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서시序詩

“내 소설의 장점은 시간을 모험적으로 다루는 것”

「운수 좋은 날」 줄거리 ①죽은 아내와 하룻밤 ②그날의 심증 ③치삼과 소년 ④개똥만 한 사람이 ⑤운수 좋은 날 ⑥휴가

문학교과서와 친일문제, 그 해결점을 찾아서

악당을 구분하는 능력

“신문물의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가 내 실학정신의 핵심”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여원』 편집장 시절의 좌담회

파도그림, 여름에 즐기는 한기(寒氣)

11미터

운동장에서 펼쳐진 상상의 공동체

①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②향학열, 반골정신 그리고 북청사람 ③가난과 고독을 동반 삼은 시조의 길

①적당한 사람,정적이 흐른다 ②말을 잇지 못하는,빛은 어둠의 속도

무구

①예술가의 독창성 ②하쿠나 마타타 ③빽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머리 위로 은총

한 권의 책이 작품 세계의 원형이 되기까지

아시아 시인들이 함께 만든 계간 『시평』의 마지막 가을

뒤죽박죽 나의 데뷔작들

허블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시는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는가

허무맹랑한 공상? 지금 여기, 가장 핍진한 상상력 ‘SF’

논어와 탈무드

20세기 초 프랑스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

시어의 미묘한 의미들 사이에서 주석의 역할을 생각하다

등장인물들이 일본어로 말하게 하는 작업의 즐거움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등

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가상인터뷰

“신문물의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가 내 실학정신의 핵심”

- 창덕궁 달빛 아래 연암과 거닐며

글 윤채근 ㅣ 단국대학교 한문교육학과 교수, 1965년생
저서 『매일같이 명심보감』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등

연암 박지원(1737~1805) ㅣ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 한양 출생. 배청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에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론을 전개하였으며,중상주의를 주장하기도 함. 저서로는 『열하일기』, 『허생전』, 『연암집』 등이 있음.



윤채근 연 암 연암 박지원



달빛이 궁궐 작은 모서리까지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인정전 뜰은 고요했다. 봄바람을 맞으며 연암 박지원 선생과 거니는 한밤의 산책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뭉클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나는 조심스레 자기소개를 부탁했고 선생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연 암 공맹의 학문을 배우되 내 배운 바를 곧이곧대로 실천하려 했던 옛날 서생입니다. 정조 임금 시대를 살며 여러 시정 개혁안을 제안했기에 요즘의 후학들은 더러 날 실학파의 영수로 부르기도 하지요. 조금 오해된 측면도 있습니다만.

선생은 청나라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했던 북학파의 리더였고 북학파의 실용 정신이야말로 실학의 핵심내용을 이룬다고 믿었기에 나는 적잖은 의아함을 느꼈다. 내심 우리의 대화가 어려운 학술적 얘기로 흐를까 우려됐지만 난 그 ‘오해’라는 단어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은 한참 달을 올려다보다가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연 암 내 학문적 목표는 두 가지로 요약 가능합니다. 청나라에게 대적하려면 우선 상대가 가진 장점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 하나요, 지나치게 경직된 조선의 권위주의 문화를 바꾸자는 게 다른 하나였지요. 청나라를 오랑캐라 부르며 병자호란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북벌론자들은 실은 자신들이 맞서야 할 청의 실체에 대해선 진지하게 고민하려 들지 않았어요. 그래선 이길 도리가 없었겠지요? 따라서 우수한 청나라 문물을 먼저 수용해 우리 것으로 재창조하고 국제 통상에도 활발히 뛰어들어 국부부터 확충하자는 주장이 등장한 건 어쩌면 필연이었습니다. 그것이 북학파였어요. 

