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서시序詩

“내 소설의 장점은 시간을 모험적으로 다루는 것”

「운수 좋은 날」 줄거리 ①죽은 아내와 하룻밤 ②그날의 심증 ③치삼과 소년 ④개똥만 한 사람이 ⑤운수 좋은 날 ⑥휴가

문학교과서와 친일문제, 그 해결점을 찾아서

악당을 구분하는 능력

“신문물의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가 내 실학정신의 핵심”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여원』 편집장 시절의 좌담회

파도그림, 여름에 즐기는 한기(寒氣)

11미터

운동장에서 펼쳐진 상상의 공동체

①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②향학열, 반골정신 그리고 북청사람 ③가난과 고독을 동반 삼은 시조의 길

①적당한 사람,정적이 흐른다 ②말을 잇지 못하는,빛은 어둠의 속도

무구

①예술가의 독창성 ②하쿠나 마타타 ③빽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머리 위로 은총

한 권의 책이 작품 세계의 원형이 되기까지

아시아 시인들이 함께 만든 계간 『시평』의 마지막 가을

뒤죽박죽 나의 데뷔작들

허블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시는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는가

허무맹랑한 공상? 지금 여기, 가장 핍진한 상상력 ‘SF’

논어와 탈무드

20세기 초 프랑스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

시어의 미묘한 의미들 사이에서 주석의 역할을 생각하다

등장인물들이 일본어로 말하게 하는 작업의 즐거움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등

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단편소설

무구

권여선 소설가, 1965년생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숲』 『안녕 주정뱅이』,
장편소설 『레가토』 『토우의 집』 『레몬』, 산문집 『오늘 뭐 먹지』 등




단편소설


권여선 소설가, 1965년생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숲』 『안녕 주정뱅이』,
장편소설 『레가토』 『토우의 집』 『레몬』, 산문집 『오늘 뭐 먹지』 등



무구



1
소미의 남편이 쇼핑몰 후문 앞에 차를 세웠다. 그럼 가요, 하고 소미가 차 문을 열고 내렸고 이따 봅시다, 하고 남편은 차를 몰고 떠났다. 그들 부부의 시간이 나 뉘어 각자의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오전 9시 반, 쇼핑몰은 개장 전이었지만 지하로 통하는 후문은 열려 있었다. 지하 1층의 뷰티숍은 9시에 문을 열었고 사우나는 24시간 영업 중이었다.
소미는 회원증을 찍고 뷰티숍으로 들어가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입었던 옷을 옷걸이에 걸고 파우치에 담아온 얇은 면 가운을 입었다. 숍에서 제공하 는 가운이 있었지만 소미는 늘 집에서 가져와 입었다. 저희는 정말 청결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수건이나 가운을 세탁 공장에 맡기지 않고 직원들이 직접 관리 하고 세탁 후 반드시 삶는 코스로 20분이나 돌린다고 매니저가 얘기했지만, 수건은 괜찮은데 가운은 이게 편해서요, 하고 소미는 말했다. 눈치 빠른 매니저는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 다시는 가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남 보기에 튀지 않으려고 소미는 숍에서 주는 가운과 비슷한 베이지색 면 가운을 여덟 개나 갖고 있었다.
소미는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수십 개의 칸막이로 나뉜 방들 중 한곳에 들어 갔다. 잠시 후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안마사가 들어와 인사를 했다. 안마 준비를 마친 여자가 시작한다는 뜻으로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고 소미는 눈을 감 았다. 남편은 지금쯤 실외 연습장에 도착해 가벼운 스트레칭을 마치고 샷 연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공을 두 박스 정도 치고 나면 헬스 센터에서 땀을 낸 후 샤 워를 하겠지. 어쩌면 오늘은 다 귀찮다고 PC방에서 게으르게 점심때까지 뭉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 부부는 은퇴 생활자였다. 남편은 환갑을 훌쩍 넘겼고 소미는 돌아오는 칠 월이면 환갑이 된다. 그들에겐 자녀가 없었다. 그들 부부가 이렇게 윤택하고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게 된 지는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이게 말하자면……. 전적으로는 아니고 일부, 극히 일부는 현수의 덕이라는 걸 소미는 부인할 생각이 없었 다. 현수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망 때문인지 그리움 때문인 지, 아니면 일말의 불안감 때문인지 소미는 알지 못했다.

2
소미와 현수가 이십년이 넘어 다시 만난 건 페이스북을 통해서였다. 한때 소미와 같이 구역예배를 보던 여자 집사 중에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여자가 있었는데, 소미는 그 여자와 페친이었다. 그 여자가 페북에 올리는 글들은 대부분 부동산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소미는 그런 쪽으로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재미 삼아 그 여자가 올린 주택이나 임야의 사진을 구경하고 매매에 관심을 보이는 댓글들을 훑어보곤 했다. 때로 솔깃한 건수도 있었다. 어느 날 무심히 댓글 스크롤을 내리다가 소미는 고현수라는 이름을 발견했고 대학 동기였던 고현수를 떠올렸다. 설마 이 현수가 그 현수일까.
고현수의 댓글은 부동산 전문용어를 섞어 쓴 짧은 글이었는데, 소미로서는 몇 번을 읽어도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 사라는 권유인지 말라는 만류인지 모호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 밑에, 어머, 고현수님은 역시 전문가라 다르시네 요, 분석의 갓 어쩌고 하는 그 여자의 칭찬 답글이 달려 있어 소미는 놀랐다. 둘 이 친한가. 소미는 곧바로 여자 집사의 글 밑에 안녕하시냐는 안부 댓글을 달았다. 자신의 이름을 보고 현수가 반응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현수는 곧바로 반응했다.
임소미 님, 혹시 독문과 나오지 않으셨나요? 제가 아는 친구하고 이름이 같아서요. 실례였다면 용서하세요.

