 먼나라, 새로운 한국과 일본 ①열 채의 이불까지는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②진짜 자기문제로 돌아가는 순간은 타자의 인생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때 ③차이와 상호 무지에 대한 인정 ④독재가 통하지 않는 외교무대
①어느 한 詩人의 음악사랑 ②잠시 기다려주세요, 신호가 끊겼습니다 ③지도와 여행
①한국문학은 여전히 건재하다 ②제2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 ③영역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미국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톱 10’ 선정
데뷔작이 두 편이라니
이혜경
소설가, 1960년생
소설집 『그 집 앞』 『틈새』 『꽃그늘 아래』 『너 없는 그 자리』 『기억의 습지』, 산문집 『그냥 걷다가 문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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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이라는 말을 떠올리자 어떤 것을 데뷔작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린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대학 4학년 때 써서 문예중앙 중편공모에 냈던 「우리들의 떨켜」다. 그 전해, 단편을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최종심에서 ‘주제의식이 뭉개졌다’는 평을 들었다. 중편으로 공모했지만 최종심에서 떨어진 걸, 최종심 심사위원이셨던 유종호 선생님께서 민음사에 전하셔서 계간《세계의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등단한 뒤, 두 편쯤 되는 단편을 발표하고 나는 직장생활에만 몰두했다. 이태 동안의 고교 교사 생활, 그리고 출판사를 거쳐서 나중에 잡지사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소설 쓰기를 거의 포기한 채, 생업에만 열중했다. 그러다 잡지사에서 이태를 일하고 나서, 그 이태 동안 편집부원이 30명쯤 회사를 나가는 걸 보고, 이제 정말 그만둬야겠다, 싶었다. 편집회의를 밤 12시에 소집하는 회사였다.
그런 뒤에 퇴직금을 받아서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났다. 한 달 동안 여행하고 돌아와서 처음부터 쓰고 싶었던 장편을 시작했다. 그게 『길 위의 집』이었다. 1994년의 여름은 더웠다. 전력 과부하로 정전이 되기도 했고, 땀띠가 나기도 했다. 난생처음인 땀띠였다. 이게 무슨 병인가, 어리둥절했다. 그해 여름, 나는 송광사의 사찰 수련회에 갔다. 그 무렵, 내 기록 속에는 소설에 관한 나의 의문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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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 것. 소설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사람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서 살아오면서, 자기가 배운 것을 남에게 전하는 도구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생의 수렁을 비껴가거나 그 수렁에서 가능한 한 상처를 덜 입고 빠져나올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소설은 이야기라는 것을 먼저 명심해라. 사람과 사람이 살면서 빚어내는 이야기라는 걸. 사건과 사건의 중첩, 사람과 사람의 부딪침에서 생을 읽어내고, 이 생을 살기에 지친 인간들의 삶을 보듬는 것이 소설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우선 이야기라는 것을.”
1995년 겨울 끝자락, 드디어 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전까지 도서관에 다니고 성당에서
기도도 하고, 그렇게 갈팡질팡하던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았는데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제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열심히 썼지만 막판에 자신이 없었다. 내 우유부단을 알고 있는 친구가 다른 친구 하나를 우리 집에 감시차 보내주었다. 마감 날, ‘한 번만 더 보면 안 될까?’ 묻는 내게 눈을 흘기고, 친구는 원고를 챙겨서 강남 민음사까지 직접 갖다 주었다. 그런 뒤에 수상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집 번호를 안 써서, 담당자가 나의 둘째 언니에게 연락했고, 둘째 언니는 나하고 연락이 안 되어서 안타까워했다는.
상금이 그해부터 올랐다. 그래서 나를 도와준 두 친구와 제주도 여행을 갔었다. 그날 날씨가 이상
해서 비행기는 제주에서 회항했다. 고마운 나머지 다시 떠났다. 호텔 방을 빌리고, 그렇게 다녀왔다.
데뷔는 했지만, 작품 한 편을 마칠 때마다 새롭게 데뷔하는 기분이다. 아무리 써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 이게 글을 계속 쓰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