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혜순으로 태어나진 않았지만 김혜순으로 살다가 다시 김혜순이 아닌 곳으로 가게 되지요!
특집을 기획하며 ①특별한 계기에 쓴 시 ②극지에서 고독에 떨며 피흘리며 쓴 「사람의 가을」과 「응」 ③운명적인 만남 ④저주받은 걸작은 끝내 쓰지 못한 걸작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나의 플래시 속으로 걸어온 시인*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소설에서의 양자역학, 평행우주,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①새로운 개성과 공감의 가능성을 열다 ②제27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소설에서의 양자역학, 평행우주,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편집자 주 ㅣ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창작과 감상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필자에게 복면을 씌운다. 유령작가의 정보는 작가의 희망 여부에 따라 다음 호에 공개한다.
소설이 여전히 고전물리학적 사유와 인식의 틀에 갇혀 있다는 관점에서 21세기 의 소설에 적용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양자역학, 평행우주, 자 유의지의 문제이다. 예전에는 이런 문제를 문학 토론의 장에서 꺼내는 걸 상상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런 분야의 교양과학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대 중과학의 시대가 되었다. 종교가 차지하던 영향력을 과학이 점령하였다고 하여 ‘영 성과학’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너무나도 복잡하여 지금도 양자역학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노벨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만이 언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고전 역학의 세계와 양자역학의 세계를 거칠게라도 비교하자면, 고전역학의 세계에서는 현재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미래의 어느 순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를 정 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결정론을 취한 반면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확률론적 입 장을 취해 비록 현재 상태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미래에 일어나는 사실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불확정 성의 원리’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문제들이 현실 세계에 대한 해석과 인간 존 재에 대한 해석에 새로운 지평을 열기 시작했다.
양자역학의 세계를 바탕으로 생각하자면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Reality is not what it seems)’라고 요약할 수 있다. 동일한 제목으로 최근에 책을 출간한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제2의 스티븐 호킹으로 불리는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박사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근원적으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양자중력장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고유의 시간성이란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주의 생애를 가리 키는 거대한 우주의 시계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이론인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레이저, 컴퓨터, 휴대폰 등은 모두 양자역학 덕분에 가 능해진 기술이다. 하지만 그런 기술보다 더 큰 우주적 가능성을 제시한 인물이 있 었다. 양자역학의 복잡다단한 이론 전개 과정에서 다중우주의 개념을 만들어낸 휴 에버렛은 우주 전체를 유일한 하나의 양자 체계로 보았다. 우주는 여러 상태들 로 동시에 존재하며 분화를 거듭하기 때문에 모든 부분 상태는 일종의 가지가 되 고 그것은 곧 다중우주가 된다는 이론이다. 동시에 여러 상태를 가진 하나의 우주!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는 양자역학의 다중우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라디오를 들을 때 우리는 특정 주파수에 맞춘다. 예를 들어 BBC를 듣고자 한다면, 그 고유한 주파수에 맞춰야지 라디오 모스크바의 주파수를 골라서는 안 된다. 그러니 까 당신의 거실 안에는 다른 모든 주파수들도 떠도는데, 당신이 그것을 듣지 않을 뿐이 다. 양자역학에서는 우리도 파장이다. 우리는 특정 주파수, 곧 우리 세계에 맞춰져 있 다. 물론 다른 주파수들도 동시에 존재한다. 공룡의 주파수, 외계인의 주파수, 그동안 폭발해버린 지구의 주파수 등등. 이처럼 다양한 세계들의 주파수가 우리와 더불어 존 재한다.
미치오 카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실 제로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프로세스가 펼쳐내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고 주 장한다. 우리가 일종의 거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트(bit)와 바이트(byte)로 이루어진 0과 1의 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꾸며내는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에 이 프로그래밍의 세계에서 빠져나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평행우주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러 우주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곳에도 분화된 또 다른 나의 존재 가능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나’ 말고 다른 나들이 다른 우주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고가 정지하는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단번에 ‘나는 뭐지?’라는 의구심에 사로잡힐 테니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 중에 「타자(他者)」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1969년 2월 미국 케임브리지, 찰스강이 바라보이는 한 벤치에서 70대 노인인 나와 한 젊은 이가 우연히 만난다.
“선생, 선생은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중 어느 쪽이십니까?”
“아르헨티나입니다. 하지만 열네 살 때부터 제네바에서 살고 있지요.”
그의 대답이었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흘러갔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혹 러시아 정교 교회 앞에 있는 말라뉴 가 17번지가 아닌가요?”
그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당신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로군요.
나 또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구요. 우리는 1969년, 케임브리지 시에 있구요.”
“아니요.”
그가 약간 아득하게 느껴지는 내 목소리를 가지고 대답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말을 이어갔다.
“저는 여기 제네바에, 벤치에, 로달노 거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어요. 기
이한 것은 우리가 서로 닮았다는 거군요. 당신은 머리가 희끗희끗하니 훨씬 나이가 많
이 들었지만요.”
현재 과학자들은 평행우주를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우리 가 살아가는 우주는 무수히 많은 우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모든 사람은 저마 다 다른 우주에 분신을 가지고 있다’는 식이다. 2009년에 출간된 『평행우주라는 미 친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는가』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물리학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학술지 『피지컬 리뷰(Physical Review)』에 저명한 물리학 교수 알렉산더 빌렌킨의 아주 독특한 글이 실렸다. 얼핏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글이었다. 열 쪽 정도 분량의 글에서 빌렌킨은 흔히 볼 수 있는 공식들로 냉철하게 우주의 속성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마지막 단락에 들연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많은 독자들은 (우주에) 무한히 많은 공간들이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앨 고어가 대통령이고, 심지어 엘비스 프레슬리가 아직 살아 있는 곳도 있다는 소식에 기쁨을 금치못하리라.”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독자를 향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어떤 끔찍한 사고가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면, (우주의) 다른 곳에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믿어도 좋다. 만약 가까스로 사고를 피했다면, 다른 곳들에 사는 당신을 닮은 사람들의 운도 당신과 같았을 것이다.”