큰마음 먹고 현수를 처음 만나러 간 날, 아침 아홉시에 출발한 소미는 전철과 기차와 택시를 갈아타고 두 시간 반 만에야 현수가 말해준 u시의 부동산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래 걸릴 만큼 먼 거리는 아니었는데 전철과 연계 된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30분 넘게 기다려야 했고 버스 정류장에서도 뭐가 잘못 되었는지 15분 넘게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아 너무 추워서 택시를 잡았다. 다행히 택시는 소미를 현수의 부동산 사무실 앞에 정확히 내려주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낯선 여자가 몸을 일으키며 어서 오세요 했다. 여기 혹시 고현수 씨, 하는데 상대가 나 고현수, 너 임소미 맞지,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현수가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이십 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지만, 현수는 마흔다섯 살이라기엔 너무 늙어 보였다. 더구나 정오도 안 되었는데 잔뜩 지쳐버린 얼굴에 예전보다 살도 많이 쪘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로 기이한 활기가 느 껴지기도 했다. 그들은 반갑게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도 만나지는구나, 현수가 놀랍다는 듯 말했고, 소미도 그러게 말이야, 맞장구를 쳤다. 앉으라 는 말도 없이 책상 위를 주섬주섬 정리하던 현수가 배고프다고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만둣국 잘하는 데 있는데 어때?
소미는 좋다고 했다. 현수는 소미를 앞세우고 부동산 사무실을 나와 문을 잠그 더니 뒤편 마당에 세워둔 팥죽색 비슷한 빛깔의 낡은 승용차를 향해 갔다. 현수 는 차문에 키를 넣고 인상을 쓰며 돌렸는데, 그건 정말 비틀어 연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힘이 들어간 동작이었다. 소미가 앞문을 열고 타려 했지만 문은 꿈 쩍도 하지 않았다. 운전석에 탄 현수가 몸을 기울여 팔을 뻗어 잠금장치를 뽑아 주었다. 소미는 아직도 수동 잠금장치인 차가 있다는 데 놀랐다. 차 안에서는 오 래된 차에서 날 법한 묵은 냄새가 났고 히터를 틀자 더 고약한 냄새가 났다.
소미가 페북의 그 집사님을 잘 아느냐고 묻자 현수는 잘 모른다고, 그 여자가 집사냐고 되물었다. 근처 지리에 밝은 사람답게 현수는 국도를 달리다 좁은 골목 으로 꺾어들더니 이리저리 우회전 좌회전을 하며 달렸고 심지어 포장도 안 된 논 둑길을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기도 했다. 논둑길 중간쯤에서 현수가 소미를 돌아 보며 뭐라고 말했다. 차가 빨리 달리지 않는 데도 엔진 소리가 시끄러워 잘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안 들린다고 소미가 소리치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현수가 차를 세웠다. 시동이 꺼지자 일순 조용해 졌다. 조금 전에 뭐라고 했느냐고 소미가 묻자 현수는 별말 아니라며 웃었다. 소미가 뭔데, 한 번 더 묻자 현수는 천하의 임소미도 늙는구나 했다, 고 했다. 소미는 누가 누구보고 그런 말을 하는지 어이가 없었지만, 그럼 늙지, 그때가 언젠데, 하고 말았다. 그들은 차에서 내렸다. 누런 풀이 말라붙은 공터 주변은 춥고 적막했 다. 그래서 소미는 현수가 키를 넣어 차문을 비틀어 잠글 때 차 키 구멍 안에서 차가운 녹가루가 떨어지는 작은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때라……. 현수가 하늘을 한번 보고 소미를 보았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두렵고 또 두려웠지.
저게 무슨 말인가, 소미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니, 무슨 아직도 저런 말을 하고 있나,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현수가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소미에게 내밀었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 소미도 자연스레 받아서 입에 물었다.

