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서시序詩

“내 소설의 장점은 시간을 모험적으로 다루는 것”

「운수 좋은 날」 줄거리 ①죽은 아내와 하룻밤 ②그날의 심증 ③치삼과 소년 ④개똥만 한 사람이 ⑤운수 좋은 날 ⑥휴가

문학교과서와 친일문제, 그 해결점을 찾아서

악당을 구분하는 능력

“신문물의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가 내 실학정신의 핵심”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여원』 편집장 시절의 좌담회

파도그림, 여름에 즐기는 한기(寒氣)

11미터

운동장에서 펼쳐진 상상의 공동체

①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②향학열, 반골정신 그리고 북청사람 ③가난과 고독을 동반 삼은 시조의 길

①적당한 사람,정적이 흐른다 ②말을 잇지 못하는,빛은 어둠의 속도

무구

①예술가의 독창성 ②하쿠나 마타타 ③빽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머리 위로 은총

한 권의 책이 작품 세계의 원형이 되기까지

아시아 시인들이 함께 만든 계간 『시평』의 마지막 가을

뒤죽박죽 나의 데뷔작들

허블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시는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는가

허무맹랑한 공상? 지금 여기, 가장 핍진한 상상력 ‘SF’

논어와 탈무드

20세기 초 프랑스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

시어의 미묘한 의미들 사이에서 주석의 역할을 생각하다

등장인물들이 일본어로 말하게 하는 작업의 즐거움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등

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기획특집

③치삼과 소년

글 정찬 ㅣ 소설가, 1953년생
소설집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아늑한 길』 『정결한 집』 『새의 시선』, 장편소설 『세상의 저녁』 『황금 사다리』 『로뎀나무 아래서』
『유랑자』 『길, 저쪽』 등

현진건 소설「운수 좋은 날」이어쓰기 3


“추어탕 먹을랑가?”
치삼은 맞은편에 앉은 소년을 보며 물었다. 소년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먹겠다고 말했다. 덩치가 청년처럼 우람한 저
아이가 김첨지의 아들 개똥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선술집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치삼의 귓전을 울렸다. 그 사이 빗가락이 굵어진 모양이었다. 주 모가 추어탕 솥뚜껑을 열자 흰 김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가슴속에서 어떤 덩어리가 울컥 치밀어 올랐 다. 운수가 너무 좋아 백동화가 연신 손바닥에 떨어졌다는 그날 물독에 빠진 새앙쥐 모습으로 선술집 에 들어온 김첨지가 처음 청한 음식이 추어탕이었다. 막걸리 곱빼기와 함께 걸쭉한 추어탕을 눈 깜짝 할 새에 삼키던 김첨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던 것이다.
“추어탕 먹을랑가?”
치삼은 맞은편에 앉은 소년을 보며 물었다. 소년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먹겠다고 말했다. 덩치가 청년처럼 우람한 저 아이가 김첨지의 아들 개똥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바짝 말라 얼굴 여기저기에 고랑이 파인 김첨지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김첨지의 말에 따르면 그날 선술집을 나와 아주먼네가 그토록 먹고 싶어 했다는 설렁탕을 사들고 집에 갔더니 세 살짜리 개똥이가 싸늘하게 식은 어미의 젖 을 물고 있었다고 했다.


