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찬란한 문명과 반인류 범죄의 사이에서

‘기억 속의 들꽃’이 피었던 길을 걷다, ‘황혼의 집’에 이르렀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기획특집 | 가깝고도 먼나라, 새로운 한국과 일본 ①열 채의 이불까지는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②진짜 자기문제로 돌아가는 순간은 타자의 인생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때 ③차이와 상호 무지에 대한 인정 ④독재가 통하지 않는 외교무대

들녘의 하루

코로나19, 딥체인지 그리고 문학

조선 여자로서의 삶을 벗고 자신으로 살다

다섯달밖에 안된 첫 아들에게 보낸 첫 시집

데뷔작이 두 편이라니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경계를 넘고 근심을 지우는 망우리공원

바람이 바람을 만나 서로 따뜻해질 때

시인의 말은 곧 시가 되어야 한다

지하철 여행자의 일일

서얼 지식인의 내면 풍경

①고모의 흉터,포옹 ②Pierrot,검은 서사

①기러기가 남긴 말 ②언니의 일

①어느 한 詩人의 음악사랑 ②잠시 기다려주세요, 신호가 끊겼습니다 ③지도와 여행

수능이 벼슬

①한국문학은 여전히 건재하다 ②제2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 ③영역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미국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톱 10’ 선정

우리 문학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진짜 ‘나’를 찾기

‘대전환’ 시대의 미래 읽기

사연 많은 인물들에게 대사를 만들어주다

서구의 예수가 일본의 예수가 되다

정지용의 『향수』와 베트남 정서

10년 공들인 소피아대 한국학과 학생들의 『한국전래동화』

대산창작기금 등

3강 조천호 교수, 4강 민은기 교수 편 개최

단편소설

②언니의 일

조우리
소설가, 1987년생
경장편 소설 『라스트 러브』, 소설집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등

은희는 세 자매의 맏이였고, 그래서인지 어디서든 동생들과 어울리는 것에 익숙했다. 중고교 시절에는 쉬는 시간에 후배들이 찾아와 쪽지와 간식거리들을 주는 일이 심심치 않았고, 삼수 끝에 입학한 대학에서는 나이 어린 동기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매 학기 과대표를 맡았다. 동생들이 따르는 만큼 은희도 언니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저장하지 않은 번호로 걸려온 전화가 대뜸 “언니” 하고 은희를 불렀을 때에도 망설임 없이 대꾸했던 것이다.
“응.”
“내가 저번에 이야기했던 거 말이야, 혹시 어떻게 됐어?”
“저번에?”
그게 뭐였더라. 상대방의 목소리가 아주 낯설지는 않아서 은희는 미안해졌다. 자신이 뭔가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사실 요즘 정신이 없었다. 급한 작업의뢰가 연이어 들어와서 계속 철야를 하느라 다른 곳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끼니를 챙기는 것도 버거웠고 청소는커녕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날이었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지면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은희는 자신의 그런 점이 항상 부끄러웠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나머지는 전부 버거워지는 것이. 자신의 역량이랄 것은 해내야 하는 일보다 늘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또 뭘 잊고 있었던 거지?
“나 출국 날짜가 정해졌거든. 그 전에 알아봐 줄 수 있는 거지?”
“출국?”