그게 벌써 십육 년 전이었는데, 현수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은 소미에게 어제 일처럼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날 그들이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옆자리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옆자리에는 아이 둘을 데려온 젊은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네댓 살쯤 된 큰애가 음식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린 모양 이었다. 부부가 잠시 침묵하는 사이 아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듯 악을 쓰며 울 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엄마
그릇이 떨어진 소리보다 그 처절한 부르짖음 때문에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향했다. 여자가 허리를 구부려 테이블 아래 쏟아진 음식물을 맨손으로 쓸어 담는 동안에도 아이는 쉬지 않고 미안해요 미안해요 엄마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남자가 됐어 조용히 해 응 조용히, 했지만 아이는 그치지 않았다. 여자가 허리를 펴고 테이블 위에 그릇을 올리고 아이의 양어깨를 꽉 붙잡았다. 소미로서는 앗, 저 손을 닦지도 않고, 싶었지만 다행히 엄마에게 붙잡힌 아이는 좀 징징거 리더니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소미와 현수가 시킨 만둣국이 나왔다. 알이 굵으니까 여기 놓고 꺼먹어, 하고 현수가 앞접시를 들어보였다. 소미가 굵은 만두 한 알을 앞접시에 덜어놓는데 옆 자리 남자가 얘 왜 이래 왜 이래 또, 하고 소리쳤다. 돌아보니 남자의 시선은 옆 자리 유모차에 앉혀둔, 앉혀두었다기보다 담요로 칭칭 감아 묶어둔 듯 보이는 작은애를 향해 있었다. 돌쯤 되었나 싶은 작은애가 입가에 흰 국물을 흘리며 토하 고 있었다.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는 동안 남자가 말했다.
너는 넌 응 이럴 걸 몰라서 애들을 응 밖에 애들을 둘씩이나 끌고 나와서 뭘 먹자는 게 응 말이 되냐 말이 돼 말이 되냐고 말이 된다고 생각해
소미는 현수를 보았다. 현수도 앞접시의 만두를 건성으로 끄면서 곁눈으로는 조심스레 그쪽 가족을 살피고 있었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가 거즈 손수건으로 입과 턱을 닦아주고 포대기를 어깨에 걸더니 남자를 향해 몸을 틀었다. 남자가 칭칭 동여놓은 아이를 풀어 유모차에서 끄집어내 여자의 포대에 업혀주었다. 아이를 업은 여자는 테이블 사이에 서서 한참 몸을 흔들었는데 그 때문에 소미는 정신이 사나웠고, 여자가 몸을 흔들다 말고 허리를 구부려 무언가를 먹을 때면 들린 포대 자락이 그들 테이블의 반찬에 닿을 것 같아 불안했다. 잠시 후 여자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경수 장난하냐 장난해 응 삼켜 삼키라고 아 해봐 응 아 해봐 아 해보라고
잠시 후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하고 쥐어짜는 듯한 큰애의 대답이 들려왔고, 곧이어 더 짜증스러운 소리로 삼켰어 삼켰다고 하는 외침이 한 번 더 들려왔다. 현수와 소미가 만둣국을 다 먹어갈 때쯤 옆자리 가족은 자리를 떴다. 그들이 나가는 과정도 너무 어수선해서 그들이 나간 후엔 식당 안에 홀연 정적이 드리운 듯했다.
소미가 속삭이듯이 애 말투가, 하자 현수가 딱 지 아빠네, 했다. 그러더니 저 가여운 부부도 미쳐가는 중이라고 했다. 뭐가, 하고 소미가 묻자 현수는 어딘가 를 향해 휙 턱짓을 했다.
저기 샘골 쪽 아파트! 그거 덥석 상투 잡고 들어온 게 뻔해. 한때 하루가 다르게 오르던 때가 있었지.

소미는 일주일에 한 번, 그러다 두세 번, 나중에는 주말만 빼고 거의 매일 u시 로 현수를 만나러 갔다. 가는 데 요령이 생겨 시간도 단축되었다. 전철, 기차, 버 스 또는 택시를 타고 현수의 부동산 사무실로 가서 늘 그렇듯 팥죽색 차를 타고 간판도 없는 식당에 가서 만둣국이나 칼국수, 또는 칼만둣국이나 떡만둣국을 먹 었다. 만두나 칼국수도 맛이 좋았지만 찬으로 내주는 뜬금없는 동치미가 쨍하고 시원했다. 식당에서 나와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폐업한 카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피웠다. 춥고 비가 올 때는 차창을 열고 차 안에서 피웠지만 날씨가 풀리면서 벤치에 앉아 피우는 날이 많아졌다. 앞에 작은 실개천 이 흘렀는데 실개천 물을 내려다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소미도 현수도 서로에게 과거를 먼저 물어보는 일은 없었 다. 하지만 자주 만나다 보니 소미는 드문드문 들은 현수의 말을 통해 그동안 현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대충이나마 꿸 수 있었다. 아마 현수도 소미에게 드 문드문 들은 말로 소미의 이력을 대충 꿰었겠지만, 소미는 자기가 현수에게 무슨 얘기를 했고 현수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력을 어떻게 꿰고 있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현수에게 들은 말은 소미의 기억 속에 저 절로 퍼즐이 맞춰져 어떤 형태를 갖추었지만, 자신이 현수에게 한 말은 허공에 산산이 흩어져 그런 파편적인 정보로 현수가 자신의 삶을 상상했다면 그건 매우 허술하거나 왜곡된 것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현수는……. 현수 입장에서는 반대로 생각했을 거라고, 이제야 소미는 생각한다.
아무튼 소미가 들은 바로, 현수는 4학년 1학기 때 학교를 그만두고 현장으로 갔고 거기서 만난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성격이나 버 릇 같은 것은 몰라도, 소미 생각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출신에 대해서는 현 수가 말해주지 않아 학출인지 노동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야말로 아무리 궁금해도 절대 먼저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현수는 언제 쯤인지 소미로서는 알 수 없는 시점에 그 사람과 이혼했고, 딸 둘을 혼자 키우고 있다고 했다. 큰딸이 벌써 대학생이라니 현장에서 만난 사람과는 스물넷이나 다 섯쯤에, 소미가 생각하기에는 다소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겠구나 싶 었다.
현수가 지금까지 두 딸을 무슨 돈으로 어떻게 키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현수는 칠팔 년 전에 이곳 u시로 내려와 여러 일을 전전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 얘기는 제법 자세히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u시 인근에서 활동하는 단체에 소속 되어 친환경 식재료를 급식업체에 납품하는 일을 맡아 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 로 일이 틀어지고 단체도 깨졌다고 했다. 그 후엔 납품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을 통해 웨딩홀이나 연회장의 피로연 음식을 대는 케이터링 업체에서 일했다. 그러다 또 다른 사람의 소개를 받아 잠깐 부동산 중개업소 일을 돕게 되었는데 그 때 우연히 덩치가 큰 계약을 무리 없이 성사시킨 덕에 제법 큰 규모의 중개업소에 스카우트되어 일하다 지금은 독립해서 사무실을, 현수 표현대로라면 ‘작은 복덕방’을 차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한 이삼년 됐나, 이 동네가 이렇게 정신 하나도 없어진 게, 라고 현수는 말했 다. u시를 둘러싼 군과 면 지역의 부동산 업자들이 일하는 걸 보고 현수는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들의 하루 24시간 스케줄이 얼마나 촘촘하게 짜여 있는지 대통령이나 총리라도 그 정도의 살인적인 스케줄은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그런데 하물며 그들은 비서나 보좌진도 없이 그런 일정을 해치운다고 현수는 혀를 내둘렀다. 현수가 독립하기 전에 직원으로 일했던 제법 큰 규모의 중 개업소 사장도 그러해서 현수는 처음에 멋도 모르고 사장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을 뻔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사장이 직원들보다 더 죽기 살기로 일하냐? 내가 살다 살다 그런 건 또 처음 봤으니까. 이건 뭐 계급투쟁의 빌미를 안 주는구나 싶더라고. 그런데 역설 적으로 말이야, 여기 업자들의 혼을 빼놓는 워커홀릭의 원인이 뭐냐 하면, 하고 현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그건 u시 주변에 몰락이 임박했기 때문이라 고, 그런 종류의 불길한 예감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망할 것이다, 조만간. 그런 기운이 가득한 동네거든, 이 동네가. 그런 동네의 무시무시한 열기를 소미 너는 상상도 못할 거라면서 현수는, 그래서 재미가 있다면 있지, 사람들이 막 미치는 게 보이니까, 막 던지고 막 주워먹고, 했다.


