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찬란한 문명과 반인류 범죄의 사이에서

‘기억 속의 들꽃’이 피었던 길을 걷다, ‘황혼의 집’에 이르렀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기획특집 | 가깝고도 먼나라, 새로운 한국과 일본 ①열 채의 이불까지는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②진짜 자기문제로 돌아가는 순간은 타자의 인생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때 ③차이와 상호 무지에 대한 인정 ④독재가 통하지 않는 외교무대

들녘의 하루

코로나19, 딥체인지 그리고 문학

조선 여자로서의 삶을 벗고 자신으로 살다

다섯달밖에 안된 첫 아들에게 보낸 첫 시집

데뷔작이 두 편이라니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경계를 넘고 근심을 지우는 망우리공원

바람이 바람을 만나 서로 따뜻해질 때

시인의 말은 곧 시가 되어야 한다

지하철 여행자의 일일

서얼 지식인의 내면 풍경

①고모의 흉터,포옹 ②Pierrot,검은 서사

①기러기가 남긴 말 ②언니의 일

①어느 한 詩人의 음악사랑 ②잠시 기다려주세요, 신호가 끊겼습니다 ③지도와 여행

수능이 벼슬

①한국문학은 여전히 건재하다 ②제2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 ③영역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미국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톱 10’ 선정

우리 문학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진짜 ‘나’를 찾기

‘대전환’ 시대의 미래 읽기

사연 많은 인물들에게 대사를 만들어주다

서구의 예수가 일본의 예수가 되다

정지용의 『향수』와 베트남 정서

10년 공들인 소피아대 한국학과 학생들의 『한국전래동화』

대산창작기금 등

3강 조천호 교수, 4강 민은기 교수 편 개최

내 문학의 공간

지하철 여행자의 일일

김행숙
시인,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970년생
시집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1914년』『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등

‘SF적인 것’은 이미 현재에 당도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나쁜 쪽으로 오는 것 같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잠식한 일상은 어쩐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SF 서사물들의 풍경과 자꾸 겹쳐진다. 1단계, 2단계, 3단계, 또는 1.5단계, 2.5단계, 그런 숫자들이 규정하는 일상 안에서 나는 지하철 여행을 무기한 보류하게 되었다. 
그 대신 2020년 가을에 나는 책상 옆에 있는 창문 한 짝을 떼어냈다. 이중창의 바깥쪽 창문을 떼어낸 것이다. 뿌연 시트지가 코팅되어 있는 창문을 떼어내니, 겨울 난방에는 취약할 게 틀림없는 투명유리가 끼워진 안창 하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유리창을 공들여 닦았다. 바람의 기척이 느껴지고, 건너편 아파트의 벽면과 연립주택의 옥상들이 베란다 너머로 보였다. 12층 베란다 창을 닦을 순 없어서 미세먼지 나쁨 정도의 채도는 디폴트 값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베란다에 화분 몇 개를 가져다 놓는 걸로 삭막한 뷰를 다소 보완했다.
책상에서 옆으로 눈길을 돌리면 나타나는 투명한 창문 하나를 갖게 되자 내 안에 한동안 엎드려 있
던 시적 충동이 불쑥 고개를 드는 것도 같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주된 장소는 집 안의 책상이나 식탁같은 곳이지만, 시적 발상이 떠오르거나 시를 일으키는 특별한 문장 하나에 사로잡히는 순간은 거의 언제나 집 밖에서 찾아왔다. 그러니까 시야를 안으로 가두는 불투명한 창문을 떼어내면서 내가 기대한 것은 ‘바깥’이었다. 다시 말해, ‘바깥’을 ‘안’에 들여놓으려는 나름의 소박한 분투였던 것이다. 혼자서 창문 하나를 떼어내느라 정말이지 나는 창문과 한바탕 전투를 치렀다.

내가 자칭 ‘지하철 여행자’가 된 것은 오래 걷는 산책을 내 발바닥이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서부터다. 30분쯤 걸으면 발바닥 통증이 시작되고, 통증을 의식하며 걷는 산책은 이미 산책이 아니라 점점 극기같은 걸로 변질된다. 나는 농담처럼 자전거 체인을 갈아 끼우듯이 발바닥을 교체할 수 있는 발바닥 상점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한다. 생각해보면,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엔 왕복 두 시간을 지하철 6호선에서 보냈다. 그 후로도 지금껏 내가 애용하는 대중교통 수단이 지하철이니, 지하철에서 나는 꽤많은 책을 읽었고 또한 불현듯 시적 충동에 휩싸여 머릿속에 등잔불이 켜진 것마냥 밝아지던 순간들을 혼자 가슴 두근거리며 맞이하곤 했다. 그래서 어느 날,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오로지 지하철을 탈 목적으로집을 나서게 되었다. 지하철 여행자가 되기로 하고 보니, 집에서 나와 도보 10분 거리에 왕십리역이 있다는 것은 내게 행운에 속하는 일이었다. 왕십리역은 2호선, 5호선, 수인분당선, 경의중앙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으니, 나의 작은 여행을 그런대로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목적지는 굳이 작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지하철이 크게 붐비지 않는 시간대와 노선은 지하철 여행
에서 고려할 만한 사항이다. 모종의 약속시간이나 목적지나 필요에 구속되지 않은 채로 한 시간쯤 지하철을 타고 낯선 동네로 건너가는 시간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낯선 동네의 골목길을 조금 배회하다가찾아낸 카페에 들어가 세상으로 뚫린 창문 하나를 빌리는 일 또한 내가 일상에서 만들어내는 특별한 시간이다. 가방에는 책 한 권, 작은 노트북 하나가 들어 있다. 지하철 여행자의 배낭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어두운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이제 거의 지하철이 되어갑니다. 지하철은 낡은 세계고, 신세계가 낡아가는 것을 보면서 백 년 동안을 떠돌아다니다 보니 몸은 폴폴 날리는 곰팡이 가루가 되고 습기나 한기가 되고……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분위기, 기분, 정조情調 같은 것이 되어갑니다.

- 졸시, 「지하철 여행자 208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