“영국 간다고 했잖아. 그쪽 회사에서 비자를 해결해 줬어.”
잘 됐네. 누구인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어쨌든 무언가가 해결되었다는 건 잘 된 일이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상대방은 “언니 나 지금 받아야 하는 전화가 들어와서 나중에 연락할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은희는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다.
누가 번호를 바꿨나 싶어 뒷자리를 저장한 연락처에서 검색해봤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휴대폰 보신다고 고개 들고 계시면 목이 긴장해요.”
적외선치료기의 남은 작동시간을 확인하러 온 간호사가 은희의 목을 가볍게 주물렀다. 알코올 냄새가 나는 간호사의 손은 기분 좋게 서늘했다. 은희는 정형외과 물리치료실에 엎드려 적외선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며칠 전 마지막 작업물을 보내고 후련한 마음으로 기지개를 켜는데 목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겠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면 좀 낫겠지, 파스를 붙이면 좋아
지겠지 하는 사이에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결국엔 병원에 왔다. 뭉친 근육을 푸는 주사와 적외선치료를 처방 받았다. 자세를 항상 바르게 하고 틈틈이 스트레칭을 하라는 의사의 말은 도무지 지키기가 어려웠다.
은희는 작업에 집중할 때면 몇 시간씩 한 자세로 앉아 있곤 했다. 조도가 높은 스탠드를 둔 책상에 종이를 펼치고 그림을 그렸다. 동글동글한 얼굴들을 잘 그리는 편이었다. 깜짝 놀라면서도 기쁜 표정, 고민을 하지만 심각하지는 않은 표정, 무언가를 알려주면서 건방져 보이지 않는 표정 같은 것을 의뢰받아 얼굴들을 그렸다. 주로 광고에 쓰이는 그림들이었다. 은희가 그린 얼굴들은 “이 가격 실화야?”, “아직도 모르셨다고요?”, “지금 바로 상담사에게 연락주세요!” 같은 말풍선과 함께 인터넷상을 떠돌아다녔다. 광고주의 미묘한 취향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었다. 눈썹의 기울어진 각도나 입술이 벌어진 모양이 조금씩 다른 얼굴을 수십 개씩 그렸다. ‘궁금 입 1’, ‘궁금 입 1-1’, ‘궁금 입 1-2’ 그런 파일명들을 가지고 담당 AE와 통화를 하다 보면 사람의 얼굴에 눈, 코, 입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도 요 며칠 철야를 하며 했던 작업은 재미있었다. 어린이용 중국어 학습교재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예문 속 상황에 맞춰 다양한 삽화를 그렸다. 그려야 하는 양은 많고 작업 일정은 촉박했지만 이야기가 있는 장면을 그린다는 것이 은희를 즐겁게 했다. 전통 의상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 들어가는 삽화는 특히 여러 자료를 참고하며 공을 들였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긴장 푸시고 좀 주무세요.”
간호사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은희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잊고 있었던 전화가 다시 걸려온 건 다음날이었다. 저번과는 달리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정은희 언니 맞죠? 죄송해요.”
성을 붙이지 않고 ‘은희 언니’로 저장해둔 이름이 여럿이라 착각을 했다고 했다. 은희는 어물어물 그럴 수도 있다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상대가 은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해졌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 반갑네요. 잘 지내죠?”
“나야 뭐, 그렇지. 너는 어때?”
친근하게 물어오는 말들에 맞장구를 치던 은희는 문득 존댓말을 해야 했던 건가 싶어져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이제 와서 누구냐고 묻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대가 하는 말속에서 힌트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저 다음주에 출국해요. 영국 회사에 취직이 되어서요. 이렇게 연락이 닿은 것도 인연인데 시간 괜찮으면 한 번 만나요. 세진 언니도 같이.”
영국과 세진. 비로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두 번, 양다정.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는데, 우리 다정이는 왜 하루 한 번을 제대로 맞는 일이 없을까. 두 번 맞는 건 기대도 안 하니까 한 번만이라도 잘 하자, 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수십 번을 들었던 말이라 똑똑히 기억이 났다. 오 차장이 다정에게 한 소리를 할 때면 늘 읊어대던 그 말이. 상대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는 것이 기뻐서 은희는 생각보다도 훨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러자, 다정아.”
세진에게는 자신이 연락해보겠다고, 일정 정해서 알려주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야 은희는 다정이 예전에는 자신을 ‘언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는 걸, 자신도 다정을 ‘다정 씨’라고 부르며 존대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한세문화사의 오미연 차장은 은희가 겪었던 모든 상사를 통틀어 최악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퇴사를 하고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름을 들으면 쭈뼛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특히 웃는 얼굴로 조곤조곤 다른 사람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말을 잘 했다. 그 말이 그저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기 위한 것일 뿐이면서도 가장 약한 사람을 향한다는 것이 더욱 가혹했다. 팀의 막내였던 다정이 오