그러니까 나도 따라서 막 미치는 거 같고. 나도 돈 있으면 꼭 사고 싶어 죽겠는 땅이 하나 있거든. 그 땅은 어디 소개를 안 시켜. 나만 알고 동네 사람들만 알지. 내가 주인한테 꼭 사겠다고 얘기해놨는데, 아직은 무사하지만 또 모르지. 언제 누가 주워먹을지.
어딘데? 소미가 물었다.
한번 보러 갈래?
가보자.
야, 임소미, 정신 차려, 너도 지금 막 미쳐가는 거야, 하고 현수가 웃었다.

집과 집터는 야트막하지만 드넓은 야산을 배경으로 국도변 길모퉁이에 있었 다. 집은 옛날식 회색 슬레이트 지붕에 울퉁불퉁한 시멘트 벽돌로 지은 건물로 사람이 안 산 지 일 년밖에 안 되었다는데 소미 눈에는 십 년은 되어 보였다. 마당과 건물 주변, 지붕까지 누런 풀과 웃자란 관목들로 둘러싸여 멀리서 보면 쓰 러져가는 초가집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게 장점이지, 그래서 싸니까. 현수가 담뱃 재를 톡톡 떨며 말했다. 얼만데? 그렇게 비싸진 않아. 현수가 한 푼도 깎을 수 없는 정확한 가격을 말해주었다. 집터는 넓은 편이었고 땅의 경계를 표시하듯 커다 란 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다. 도로에 접해 있지만 앞마당이 넓고 집은 뒤로 훌 쩍 물러나 있어 한갓졌다. 소미는 현수가 왜 이 땅을 사고 싶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소미는 현수에게 그 땅을 사자고, 같이 사자고 했다. 현수는 돈이 없는 걸 뭐, 했다. 소미는 진지하게 돈은 일단 자기가 마련해보겠다고, 대신 나중에 반은 무조건 현수에게 팔겠다고, 돈 생기면 원래 가격에 은행 이자만 붙여서 사라고 했다. 이익을 봐도 손해를 봐도 우리가 같이 보는 게 중요하다고도 했다. 어때? 현수는 생각 좀 해보자고 하더니 소미가 전철역에서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는 중에 좋다는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현수는 소유를 공동명의로 하는 것만은 끝까지 사양했다. 자기가 땅값의 반을 내는 날 명의를 공동으로 바꾸자고 했다.
그 후로 소미는 u시에 내려가는 재미가 배가되었다. 그들은 틈만 나면 부동산 사무실 문을 잠그고 그 집에 가서 마당의 풀을 뽑아 길을 내고 집안을 치웠다. 날이 더워졌고 풀은 기승을 부렸다. 6월의 어느 날도 소미는 그 집에 있었다. 현수가 일 보러 가는 길에 소미를 그곳에 내려주고 일 마치고 가는 길에 데려가겠 다고 했다. 소미가 부엌 쪽 잡동사니를 정리하고 문턱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 을 때 막 밭을 매고 오는 중으로 보이는 늙은 여자가 집 앞마당을 가로지르다 말 고 누구냐고, 남의 집에서 뭐 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허락도 없이 남의 앞마당을 가로지르면서 누가 누구보고 그런 소리를 하나 싶었지만 소미는 웃음을 참으며 제가 이 집 주인이에요 했다. 늙은 여자는 놀라서 이 집을 샀느냐고 물었다. 소미가 그렇다고 하자 늙은 여자는 더욱 놀라며, 아니 뒤에 크다란 묘역이 들어설 땅을 왜 하필 지금 샀대요, 했다. 벌써 아랫녘에 가묘 져놓은 것도 숱한데. 묘역 입구라고 매점이나 할라 생각하는가 몰라도 아마 그것도 못 할 거를. 묘역 안에 딱 허가 받은 상가지역이 선다니까.
데리러 온 현수의 차를 타자마자 소미는 그 얘기부터 했다. 현수는 심드렁하게 여기 별말이 다 도는 동네라고, 일단 알아보겠다고 했다. 소미가 말없이 앉아 있 자 현수가 불안하냐고 물었다. 소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현수는 걱정 말라고, 동네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어느 동네 건 묘역 같은 건 그렇게 쉽게 못 들어온다고 했다. 그때 소미의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 에 실려왔고 곧 수술에 들어갈 거라는 엄마의 전화였다. 현수가 소미를 위로하며 기차역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그 후로 소미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두 달 동안 간병에 정신이 없었고 이후엔 장례를 치르고 상속문제를 처리하느라 또 시간을 내지 못했다. 간병 초 기에는 현수와 몇 번 통화도 하고 문자도 주고받았다. 현수는 묘역 얘기는 소문 일 뿐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고, 누가 뒤에서 장난치는 거 같다고 했다. 또 혹시 라도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면 손해 보기 전에 빨리 처분하겠다고 소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현수는 소미의 메시지에 답장을 늦게 하거나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나중엔 아예 전화를 받지 않더니 없는 번호라는 음성 메시지가 떴 다. 소미는 전철과 기차와 택시를 갈아타고 u시로 갔다. 부동산 사무실 문은 잠 겨 있었고 팥죽색 차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 뒤로 십육 년이 흐른 지금까지 소미는 현수를 만난 적이 없다. 그때 그 땅을 사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현수와 만나고 지낼까, 소미는 알 수 없다. 그 일이 아니 었어도 다른 일이 생겼을 수 있고 그 때문에 그들의 관계가 끊겼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었을 거라고, 다시는 못 만나는 식으로는. 다시 만나서는 안 되도록은 아니었을 거라고, 소미는 생각한다.

