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혜순으로 태어나진 않았지만 김혜순으로 살다가 다시 김혜순이 아닌 곳으로 가게 되지요!
특집을 기획하며 ①특별한 계기에 쓴 시 ②극지에서 고독에 떨며 피흘리며 쓴 「사람의 가을」과 「응」 ③운명적인 만남 ④저주받은 걸작은 끝내 쓰지 못한 걸작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나의 플래시 속으로 걸어온 시인*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소설에서의 양자역학, 평행우주,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①새로운 개성과 공감의 가능성을 열다 ②제27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③뮌스터 가는 기차
허수경 시인을 추억하며
김현자｜번역가, 1957년생
불역서 『사랑의 뿌리』 『바다의 아코디언』 『찬밥을 먹던 사람』 『꿈꾸는 사람』『붉은 눈송이』 『검은 점이 있는 누에』 『15도 북서풍』 등
올해 5월에 프랑스 브뤼노 두세(Bruno Doucey) 출판 사에서 ‘15도 북서풍’이란 제목으로 허수경 시선집 『15˚ vent de nord-ouest』이 번역되어 나왔다. 시집 출간을 기념하는 낭독회에서 감동적인 서문을 쓴 이자벨 라캉 (Ysabelle Lacamp)과 브뤼노 두세가 프랑스어로 시를 낭송하고 우리 곁을 떠나간 허수경 시인을 대신하여 그 녀 시의 번역자인 내가 한국어로 읽었다. 이 시집 번역 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그녀와의 즐거운 낭독회를 자 주 머릿속에 그려보곤 하였다. 내가 번역한 여러 한국 시인들 가운데서도 허수경 시인은 독일 뮌스터에서 살 고 있었으므로 기차만 타고 파리에 오면 출판사측에서 마련해주는 여러 행사에 참석할 수 있을 터였다. 시집이 막상 나오니 발병 후 일 년 남짓한 사이에 훌쩍 저 세상 으로 가버린 시인의 죽음이 더욱 애달프고 안타까웠다.
그날 독자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브뤼노 두세는 내게 허수경 시인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였다. 내가 허수경의 시를 처음으로 읽은 것은 『포에지(Po&sie)』 한국시 특집 호를 위해 그 번역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한국적 서정 이 강렬하게 느껴지면서 동시대의 감수성과 사회연대의 식이 혼융된 그녀의 시는 독특한 울림으로 나를 흔들었 다. 초기의 연애시 중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렁 으로 가려고 하네,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같 은 구절은 그 진정성과 특유의 청승으로 내게 은밀한 동 조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시인이 20여 편 추천해준 시 중에서 10편을 골라 번역을 하면서 시인과 나는 다소 난해한 구절에 대해 전화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어딘가 진주사람 억양이 느껴지는 나직한 목소리로 번역이라는 게 당최 어려운 건데 하면서 작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번역자의 주관성이 작가의 의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고 하며 내 질문에 다정하고 열정적으로 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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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인과 나는 뮌스터에서 단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녀의 독일인 남편의 어머니가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시인 부부는 노르망디 지방에 사는 친척을 보러가는 길에 가끔 파리에 들른다고 하였다. 나는 그럼 그때 잊지 말고 내게 연락을 하라고 했고 그렇게 막연한 약속 을 한 채로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차에 이 년 전 크리스마스 즈음에 이병률 시인이 아이슬란드 가는 길에 파리에 들르게 되었다. 그가 한국에 돌아갈 때 암스테르담을 경유하게 되는데 그곳에 서 기차로 세 시간이면 허수경 시인이 사는 뮌스터에 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갑작스 레 날을 잡아 허수경 시인을 함께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과 장소는 2018년 1월 6일 오후 4시 뮌스터역 플랫폼.
그런데 정말로 민망하고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열심히 가느라고 갔지만 내가 도착한 곳은 프랑 스 알자스 지방의 뮌스터였다. 그제서야 나는 아들에게 인터넷으로 기차표를 끊어달라고 부탁할 때 독일의 뮌스터이니 조심하라고 주의시키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다. 일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이 모처럼의 기회를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기차를 갈아타고 또 갈아탄 끝에 나는 다음 날 새벽 2시에 독일 뮌스터역에 도착하였다. 이병률 시인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그는 내게 허수경 시 인이 큰 병이 나서 아픈 몸이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다. 우리 셋은 밤을 보내고 다음 날 호 텔식당에서 아침식사 때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내가 방을 나오자 마침 옆방에서 허수 경 시인이 나서고 있었다. 어려보이는 낯익은 얼굴. 항암치료 중이라던 베이지색 니트모자를 쓰고 있는 그녀와 서로 인사를 했다. 나는 그녀의 여윈 두 손을 나도 모르게 덥석 꼬옥 부여잡았다.
우리는 뮌스터 성당을 둘러보고 그녀가 다니던 도서관 앞을 지나 이태리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 다. 허수경 시인은 시종 명랑했고 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말을 하면서 차분하고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날 우리가 뮌스터역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면서 이병률 시인은 그녀의 가 냘픈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아프지 마. 아프면 안 돼. 아프면 죽여버릴거야’ 했다. 그녀는 ‘뭐 이래 죽 으나 저래 죽으나’ 웃으며 대답하고는 선물 받은 히아신스 구근모종을 품에 안고 우리를 떠나갔다.
그 후 병세가 악화되어 절망적으로 되었을 때 내가 전화를 하니 ‘선생님 번역하시는 거 잘 도와 드리지도 못하구 미안해요. 내가 곧 떠나도 너무 원망마세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 했다. 작년 5월 출판사에서 시선집 원작자 계약서를 서둘러 그녀에게 보냈다. 서명한 계약서와 함 께 그녀는 그 힘든 상황에서도 정성과 혼신을 다해 시 「혼자 가는 먼 집」이 실린 문학과지성사의 엽서에 영어로 감사의 말을 적어 보냈다. 그녀의 조그마한 체구와는 딴판으로 훤칠하고 기상이 풍 기는 글씨가 나는 늘 놀라웠다.
작년 10월 3일 허수경 시인은 얼굴을 어느 낯선 들판의 어깨에 기대고 낯선 별에 유괴당한 것 처럼 황급히 아주 머나먼 곳을 향해 영원히 떠나갔다. 중흥사에서 치러졌던 사십구재에는 그녀 를 사랑하는 시인들과 지인들이 많이 와서 훈훈한 영결의 시간을 보냈다. 이병률 시인과 나는 한 국어와 불어로 「불취불귀」와 마지막 시집에 실린 맨 마지막 시 「나는 춤추는 중」을 낭독했다. 그녀 가 아직 살아있었을 때 불역시집이 나왔더라면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 것인가. 애석하게도 뒤늦게 그러나 아주 너무 늦지는 않게 번역작업을 할 수 있었기에 시선집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녀가 독 일에서 보내준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펼치니 앞 장에 ‘인연 반가웠습니다’라고 헌사가 적혀있다. 허수경 시인과 나는 어떤 인연으로 묶여있는 것일까. 마지막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 는 역에서』에 전한 시인의 말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 다음 역을 향하여’ 의 깊이를 헤아려 본다. 그녀는 단지 다음 역에 먼저 가있는 것일까.
한국의 독자들과 함께 불어로 읽는 독자들도 잊지 않고 그녀가 떠난 역을 오래 기억할 수 있다 면 그것이 자발적인 유배를 선택해 각자 독일과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가 어느 날 짧은 그 하루 얼 굴을 마주한 시인과 나의 인연이 지닌 가슴 시린 의미일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