차장의 책상 앞에 불려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동안 사무실 안의 귀가 열린 모든 사람이 함께 고통스러워했다. 은희의 입사 동기는 꿈에서도 오 차장의 목소리가 들려서 원형탈모가 생겼다며 사직서를 냈다.
은희의 세 번째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던 한세문화사는 만화 전문 출판사였다. 90년대 말에 전국에 도서대여점이 성업할 때 편집자가 여러 신인 작가들에게 분업을 시켜서 빠르게 작품을 뽑아내는 기획 만화로 큰 수익을 올렸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예전의 명성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잘 나갈 때 판권을 구매해둔 일본 만화와 과거의 기획 만화 원고들을 웹툰으로 유통해서 상황을 타
계해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회사의 전성기 때 가장 많은 히트작을 만들었던 편집자가 오 차장이었다. 은희가 속한 기획 1팀은 오 차장의 지시 하에 일본 만화를 번안하고 웹툰 형식으로 편집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때요? 은희 작가는 이게 괜찮다고 생각해요?”
오 차장은 은희에게 말을 걸 때면 항상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은희의 의자를 잡아끌었다. 칸막이도 없이 책상을 다닥다닥 붙여놓은 사무실에서 은희의 자리는 하필이면 오 차장이 손 뻗으면 닿을 바로 옆자리였다. 낡은 의자의 바퀴가 덜그럭 거리며 은희를 수시로 오 차장 옆에 바싹 붙여놓았다. 그가 가리킨모니터에 뜬 것은 오늘까지 결재를 받아야 할 만화의 한 페이지였다. 내리막길을
달리는 주인공의 옆으로 ‘타타탓 타타탓’이라는 발소리 효과음이 들어가 있었다. 원래는 가타카나로 적혀 있던 것을 지우고 그 과정에서 함께 지워진 주인공의 머리카락과 주변의 배경을 은희가 다시 그려 넣은 뒤 식자 담당인 다정이 효과음을 적은 것이었다.
“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은희 작가, 나쁘지만 않으면 되겠어요? 응? 보기에 좋아야 하지 않겠어요?”
오 차장은 은희에게 꼬박꼬박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며 존댓말을 쓰곤 했다. 은희가 만화 작가라는 이름으로 입사하긴 했지만 실제로 하는 일이 원작의 효과음이나 왜색이 너무 짙게 느껴지는 부분을 하얗게 지우고 그 위에 수정한 그림을 다시 그리는 일뿐이었기 때문에 은희는 ‘작가’라고 불릴 때마다 모욕을 당하는 것 같았다. 오 차장의 말버릇 중 하나인 “응?” 하는 소리도 짜증스러웠다. 질문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말꼬리를 높이는지.
“다정 씨가 또 실수했나 보네. 어머, 여기 시옷이 너무 크게 들어갔다. 차라리 내가 ‘타타탁’으로 알려줄 걸 그랬네. 차장님, 제가 잘 할게요.”
구세주처럼 세진이 나타나지 않으면 오 차장의 잔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해외영업팀 최세진은 회사 내에서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부족한 예산 탓을 하며 고용하지 않는 번역가 대신 만화 번역도 맡고 있었다.
키가 크고 외모가 화려한 데다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세진이 나타나면 자리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세진이 오 차장을 데리고 담배나 한대 피우자며 옥상으로 올라가고 나서야 은희는 제대로 모니터를 살펴볼 수 있었다. 오 차장이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연신 두드려대는 탓에 잘 보이지 않던 효과음 부분은 은희가 보기에 정말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효과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게 보여야 하는 건지. 다만 은희가 공들여 다시 그린 주인공의 머리카락이 거의 다 가려진 것이 신경이 쓰이긴 했다.
“다정 씨, 이거 ‘타타탁 타타탁’으로 바꿔서 크기를 좀 줄여줘요.”
“네, 알겠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청년 인턴으로 입사한 다정은 오 차장에게 하루 두어 번은 꼭 불려가서 트집과 잔소리를 받아내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은희는 다정이 내심 기특하게 느껴졌다. 몇 번 따로 불러서 점심을 같이 먹은 적도 있었다. 은희의 막냇동생과 같은 나이인데도 마냥 아이같이 느껴지는 동생과는 달라 보였다.

아마 은희가 자신을 챙겨주었다는 걸 다정도 알았으리라. 그래서 휴대폰에 ‘언니’라고 저장을 했겠지. 회사를 그만두고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번호를 지우지 않았던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잊고 있던 다정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쌍꺼풀 없이 쳐진 눈매와 동그란 얼굴형 때문에 유순하게 보였던 인상, 까만 긴 생머리를 늘 하나로 묶고 다녔던 뒷모습, 운동화 뒤축을 구겨 신고서 화장실로 향하던 느릿한 걸음걸이 같은 것들이. 은희는 마음 한구석에 뭉쳐있던 무언가가 따뜻하고 부드럽게 풀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기억을 한 번 건져 올리자 여러 장면들이 잇달아 또렷해졌다. 다정의 사무실 책상 한쪽에는 피규어들이 쫑쫑 줄지어 서 있었다. 영국의 스튜디오에서 만든 클레이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 캐릭터를 좋아해서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었다며, 영국으로 유학을 가는 게 꿈이라던 다정의 말들도. 다정의 물건들은 영국 국기가 그려진 것들이 많았다. 마우스패드와 메모지 같은