연암 박지원 초상화(실학박물관 소장)    

그런데 북학과 같은 실리적 의견이 이상하게 조선 정치계에선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적을 알아야 적을 극복할 텐데도 적의 실상에 대해선 눈감아버린 셈이지요. 왜 그랬을까요? 기성 정치인들이 새로운 생각을 가진 젊은 선비들의 생각을 묵살하거나 아예 거세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건 또 어째서인가? 바로 윗사람의 의견에 맹종하는 수직적 위계주의가 조선사회에 만연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쟁의 폐해도 결국엔 다양한 의견을 막는 획일적 권위주의에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래서 난 우정과 신의를 강조함으로써 지나치게 수직적인 조선의 인간관계를 가급적 수평적 관계로 수정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결국 신문물에 대한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의 강조, 이 두 가지가 내 실학 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런 실용 정신은 전통적인 유가 정신 속에 이미 고스란히 존재했던 겁니다. 유학의 본질은 인류의 현실적 삶에 기초해 가장 합리적인 사회적 질서를 확립하는 것인데 이게 실용 정신이 아니라면 뭐가 실용 정신일까요? 또 최초로 신분에 상관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여 평등하게 교육한 분이 누구였던가요? 바로 공자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수직적 위계와 수평적 평등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게 유학 정신의 본질이자 핵심이었던 겁니다. 심지어 군왕의 권위조차 언관들에 의해 견제됐음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가요?
그런데 북학파의 실용 정신을 실학이라고만 규정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마치 실학의 주장이 전통 유가 정신과 전혀 다른 것인 양 취급되고 나아가 그 주장이 지나치게 급진적인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호도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기왕의 좋은 전통을 현재에 알맞게 제대로 계승하자는 우리 입장이 과거의 유산 전체를 허학(虛學)으로 치부하려는 반전통주의 노선으로 왜곡된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요즘의 후학들이 실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지만 조금 조심스럽게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채근    

인정전에서 벗어나 후원 쪽을 향해 걸으며 난 선생의 말을 오래 곱씹었다. 어렸을 때 실학에 대해 배우며 뭔가 혁신적인 사상이 조선 후기에 갑자기 출현한 것처럼 여기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런 혁명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과학분야에선 드물게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인문학에서 혁명적 사고의 전환이 과연 일어난 적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자 해당하는 사례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사상을 ‘완전히 다르다’거나 ‘기존에 비해 새롭다’ 혹은 ‘기왕의 생각들을 모두 헛되고 낡은 것으로 만들었다’는 등의 말들은 그 사상의 참신성을 칭송하는 뜻이면서도 반대로 이를 낯선 것 나아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교묘한 책략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를 들면 모험적 아방가르드 운동이 소수의 극단적 천재나 기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져 일상 현실 저 너머로 추방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후원 오솔길을 걸어 우리는 어느덧 규장각 앞에 이르렀다. 물론 실무 기관으로서의 규장각은 설립 직후 궐내각사 구역으로 이전됐지만 어쨌든 정조 임금 문화정책의 구심점이 태동했던 현장은 이곳이었다. 나는 문체반정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알다시피 정조는 젊은 문사들의 문체가 고문의 전아함을 잃고 시속의 패관잡서체에 빠졌다며 몇몇 문사들을 지목했고 이로 인해 벌어진 일대 소동을 문체반정이라 부른다. 선생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고 말투 역시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연 암 반정이란 게 무얼까요?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으로 되돌려놓는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문체반정이란 잘못된 개념입니다. 문체에 바른 것과 그른 것의 구분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이를테면 『서경』과 같은 근엄한 문장도 쓰일 당시 입장에선 왕과 신하들 사이의 평범한 대화였을 수 있지 않을까요? 『서경』의 문체대로 말하는 사람이 현재 없듯이 그문체를 똑같이 답습하거나 흉내 내 쓸 필요도 없는 것이겠죠.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요순시대보다 한참 후대에 태어나신 공자께서 제자들과 일상적으로 나눈 대화 모음집이 『논어』인데, 그렇다면 요순시대의 관점으로는 『논어』 역시 천박한 시문(時文)으로 쓰인 패관잡서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이처럼 고(古)와 금(今)이란 상대적인 것이지 결코 절대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오늘의 문체가 훗날 고문이 되는 것이며 오늘의 고문은 먼 옛날엔 금문이었던 겁니다. 물론 각 시대마다 좋은 글과 나쁜 글의 기준이 없을 순 없겠지요. 하지만 그 기준 역시 끝없이 바뀌는 것이므로 변화의 측면에서 영원한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연못물 위에 어른거리는 달빛에 취해 우린 오래도록 서있었다. 선생의 간략한 답변 속에 함축되어 있을 언중유골(言中有骨)과 언외지의(言外之意)를 알아채려 노력하던 난 문득 하나의 의문에 빠지게 되었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학문을 탐구했고 당대 정책들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를 지녔으며 진정한 리얼리스트로서 강인한 실용 정신마저 소유했던 동시대 최고의 엘리트가 왜 현실 정치를 멀리한 채 재야에 머물고자 했는지 묻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연 암 때론 자신의 인생조차 설명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정계에 흥미를 잃은 이유를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난 정치가보다는 문인 체질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글짓기에 빠져 부지런히 습작했고 운 좋게도 십 대 후반 무렵 문단에 이름이 알려졌어요. 그 뒤로는 짓는 작품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작가로서의 운명을 최종적으로결정지은 건 아마도 『열하일기』였다고 해야겠지요. 이 책이 큰 인기를 끌면서 나는 특정 정치 파벌을 벗어난 자유로운 문필가의 길에 확신을 갖게 됐던 겁니다.