3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 후 좁은 방 안에 독한 담배 냄새 같은 쑥향이 퍼졌다. 불붙인 쑥뜸이 소미의 배 위에 차례로 올려졌다. 쑥뜸을 뜰 때면 소미는 늘 담배 생각이 났다. 현수를 만나지 않게 되면서 담배를 끊었지만 곧바로는 아니었다. 현수가 사라진 후 소미 혼자 그 집에 갔던 숱한 날들이 있었다. 마당의 푸르던 풀이 시들고 낙엽이 수북수북 쌓여 한층 퇴락해 보이는 집 마루턱에 몇 시간이고 앉아 국도를 지나가는 트럭 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피우던 날들이 있었다. 설령 묘역이 선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소미는 생각했다. 그건 사람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현수의 탓도 자신의 탓도 아니었 다. 그런데 현수는 소미를 혼자 이 폐가에 남겨두고 사라졌다. 아무리 주변 시세 에 비해 싸다고는 해도 소미로서는 엄청난 돈을 긁어모아 모험을 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미는 자신이 미쳤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미치게 된 시점은 과연 언제일까, 소미는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페북에 서 여자 집사의 부동산 경매 글을 읽으면서부터? 현수를 만나면서부터? 현수를 보러 매일 u시로 와서 함께 만둣국을 먹던 그때? 담배를 피우며 가끔 미치게 좋 아서 울고 싶던 그때? 현수에게 땅 얘기를 듣고 보러 가자고 한 그때? 땅을 사자 고 결심한 그때? 아니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그때?
쑥뜸이 타들어가면서 뱃속을 데우는 온기가 자극적이면서 감미롭게 퍼져나갔 다. 혹시 내가 미쳤다면 아마……. 아마……. 그 땅을 처음 본 순간이겠지, 하고 소미는 미소를 지었다. 나도 보는 눈은 있었으니까.
잠깐 미쳤던 대가는 혹독했다. 소미는 그 땅을 살 때 모아놓은 현금 전부에 적지 않은 빚을 얻어 보탰다. 아버지가 죽고 물려받은 유산으로 일부 빚은 갚았지 만 여전히 엄청난 원금과 이자 부담이 있었다. 남편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느라 소미는 안간힘을 썼다. 다행히 그들에겐 자식이 없었고 큰돈이 들지 않아 겨우겨우 빚을 갚아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악착을 떨며 십 년 이상을 버텨낸 자신이 소미는 장하고 기특했다. 돌아보면 충분히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소미가 남편에게 땅의 존재를 알린 날 남편은 당장 연차를 내고 그 땅을 보러 가자고 했다. 그들 부부는 차를 몰고 u시로 가서 땅을 둘러보고 부동산에 들렀다. 묘역이요? 묘역은 무슨 묘역? 아, 옛날에 잠깐 그런 얘기가 있었나 본데 동네 사람들이 그걸 두고 보나? 그렇게 반대를 하는데 어떻게 묘역이 들어와? 묘역은 커녕 소미의 집 뒤편 야산에는 펜션 빌리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u시 기차역 근처에 전문대학이 옮겨왔고 소미의 집 근처에 있는 리조트에서 커다란 워터파크 를 짓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주말이면 u시로 가서 이 땅에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심하다, 어엿이 ‘샘골식당’이라는 간판을 만들어 달은 식당에서 만둣국을 먹고 돌아왔다. 남편이 앞당겨 명퇴를 하고 명퇴금에 담보대출을 보태 건물을 지었다. 지은 후에 임대보증금을 받아 대출금을 갚고 건물이나 임대료 관리는 남편이 맡아 했다.
언뜻 소미는 오늘이 건물 일층 편의점에서 세가 들어오는 날인가 생각했다. 그럼 남편은 u시에 갔을지도 모른다. 편의점 주인이 내내 우는소리를 하더니 지난 달엔 말도 없이 세를 반밖에 넣지 않았다고 했다. 유흥지에는 언제나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다. 곧 봄이 오고 코앞에 있는 리조트의 워터파크가 개장하면……. 그러다 소미는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언젠가 한번 소미는 그 땅을 싸게라도 팔아넘기려고 한 적이 있었다. 묘지로 둘러친 땅을 붙들고 있으면 뭐 하나, 던져버리자 싶어 충동적으로 땅을 부동산 에 내놓았다. 업자 말로는 산 값의 반도 받기 어려울 거라고 했지만 소미는 팔아 달라고 했다. 얼마 뒤 업자가 연락을 해서 마침 사겠다는 외지인이 나섰다고, 손 해를 보더라도 이 기회에 처분하는 게 좋을 거라고 부추겼다. 소미는 매매계약을 하러 전철을 타고 기차를 타고 u시 역으로 갔다. 시간이 일렀고 배도 고파서 소 미는 택시를 잡아타고 만둣국을 파는 식당에 갔다.