사무용품부터 겨울철 난방이 잘 안 되는 사무실에서는 필수품과 같았던 담요와 털 슬리퍼, 방석까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더니 결국 가는구나. 은희는 다정의 영국행에 도움이라도 준 것처럼 뿌듯한 마음이 드는 자신이 머쓱하게 느껴져서 서둘러 세진의 번호를 찾았다. 세진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도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바로 전화를 거는 건 조심스러워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세진 씨, 잘 지내? 많이 바쁘지?
답장이 금세 도착했다. 미팅 중이니 끝나면 전화를 주겠다는 거였다. 은희는 혹시 세진의 전화를 놓칠까 봐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하루를 보냈지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이틀을 기다린 뒤에 은희는 세진에게 다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 언니 미안해요. 제가 요즘 무슨 정신으로 사는지, 언니한테 문자온 것도 거기에 답장 보낸 것도 다 잊고 있었지 뭐예요.”
“아니야, 세진 씨 바쁜 거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정말이었다. 세진은 바쁜 사람이었고, 은희는 세진이 자신의 문자 메시지를 무시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세진은 구독자가 백만 명이 넘는 개인 동영상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일본어는 물론이고 영어, 독일어까지능통한 세진은 어학 학습법을 알려주는 콘텐츠로 시작해서 해외 드라마 소개,외국인 유학생들과의 인터뷰, 해외직구로 구입한 물건들의 리뷰, 일상을 담은 브
이로그 등 다양한 콘텐츠를 채널에 올렸다. 최근에는 티브이 방송에도 출연했고, 한 화장품 회사가 세진의 이름을 딴 제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세진 씨도 다정 씨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하죠. 십 년 만에 듣는 이름이긴 해도, 잊기는 어렵죠. 우리가 함께 겪었던 일들이 있는데.”
십 년 전, 오 차장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웹툰 사이트는 실패했다. 지난 세기의 독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기획 만화들은 새로운 플랫폼의 독자들에게는 가닿지 못했다. 일본 만화들을 번역하면서 신조어로 대사를 채워도 봤지만 촌스럽기만 했다. 한세문화사는 두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정리해고를 하고도 버티지 못하고 폐업했다. 다정은 첫 번째 정리해고 때, 은희는 두 번째 정리해고 때
권고사직의 형태로 퇴사 처리되었다. 오 차장은 폐업 때까지 회사에 남았다고 후에 전해 들었다.
세진은 정리해고가 시작되기 전에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었다. 그때 이직한 회사가 일본 영화를 수입해 인터넷으로 유통하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세진은 간단한 영상 편집을 배웠다고 했다. “정말 기회가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는게 인생인 것 같아요.” 몇 년 전, 세진은 메신저 친구목록에 생일 알림이 떴다며 은희에게 명품 브랜드의 향수 교환권을 보내왔다. 그때 메신저로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은희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기 때문에 은희는 세진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한세문화사를 그만둔 뒤, 은희는 고향으로 내려가 만화를 그렸다. 신인 만화가를 뽑는 공모전에 출품할 생각이었다. 외출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서 정말 열심히 만화만 그렸다. 하지만 예심조차 통과해본 적이 없었다. 계속 이어지는 낙방은 은희의 의욕을 전부 앗아가 버렸다. 모아둔 돈도 다 떨어져 가고, 부모님은 번듯한 대학까지 졸업한 자식이 방안퉁수가 될까봐 전전긍긍하며 매일 은희의 눈치만 살폈다. 그때 세진에게서 향수 교환권이 온 것이다.
—언니 오늘 생일이죠? 축하해요!
—고마워, 세진 씨. 오랜만이네. 잘 지내?
간단히 안부를 물으며 시작된 대화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근황으로 이어졌다. 은희는 세진이 팬클럽까지 있는 유명인이 되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부러웠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자신에 대한 말은 자꾸만 신세한탄으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크게 잘못된 것 같다고. 이미 다 늦어버린 것 같다고. 재능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언니, 난 언니 재능 있다고 생각해요. 재능이 뭐 별거예요?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게 재능이지. 나도 만화 보는 거 좋아하지만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게 언니가 재능이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세진의 말은 은희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은희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명작 만화를 그리게 된 건 아니었다. 그저 다시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무엇이든. 미리 좌절하고 앞서 걱정하는 대신 손을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거면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 뒤로 메신저에 세진의 생일 알림이 뜰 때마다 은희는 세진에게 줄 선물을 고심했지만 교환권으로 보낼 만한 무엇도 세진에게 필요해 보이지 않아서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이렇게 특별한 우연이 세진에게 만남을 제안할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다.

“정말 우연히 다정 씨랑 연락이 닿았거든. 그런데 곧 영국으로 출국을 한다는 거야. 그래서 혹시 가기 전에 시간이 맞으면 한 번 보자고 하는데, 세진 씨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연락해봤어.”
“영국이요?”
“세진 씨도 놀랐지? 다정 씨가 그렇게 영국을 가고 싶어 하더니 결국 가게됐더라고. 영국 회사에 취업을 했대. 정말 잘 됐지 뭐야.”
세진은 말이 없었다. 은희는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곰곰이 자신이 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바쁜 사람을 괜히 곤란하게 한 걸까.

“양다정 씨가 영국에 가기 전에 언니랑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죠?”

“만나서 밥이나 한 끼 먹으면 어떨까 했던 거였는데…… 아무래도 부담스럽지?”
또다시 정적. 은희는 후회했다. 다정에게 세진과 일정을 맞춰보고 연락하겠다고 말한 것. 그때 은희는 마치 세진과 자신이 늘 연락을 주고받는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굴었다. 사실은 그런 사이도 아니면서 세진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것. 그것도 집요하게 두 번이나. 세진에게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겨울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