 

≪태평성시도≫의 도시 풍경(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생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문은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인정전 방향으로 되돌아 걷는 도중 나는 질문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정치가가 아니라 문인으로서의 삶이 선생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면 거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나는 선생이 존경하는 문인이 누구였는지 또 문학의 궁극적 효용과 가치는 무엇인지 질문했다. 걸음을 멈춘 선생은 숲가에 핀 진달래꽃 옆에 가만히 서서 속삭이듯 말했다.

연 암 만고 이래 고전인 경전을 빼고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한 권을 꼽으라면 그건 사마천의 『사기』일 겁니다.
사마천은 오직 저술만으로 불후의 이름을 후세에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 시대로 끝나지 않을 문화의 규범들을 제시했습니다. 이건 그가 만약 일개 관료로 살며 특정 권력자의 요구에 종속됐다면 이룰 수 없었을 업적들일 겁니다.
문학의 궁극적 효용과 가치라.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 역시 사마천의 말로 대답을 대신하면 어떨까요? 그가 임안(任安)이란 분에게 쓴 편지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늘과 사람 사이의 문제들을 궁구하고 옛날과 지금의 변화들을 두루살피며 하나의 독자적 인문 학통을 이룩하고자 한다(欲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참으로 멋진 말 아닙니까?
글을 쓰고 또 글로써 세상에 인정받고자 하는 자라면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마천의 마음을 잠시 헤아려 보았다. 한무제에 의해 궁형이라는 치욕적 형벌에 처해진 그는 오히려 이에 발분하여 인류사에 유례가 없던 역사 대작을 홀로 완성했다. 그 저술을 관통하는 일관된 정신은 ‘청사(靑史)의 초월적 윤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당대엔 도가 사라졌더라도 역사가가 자신의 시대를 객관적 기억으로 고정시켜 놓으면 언젠가 후세에 그에 대한 응분의 평가가 이뤄질 것이라는 윤리적 확신 말이다. 이 때문에 사마천은 유명 인사들만이 아니라 자객이나 시정잡배 등 온갖 다양한 인물들을 기록함으로써 ‘열전’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세상 어느 누구도 역사의 심판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됐던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은 사마천처럼 자신의 시대를 자유로운 지식인의 관점으로 기록하여 후세에 물려주고자 했던 것이며 그런 견지에선 스스로 시대의 윤리적 목격자를 자처했다고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그 말을 입 밖에 낼까 망설이다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선생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었고 어느새 달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선생 옆으로 따라붙은 나는 가쁜 호흡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선생이 구사한 난해한 문체의 이유와 당신의 작품 중가장 애착이 가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조선후기 ≪태평성시도≫의 상점가 풍경(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 암 내 글이 난해하다는 데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혹시 내 독서 편력이 같은 시대 문인들보다 넓고 다양해서 그런 오해가 빚어진 건 아닐까요? 