상을 치르는 동안 김첨지는 넋이 나간 듯했다. 아주먼네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어미 잃은 개똥이의 가련한 모습에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시집와서 고생만 하다가 괴롭게 죽은 아주 먼네를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만 김첨지에게 더 기가 막히는 일은 개똥이 일 것이라고 치삼은 생각했 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인력거를 끌어야 하는데 개똥이를 돌보아야 할 사람이 영영 가버렸으니 김첨지는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치삼이 김첨지에게 개똥이를 돌볼 사람이 있느냐고 넌지시 물어보 았더니 김첨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알아볼 데도 없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겨우 들리는 목소리 로 대답했다.
치삼이 김첨지가 인력거를 끄는 동안 개똥이를 마누라에게 맡기게 한 데에는 아주먼네의 죽음에 자신의 탓도 조금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운수가 좋아 오랫동안 비어 곰팡이내가 나던 허리춤 의 돈주머니를 두둑이 채우고 집으로 가는 김첨지를 자신이 선술집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아주먼 네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마누라는 개똥이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귀찮아하기는커녕 얼마 지나지 않아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혼인한 지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이를 갖지 못한 허전함을 개똥이를 보면서 달래는 듯했다.
“추어탕에는 막걸리가 딱인데…….”
치삼의 말에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스쳐 지나갔다.
“아무렴,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지.”
그러면서 치삼은 주모를 향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막걸리와 너비아니를 먼저 달라고 했다.
개똥이를 정성스럽게 보살피는 마누라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보기 좋았다. 먹지 못해 피골만 남은 개똥이의 몸에 살이 오르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그런 기분 좋음 때문에 자신이 달라지고 있다는 게 신묘했다.
치삼은 한때 김첨지처럼 인력거를 끈 적이 있었다. 그 일을 때려치우고 청소부 일을 한 가장 큰 이 유는 손님을 가려내고 낚아채는 눈썰미와 재주가 젬병인 데다 별별 손님들이 다 있어 오장육부가 뒤 죽박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청소부 일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늦어도 아침 7시 반까지는 경성부 위생과 분실 앞마당에 가야 했다. 마당에는 백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늘 오글거렸 다. 그들의 행색을 보노라면 삶의 막장으로 굴러 떨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발걸음을 돌리 고 싶은 충동이 절로 일었다.
감독에게서 구역이 표시된 전표를 받으면 쓰레기 구루마를 끌고 나가 맡은 구역을 돌면서 쓰레기를 수거한다. 구루마가 가득 차면 구역을 돌아다니는 감독에게 확인 도장을 받아야 하는데, 감독은 구 루마 끌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무게를 가늠해보고는 규정에 미치지 못한다 싶으면 더 채워오라면 서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다.
주택가를 돌다 보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피할 수 없다. 구루마 끄는 일이 악전고투가 되는 것이 다. 힘겹게 도장을 받으면 쓰레기 하차장으로 구루마를 끌고 간다. 그 일을 하루 네 차례 해야 일당 70전을 받는다. 하루 일을 마친 후 선술집에 들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그 날도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돈이 떨어져 바닥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떼어내어 선술집을 나오다 김첨지를 만난 것이었다. 그런데 신묘하게도 개똥이가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부터 선 술집을 들르지 않는 날이 잦아졌다. 늦게 귀가하면 개똥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모가 막걸리와 함께 너비아니를 탁자에 놓았다. 개똥이는 치삼이 주는 술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 아 윗몸을 뒤로 돌려 술잔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마셨다. 그런 개똥이를 치삼은 넋을 놓고 보았다. 자 신 앞에서 술을 그렇게 마시는 이를 처음 보았을 뿐 아니라, 그가 개똥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 워졌다.
치삼은 눈을 반쯤 감고 지난 세월을 더듬었다. 개똥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22년 11월 말이었 다. 김첨지가 개똥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치삼은 그날 처음으로 개똥이를 자신의 집에서 재웠다. 다음 날 청소부 일을 끝내고 부리나케 집에 들어오니 마누라 가 말하길, 아침에 얼굴이 까맣게 탄 남자가 나타나 김첨지가 일본인 손님을 다치게 하여 충무로 경찰 서 유치장에 있다고 알려주었다고 했다. 치삼은 충무로 경찰서로 달려가 김첨지를 간신히 면회했는데, 그가 경찰서로 끌려온 연유를 듣고 깜짝 놀랐다.
식민지 당국이 물가 안정책의 일환으로 인력거 삯을 십분의 이 가량 내리게 할 계획을 세운다고 알 려지자 가뜩이나 생계가 힘겨운 인력거꾼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이틀 후 조선인 측 인력거꾼 대 표 두 명과 일본인 측 인력거꾼 대표 두 명을 충무로 경찰서에 보내 인력거 삯 인하율이 너무 가혹하 다는 것과, 영업주와 인력거꾼 수입 배분율을 조정해달라는 의견을 제출했으나 모두 거부당하자 다 음 날 아침 삼백여 명의 인력거꾼이 모인 충무로 낭화좌(浪花座)에서 동맹 파업을 결의했다.
인력거꾼의 파업으로 출근시간에 커다란 혼란이 일었다. 전차만으로 경성의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 려웠던 것이다. 동맹 파업을 진행하는 동안 인력거꾼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껴 ‘인력거꾼 조합’을 결성하고 조합장, 부조합장과 함께 사십여 명의 평 의원을 뽑았다. 김첨지가 평의원으로 뽑혔다는 사실에 치삼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아는 김첨지는 그 런 일에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동맹파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인력거꾼들은 일하지 않으면 굶 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영업주들은 인력거꾼들에게 인력거를 끌고 싶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으름장 을 놓았다. 얼마 후 인력거를 다시 끄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그 수가 의외로 빠르게 늘기 시 작했다. 동맹파업이 무너질 조짐이 보이자 집행부는 강경 대응에 나섰다. 운행하는 인력거를 찾아내 어 운행을 못 하게 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거친 싸움이 일어나곤 했는데, 급기야는 인력거를 부수 는 일까지 벌어졌다.