그날의 기억도 소미에겐 현수를 처음 만난 날의 기억만큼이나 선명했다. 만둣 국을 시키고 옆자리를 보니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 남자가 동치미 국물을 떠먹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오오 소리를 냈다. 오빠 맛있지, 여자가 물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여자는 숟가락 두 개를 이용해 자신의 그릇 에서 큼직한 만두를 조심스럽게 건져 앞접시에 놓았다. 그렇게 세 알을 덜어놓고 나서 남자의 그릇에서 만두 한 알을 꺼내 세 알 위에 얹었다. 남자가 하나 더 가 져가, 했지만 여자는 아냐아냐, 했다. 만두 네 알을 따로 건져놓고서야 여자는 숟 가락으로 그릇 속의 만두를 조금씩 잘라먹기 시작했다. 남자는 숟가락으로 만두 를 마구 터뜨려 국물과 함께 떠먹으며 헉헉 뜨거운 김을 내뿜었고 동치미를 그릇 째 들고 마셨다. 중간에 여자가 일어나 동치미를 더 떠왔고 잠시 뒤에 직원을 불 러 아기 같은 목소리로 여기요, 밥 한 공기만 주세요, 했다. 남자가 뭐라고 웅얼거 리자 여자가 몸을 돌려 직원에게, 두 공기 주세요, 하더니 국물이 너무 맛있어서요, 하며 힐끗 소미 쪽을 보았다.
문이 열리고 늙수그레한 남자가 들어와 소미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다. 소미가 주문한 만둣국이 나왔다. 소미는 알이 굵은 만두를 앞접시에 덜어 꺼먹었다. 고 개를 숙이고 먹는 내내 늙은 남자의 눈길이 느껴졌다. 드디어 늙은 남자의 만둣 국도 나왔다. 남자는 먹으려다 말고 어이, 여기 밥 한 그릇, 하고 소리쳤다. 직원 은 잠시 머뭇거리며 주방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밥이 없는데요 했다. 남자가 밥, 밥이 없다고, 하고 묻자 직원이 그렇다고, 밥이 다 떨어졌다고 했다. 남자는 밥이 다 떨어졌다고, 하고 직원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문하더니, 아이고 이렇게 장사를 했다가는 말이지, 동네 장사를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말이지, 하며 혀를 찼고 직원은 막 밥이 다 나가서, 하고 말을 흐렸다. 늙은 남자는 만둣국을 먹는 내내 내가 이 동네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데 말이지, 하고 웅얼웅얼 거리거나 에잇, 어어, 킁 하는 소리를 냈다. 옆자리의 젊은 남녀는 못 들은 척 국물에 만 밥을 먹 고 있었지만 늙은 남자의 밥을 가로챈 죄책감에 겁에 질린 듯 보였다. 소미는 만 두를 먹으며 오후에 거래만 성사되면 다시는 이 동네에도, 이 식당에도 올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잠시 뒤 젊은 여자가 직원에게 혹시 비닐봉지 좀 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고 직 원이 비닐봉지를 가져다 주자 남자에게 오빠, 두 개나 주셨어, 하고 앞접시에 덜 어둔 만두를 비닐에 넣고 동여매더니 또 하나의 비닐에 넣었다. 젊은 남자가 마지 막으로 동치미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시고 입을 오물오물하더니 자리에서 일어 났다. 고개를 돌리니 늙은 남자도 그릇을 들어 만둣국 국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날 본 것들은 소미의 기억 속에서 처음 현수와 식당에 갔던 날 본 것들과 자주 겹쳐졌다. 만두 네 알이 든 봉지를 들고나가던 젊은 연인들을 본 게 시간 상 훨씬 이후인데도 마치 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처음 현수와 식당에 갔던 날 본 젊은 부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동치미 국물을 떠먹고 오오 소리를 내던 남자가 너는 넌 응 그래서 응 하며 짜증스럽게 말을 반복하는 남편 이 되고, 숟가락 두 개로 조심스레 만두를 건져내던 여자가 벙어리처럼 말 한마 디 없이 허리를 구부리고 바닥에 쏟아진 음식물을 손으로 쓸어 담는 아내가 된 것 같았다. 소미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진저리를 쳤다. 저 가여운 부부도 미쳐가 는 중이라던 현수의 말이 떠올랐다.