이를테면 『장자』는 조선 전기에는 선비들의 애독서였다가 후기로 올수록 유학자들로부터 점점 기피되었는데 나는 반대로 그 문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도가의 세계관을 전폭 수용하진 않더라도 그 안에 담긴 날카로운 역설적 통찰과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해학으로부터는 배울 점이 아주 많습니다. 또한 청나라에서 수입된 여러잡서들도 참고하곤 했는데 이는 자신이 사는 동시대와 가깝게 호흡해야 하는 작가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구태여 들어야 한다면 「광문자전(廣文者傳)」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물론 가장 잘 쓰인 작품이란 뜻은 아닙니다만 나의 처녀작이었던 이 작품 속에 내 인생관 전체가 녹아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아까 내가 어린 나이에 문단에 이름이 알려졌다고 했었는데 그 계기가 된 작품이 바로 이 「광문자전」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광문은 당시 한양의 유명한 거지였어요. 가진 것 없이 태어나 미천한 거지로 살던 광문은 어느 날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저자의 유명 인사가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글을 직접 읽어 보세요. 아무튼 그렇게 벼락출세한 광문은 자신의 소박함을 잃지 않고 많은 선행을 하며 여생을 살았습니다.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천민이었지만 그 내면엔 누구보다 따뜻한 인간애가 있었고 그건 가진 건 많지만 위선적인 양반에게선 발견할 수 없는 고귀한 품격이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의 나는 세상의 그늘에 가려진 진실한 인간들의 내면에 관심이 있었고 그로부터 문학 창작의 힘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의 말을 듣던 난 연암 문학의 정수는 풍자 정신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세상의 비리와 부정을 비꼬고 지배층의 몽매한 편견과 선입견에 맞서 필봉을 휘둘렀던 선생의 문학 인생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자이자 풍자 작가였던 볼테르에 비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인정전 뜰로 되돌아온 우리는 헤어짐의 아쉬움으로 서로를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생이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연 암 오늘의 대화를 통해 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게 있었습니까?

한참을 땅을 바라보며 망설이던 난 용기를 내 대답했다.

실은 선생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이른 나이에 한양 지식인 사회로부터 주목받았고 또 가문의 후광으로 사신 일행에 끼어 북경 여행까지 하셨으니 실은 남모르게 많이 누리며 사신 건 아닐까 의심했던 게 사실입니다. 오늘 직접 뵙고 담소를 나누다 보니 그런 의혹이 사라졌습니다.

연 암 어째서입니까?

세상엔 글과 사람이 다른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훌륭한 글에 매료됐지만 저자를 직접 만나보곤 실망했던 예를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선생께선 한참이나 후학인 데다 학문도 보잘것없는 절 대등한 대화 상대자로 존중해주셨습니다. 선생의 집필 정신의 핵심은 신분고하를 막론하여 그 어떤 상대와도 대화하려는 열린 마음에 있다고 믿어왔거든요. 오늘 제가 만난 선생은 제가 생각해오던 그 연암 선생 그대로셨습니다. 글과 행동이 일치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대답을 들은 선생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남긴 채 인정전 쪽으로 멀어져 갔다. 나는 이게 영원한 이별임을 알았기에 목 메인 음성으로 살짝 속삭여보았다.

선생 같은 분이 우리 문학사에 계셨다는 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쩌면 제 문학적 이력의 원천이자 학문적 자존감의 뿌리는 진즉 선생에게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