치삼이 도깨비에 홀린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 것은 운행하는 인력거를 김첨지가 부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였다. 부수는 과정에서 손님이 인력거에서 황급히 내리다 자빠져 허리를 삐었는데 하필이면 그 가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치삼은 경찰서에서 나와 집을 향해 허위허위 걸었다. 그가 아는 김첨지와 너 무나 다른 김첨지를 보았던 탓에 마음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인력거를 부수는 김첨지의 모습을 머리 로 아무리 그리려 해도 그려지지 않았다. 김첨지는 인력거를 부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치삼 에게 말했다. 인력거 끄는 이와는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연유였는지는 모르겠으 나 그 사람이 자신처럼 느껴지면서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상태로 빠져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인력거가 부서져 있었다고 했다.
“너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치삼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소년에게 하는 말인데도 치삼의 시선은 소년의 등 뒤에서 어른거리 는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김첨지가 출감한 것은 1924년 2월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해 1월 26일 히로히토 황태자와 나가 코 여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은사 감형 조치가 내려졌는데, 김첨지가 그 혜택을 본 것이었다. 감형을 받게 된 죄수들을 강당에 집합시켜 “황태자 전하와 나가코 여왕 전하의 어성혼(御成婚)에 즈음해서 황공하옵게도 지인지자(至人至慈)하신 천황폐하께옵서는 죄를 짓고 여기에 수용된 너희까지도 긍휼 히 여기셔서 감형의 은혜로운 명령이 너희한테 전해지게 된 것이니, 폐하의 홍은(鴻恩)에 보답하라”고 말하는 소장의 입속으로 똥을 처넣고 싶었다는 김첨지의 말에 치삼은 멍해졌다. 눈앞에 있는 김첨지 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그가 인력거를 부수게 된 데에는 아주먼네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충격이 큰 작용을 했으리라고 여겼었다. 일종의 돌발적 행동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면 김첨지 본래의 모습으로 돌 아올 것이라고 치삼은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나온 김첨지의 언동을 보고 있노라면 다른 사람의 혼이 김첨지의 몸에 들어온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김첨지는 다시 인력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출감하기 얼마 전 경성 시내 인력거꾼 육백여 명 이 모여 자신들의 친선과 이익과 권리를 위해 조직한 ‘조선노동친목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김첨지 가 치삼에게 택시를 신종 괴물이라고 말한 것은 이듬해 6월이었다. 치삼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껌 벅거리고 있자 김첨지는 식민지 당국이 경성 시내에 거리 요금제 택시 영업을 허가할 움직임을 보인다 고 했다. 경성에서 몇 년 전부터 운행해왔던 택시는 시간당으로 대절하는 방식으로 요금이 너무 비싸 극소수의 부유층만 이용하는 터라 인력거 영업에 별다른 영향이 없었지만 거리 요금제가 되면 큰 타 격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김첨지 말대로 새로운 방식의 택시가 운행되어 김첨지의 수입이 줄게 되면 개똥이 식비를 제대로 못 받게 되는 것은 아닌가, 치삼은 걱정이 되었다. 그 걱정이 상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첨지가 그 말을 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인력거를 끌다 택시와 충돌해 숨진 것이었다.
어떤 친일파 갑부 아들이 요정에서 술을 먹은 후 기생과 함께 택시를 탔는데, 달리던 택시를 갑자기 세우더니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했다. 운전사가 당황해하자 돈을 몇 푼 쥐여 준 후 거의 강제로 운전사 를 끌어내려 운전석 옆에 앉히고는 그가 시동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그 차가 김첨지가 끌던 인력거를 들이박았는데, 김첨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갑부 측이 어떻게 알고 연락했는지는 모르지만 사흘 후 개똥이 삼촌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김첨지 장례식을 황급히 치른 후 개똥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치 삼이 듣기로는 갑부가 개똥이 삼촌에게 큰돈을 건넸다고 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 개똥이가 치삼을 찾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개똥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사이 청년의 몸으로 자랐을 줄은 꿈에도 몰 랐던 것이다.
청소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앳된 청년이 치삼에게 다가와 인사를 꾸벅 했다. 처음 보는 청년이 라 멀뚱히 그를 보고만 있자 청년은 자신을 모르겠느냐고 물었다.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는 치삼의 말에 청년은 아저씨가 자기를 개똥이라고 부르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사람의 눈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개똥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청년의 얼굴에서 비로소 개똥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 이었다.

“그래, 만주로 간다고?”
치삼이 젖은 목소리로 묻자 개똥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주로 가면 다시 보기 힘들 것 같아 찾아왔다는 개똥이의 말에 마누라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만주에서 뭐 하게?”
“제대로 살아야죠.”
개똥이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제대로 살아야지!”
치삼이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개똥이를 보며 힘주어 말했다. 개똥이 등 뒤에서 막걸리 잔을 든 김첨지가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