그날 소미는 매매 계약서를 쓰지 못했다. 아니, 쓰지 않았다. 부동산에 가보니 단편소설 129 중개사가 외지인이라고 소개한 매입자가 식당에서 만둣국을 먹던 늙은 남자였 다. 그 늙은이를 보는 순간 소미는 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u시의 사람들이 무서웠다. 현수도, 땅을 판 노인도, 막 밭을 매고 오는 중으로 보이던 늙은 여자도, 땅을 사겠다고 나온 늙은 남자도, 그를 외지인이라고 속인 중개업자도 모두 미친 사기꾼들 같았다. 소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땅을 팔지 않겠다고, 거두어들이겠다고 말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그 돈 없어도 안 죽는다고, 죽지는 않는 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두렵고 또 두려웠다.

4
쑥뜸이 끝나고 네일 관리사가 들어와 어떻게 해드릴까요 물었다. 소미는 손톱 에 영양관리 외엔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언젠가 네일 관리사의 새로 온 조수 아 가씨가, 어머 왜 아트를 안 받으세요, 아트 하세요, 하시면 너무 예쁘실 손이신 데, 손톱도 갸름하시고 어쩌고 하며 호들갑을 떨어 소미가, 나 손톱에 장난치는 거 안 좋아해요, 했더니 아가씨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던 일이 있다. 좀 매몰차 보이더라도 말하기 좋아하고 반복해서 뭔가를 권하는 사람에겐 다시는 말을 하 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게 소미의 방식이었다.
소미는 회원 전용 통로를 거쳐 사우나로 갔다. 가운을 벗고 가벼운 샤워를 하 고 칸막이로 나뉜 세신룸의 침대 위에 올라가 누웠다. 때를 다 밀고 나면 피부관 리사가 들어와 소미에게 오늘 어떻게 해드릴지를 물을 것이다. 전신, 하면 전신 마사지를 받을 수 있고 부분만 원하면 필요한 부분을 말하면 되었다. 소미는 늘 그렇듯이, 얼굴과 목, 손만 집중 관리를 해달라고 할 것이다. 소미는 머리카락에 도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생머리에 단발이었고 화장도 햇빛 차단제가 함 유된 비비크림만 옅게 바르는 정도였다. 헤어숍에서도 뷰티숍에서도 이제 그걸 놓고 뭐라고 딴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편은 u시에 갔을까. 갔다면 돌아와서 오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은퇴한 친구나 동료 들을 만나 산행을 하거나 골프를 치겠지. 남편은 가끔 낚시터에도 가고 주말에는 경마장에도 가는 것 같았다. 소미는 남편의 일정에 대해 대충 알고 있는 것 이상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u시의 땅을 알게 된 후로 남편은 소미를 달리 보았고 매우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들 부부는 한 집에 살면서 함께 잠들고 함께 일어났다. 그리고 함께 쇼핑몰 후문 에 도착하면 되었다. 이 기본적인 일상의 틀만 깨지 않는다면 나머지 시간에 각 자 무얼 하든 용납되었다. 무얼 하든이라니, 소미는 헛웃음을 웃었다. 도대체 자 신이 이제 와서 용납되지 않는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룻밤의 섹스, 잠깐의 외도, 당분간의 밀애. 용납되지 않을 어떤 것도 소미는 하지 못할 것이다. 할 기 력도 의지도 없었다.

오래전, 그러니까 십육 년 전쯤에 소미의 남편은 아내에게 뭔가 좀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내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아내가 큰 사고를 치거나 일상의 틀을 깬 것은 아니 었기에 무어라 꼬집어 물어볼 수는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챙겨 먹는 한약을 먹 지 않아서 냉장고를 열어보면 한약을 넣어두는 칸이 텅 비어 있는가 하면, 저녁 늦게 집에 들어왔을 때 강박적일 정도로 결벽이 있는 아내가 옷은커녕 양말도 벗지 않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외도는 아닐 거라고 남편은 확신했다. 남녀 공히 외도하는 배우자는 필사적으로 아무런 티도 내지 않으려 조심하는 법 인데 이렇게 대놓고 광고하듯 변화를 과시할 리가 없었다.
한 달 이상 고민하고 지켜보던 남편은 지나가는 말로 슬쩍 요즘 누구 만나는 사람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소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요즘 매일 현수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남편은 어리둥절하여 현수라니, 현수라면 남자……. 하고 물으려다 언젠가 한번 지금과 똑같은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 때 자신이 현수라면 남자, 하고 묻자 아내가, 아니, 여자, 하더니, 난 몰랐는데 현수라는 이름이 남자처럼도 들리는구나, 했던 것까지. 그래서 남편은 가까스로, 아, 현수라면……. 동기라고 했지, 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소미는 내가 현수 만났다는 얘기했을 텐데, 현수가 형편이 어려워서 시간을 낼 수 없으니까 내가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응, 들은 것도 같다, 하고 남편은 대화를 끝내려 했다. 여기까지만 얘기하고 마는 게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건 알았 지만 그러나 남편은 끝내 궁금한 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현수, 그 친구를 만 나러 어디로 가는데? 소미는 아무렇지 않게 u시라고 했다. 남편은 깜짝 놀랐고,아니, u시를, 거기가 어딘데, 매일 어떻게 거길 간단 말이야, 당신은 운전도 못하잖아, 했다. 그러자 아내는 원망하듯이, 운전을 왜 못해요, 차가 없어 그렇지, 하더니 기차를 타고 간다고 했다.
기차를 탄다고? 남편은 믿을 수 없어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당신이 그 약해빠진 몸으로 혼자서 u시까지 매일 기차를 타고 간다고?
소미는 그렇다고, 혼자서, 매일, 기차 타고, 소풍 가듯이, 하더니 남편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편은 속으로 소풍이라니 이 여자 참 철없는 소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아내는 처음에 누구 만나는 사람 있느냐고 물었을 때처럼 갑자기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아내는 현수인지 뭔지 하는 친구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웃고 끝낼 때도 웃은 것인데 남편으로서는 아내가 이렇게 잘 웃는 여자였던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수와 웃음, 이 조합은 한동안 남 편 뇌리에 납득하기 어려운 모양으로 깊이 박혀 있었는데, u시에 있는 땅의 존재 를 안 뒤부터는, u시와 웃음, 이라는 새로운 조합으로 간단히 교체되었다. 이번에는 참으로 납득이 되는 조합이었다.