물리학자가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판타지 놀이라도 하는 걸까? 혹시 이상한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은 아닐까? 아니다, 정반대다. 빌렌킨은 이른바 ‘우주이론’이라는 전문분야를 이끄는 선도적인 이론물리학자다. 공상과학소설처럼 들리는 이 우주론은 최근 진지하게 인정받는 과학으로 자리 잡았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지에 우주의 다른 어딘가에 또 다른 ‘나’가 있으며, 우리의 세계와 더불어 다른 세계들이 나란히 있다는 기사가 실려도 이제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대략 60조 개의 세포를 지니고 있다. 이 세포들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세포 속의 유전자에 담겨 있고 그것의 본체가 되는 게 바로 DNA이다. 인간의 유전자는 약 3만 개 정도이고 그것은 대략 32억 개의 염기쌍 서열에 기록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걸 분석하는 작업을 게놈프로젝트라고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인간의 DNA 염기쌍(32억 개) 서열이 99.9% 동일하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놀랍게도 0.1%의 차이로 모든 인간은 인종과 피부색, 눈동자 색과 체질, 생김새 등등의 개별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만들어내는 생산라인의 99.9% 공정은 동일하고 나머지 0.1%의 공정에서 개성을 부여하는 칩이 심어지는 과정이 떠오른다.
0.1%의 차이에 의해 어떤 사람은 노벨상 수상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연쇄살인범이 된다. 그것이 그들의 자유의지의 결과에 의해, 다시 말해 그들의 주관과 선택,판단과 행동의 결과로 이루어진 일일까? 자유의지의 문제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의 실험이다. 그 실험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특정한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기 몇 초 전에 이미 뇌의 운동피질이 작동하기 시작함으로써 인간보다 뇌의 결정이 우선한다는 것, 다시 말해 뇌가 미리 내린 결정을 인간은 몇 초 뒤에야 자신의 것이라고 판단하는 꼭두각시 같은 입장에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요컨대 자유의지가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실험이다. 그것 때문에 연쇄살인범이나 연쇄아동성폭행범 같은 존재들도 가해자이기 전에 피해자라는 새로운 윤리적 측면을 과학자들은 제시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동차를 구입했을 때 엔진에 결정적 결함이 있으면 판매회사에 리콜을 받을 수 있지만 태생적으로 잘못 설계된 인간의 뇌는 어디에서 리콜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데 대한 문제 제기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신경과학자 샘 해리스는자신의 저서 『자유 의지는 없다(FREE WILL)』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도하는 모든 것이 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초래되는데,정작 그 사건들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고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이라면, 의식적 주체로서 우리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내 뇌’가의식적이든 아니든 특정하게 사고하고 행동하기로 결정했고, 다름 아닌 이것이 내 자유의 기초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대해 우리가 갖는 믿음의 뿌리 자체를 무시하는 셈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자기의 사고와 행동의 주인이라고 ‘느끼는데’ 이것이 야말로 자유의지라는 문제를 논쟁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유일한 이유인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과학에서 제시한 새로운 물리의 세계, 새로운 우주관, 새로운 인간관을 살펴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우리 소설은 여전히 고전물리학의 세계에 머물며 예측 가능하고 인과적인 관계성 속에서 주인공을 만들고 사건을 만들고 그것을 전개시켜 이해 가능하고 소통 가능한 결말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을 위시한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와 주관, 이성과 선택에 의해 전개 가능한 세계를 펼쳐 보인다. 물론 그것들은 현실 세계를 실재적으로 반영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적 가치와 진실의 문제를 보다 심도 있게 사유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현대의 과학적 진보는 우리가 믿어온 고전 물리의 세계, 고전적 가치의 세계를 깡그리 붕괴시켜 버리는 진보를 이루고 있다. 양자물리학이 이 세계를 실재가 아니라 시뮬레이션의 세계로 보게 만들고, 그런 시뮬레이션의 다중우주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곳에 등장인물로 출연하고 있는 ‘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나들’로 피드백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 존재들은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뿐 일체의 자유의지를 지니지 못한 채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충격적이고 우울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과 인생을 다루는 소설의 본질이야 영원히 변함이 없겠지만 세상은 바야흐로 인공지능도 소설을 쓰는 과학 점입가경의 시대로 진입해 있다. 과학과 소설이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소설가들의 오래된 고정관념이 깨지지 않는 한 인간과 인생의 문제를 더 이상 낯설게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양자역학, 평행우주, 자유의지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과 상식이 소설가들의 사고 범주를 훨씬 능가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아직도 소설가들과 지망생들은 고전적인 사유의 영역에 머물며 낡은 상상력을 부풀리고 있으니 소설의 시대적 대응력이 떨어지는 건 필연적인 일 일 수밖에 없다.
과학적인 관심이 장르소설가들에게 국한된 것이라는 낡은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한국소설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소설에 종사하며 인간과 인생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과학이 제시하는 믿어지지 않는 다양한 사실들을 먼저 공부하고 그것으로부터 인간과 인생에 대한 재해석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문학의 고유 기능인 ‘낯설게 만들기’를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나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뇌에서 먼저 내려진 결정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은 대체 누구의 뜻일까? 작금의 한국 소설문학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소설문학의 21세기적 흐름을 제시하고자 하는 나 이외 또 다른 평행우주적 존재의 사유이길 간절히 바라고 싶은 마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