소미가 매일 u시에 현수를 만나러 가던 때, 현수가 소미에게 화장실에서 휴지를 얼마만큼 쓰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뭐? 휴지?
이를테면 하루 평균 잡아서. 여자들이 하루에 얼마만큼 휴지를 쓰는 게 평균 적일까?
그걸 어떻게 알아?
알 방도가 없을까, 도저히?
현수는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내가 왜 이혼했냐면 아무래도 휴지 때문인 거 같아서, 했다. 어느 날 갑자기 현수의 남편이 현수에게 휴지를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현수는 처음에는 그런가, 하다가, 아니, 여자들은 원래 남자들보다 휴지를 많이 쓴다고 대꾸했다. 그러자 남편은 현수가 남자들보다 많이 쓰는 정도가 아니라 여자들 평균보다 더 많이 쓰는 것 같다고 말했고 현수는 절대 자신이 여자들 평균보다 많이 쓰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남편은 기가 막힌 얼굴로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 이게, 증명 이러니까, 내가 너무 어이가 없잖아, 하고 현수는 담배를 빨았다. 그래서 확인을 해보자고 했지.
확인을 해보자고, 다른 여자들은 하루에 휴지를 얼마나 쓰는지 물어보자고, 현수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자 남편은 그만두라고, 다 관두자고, 자신은 현수의 주장의 진위, 그러니까 현수가 여자들 평균보다 휴지를 더 쓰는지 어떤 지 하는 것보다 그 고집스런 확신, 현수 자신이 절대 여자들 평균보다 휴지를 많 이 쓰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그 방식이 지긋지긋했던 거라고, 그러니 다른 여자가 하루에 휴지를 얼마나 쓰는지 그런 건 자기로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그때 현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가슴 이 쪼개질 것 같은 통증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 후로도 몇 번 그런 유 치한 다툼이 있었고 그렇게 몇 년을 더 살았지만 현수는 그때 그 휴지 논쟁이 이 혼의 원인이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고 했다. 아무리 우리가 가난했어도 휴지를, 내가 또 뽑아 쓰는 비싼 휴지였으면 말도 안 해, 두루마리 그거를 못 쓸 정도로 그렇게 가난했던 건 아니거든, 하고 현수가 말한 순간 소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웃기냐?
아, 웃겨. 죽을 만큼 웃겨 현수야.
뭐가?
그냥 휴지가……. 두루마리 휴지가…….
소미는 웃느라 말을 못했고 그걸 본 현수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담배를 든 채 미친 여자들처럼 몸을 비틀며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었다.


소미는 가끔 현수와 함께 식당에서 만둣국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차를 세우 고 담배를 피우던 그곳, 비와 햇빛을 가리려고 쳐놓은 청백 스트라이프 무늬 천 막이 누렇게 바래고 테라스를 두른 철제 난간에 붉게 녹이 슬어 있던 폐업한 카 페를 생각했다. 그 어떤 시간보다 소미는 거기서 실개천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 우던 그 시간이 좋았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두렵고 또 두려웠지. 현수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가끔 그 말이 떨쳐지지 않는 주문처 럼 소미의 머릿속을 맴돈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현수가 말한 그때는 그때 가 아니었지만, 소미가 현수를 다시 만났던 그때가 그래도 그들이 마지막으로 젊 었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이제 소미는 안다. 그래서 여전히 두렵고 또 두려웠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많이 웃고 담배를 피워대고 땅을 사고 했다는 것을.
이제 그들 부부는 죽을 때까지 아무 두려움 없이 살 것이다. 하지만 소미는 가 끔 가벼운 흥분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만약 현수가 찾아온다면? 그래서 약속한 대로 십육 년 전에 샀던 땅값의 반을 내겠다고 한다면? 그러니 자기 에게 땅의 반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신은 선뜻 그렇게 할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소미는 마음속으로 발끈한다. 그러려면 그때 너는 빈말로라도 손해의 반을 책임지겠다고 했어야 했어. 내 곁에서 나와 함께 두려움을 이겨냈어 야 했어.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비열하게 도망쳤지. 손해를 전적으로 나한테 덮어 씌워놓고,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불안과 고독 속에 남겨놓고 넌 잠적해버렸지. 그 러니 그 땅의 모든 권리는 그걸 홀로 지켜낸 자신의 몫이라고, 소미는 침착하게 결론을 내린다. 그렇고말고.
세월이 많이 흘렀고, 현수와 연락할 방법을 찾자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 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현수가 그 땅의 현재 가치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 까. 안다면 자기의 혜안이 맞았다고 기뻐하기만 하고 끝낼까. 사람은 절대 그렇게 말갛지 않다. 또 현수가 얼마나 거칠게 변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때 마흔다섯 살의 현수도 소미의 상상과는 너무도 달랐지 않은가.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인문대 깃발을 흔들며 행진하던 늘씬한 아가씨가 이혼하고 혼자 딸 둘을 키우는 뚱뚱한 중년 여자가 되어 피곤에 절은 모습으로 부동산 사무실에 앉아 있지 않았던가.

5
소미의 벗은 몸 위에 따뜻한 물이 뿌려졌다. 세신사가 돌아누우라는 뜻으로 톡톡 치며 사모님 어쩌고 말을 시켰다. 물소리 때문에 알아듣지 못한 소미가 뭐요, 하고 묻자 세신사가 아니에요, 했다. 소미가 뭔데요, 한 번 더 묻자 세신사가 참 때가 없으시다고요, 했다.
이렇게 때가 없는 분은 처음 봐요.
소미는 아, 그래요, 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세신사는 칭찬으로 한 말이겠지 만 때가 없는 게 좋은 건지 아닌지 소미는 알 수 없었다. 문득 세신사에게 당신은 하루에 두루마리 휴지를 얼마나 쓰느냐고 묻고 싶었다. 물론 소미는 묻지 않 았다. 소미는 벌거벗은 채 세신용 침대에 모로 누워 웃음인지 눈물인지를 참느라 신생아처럼 눈을 꾹 감고 입을 앙다물었다. 소미는 외로웠고 앞으로 자신이 더 외로워질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