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서시序詩

“내 소설의 장점은 시간을 모험적으로 다루는 것”

「운수 좋은 날」 줄거리 ①죽은 아내와 하룻밤 ②그날의 심증 ③치삼과 소년 ④개똥만 한 사람이 ⑤운수 좋은 날 ⑥휴가

문학교과서와 친일문제, 그 해결점을 찾아서

악당을 구분하는 능력

“신문물의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가 내 실학정신의 핵심”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여원』 편집장 시절의 좌담회

파도그림, 여름에 즐기는 한기(寒氣)

11미터

운동장에서 펼쳐진 상상의 공동체

①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②향학열, 반골정신 그리고 북청사람 ③가난과 고독을 동반 삼은 시조의 길

①적당한 사람,정적이 흐른다 ②말을 잇지 못하는,빛은 어둠의 속도

무구

①예술가의 독창성 ②하쿠나 마타타 ③빽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머리 위로 은총

한 권의 책이 작품 세계의 원형이 되기까지

아시아 시인들이 함께 만든 계간 『시평』의 마지막 가을

뒤죽박죽 나의 데뷔작들

허블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시는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는가

허무맹랑한 공상? 지금 여기, 가장 핍진한 상상력 ‘SF’

논어와 탈무드

20세기 초 프랑스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

시어의 미묘한 의미들 사이에서 주석의 역할을 생각하다

등장인물들이 일본어로 말하게 하는 작업의 즐거움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등

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유령작가 X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머리 위로 은총

편집자 주 ㅣ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창작과 감상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필자에게 복면을 씌운다. 유령작가의 정보는 작가의 희망 여부에 따라 다음 호에 공개한다.

브리핑을 하는 최 팀장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감기라도 걸렸나, 안색을 살펴보니 생각만큼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눈곱도 없고 충혈도 안 되었고 음, 코도 촉촉한 편이고. 아차 그녀는 개가 아니다. 매일매일 보는 게 열세 살짜리 포메라니 안이다 보니. 그러다 그녀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굴러 나올 듯한 커다랗고 둥근 두 눈이 묻고 있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브리핑이 끝나고 팀원들이 그녀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도 한마디 했다. 모른 체 할 수는 없으니까. “감기라고 우습게 봤단 큰코다쳐요, 우리 나이쯤 되면.” 말을 다 뱉기도 전에 후회가 몰려왔다. 나이 이야기는 왜 꺼내나, 하여간 이놈의 입, 입. 팀장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기도했어요.”
“예?”
“기도했다구요. 어젯밤 두 시간.”

아하, 통성 기도했구나. 그래서 이렇게 목이 쉬었구나. 역시 감기가 아니었구나. 고개를 깊게 주억거리다가 놀라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팀장이 교인이었 나? 교인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모태 신앙인 내가 못 알아챌 정도면 진짜 교인 이 아닌 건데. 식사 전 기도도 빼먹고. 아무 때나 주여, 찾지도 않고. 무엇보다 무 교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신입에게 전도도 하지 않았잖았는가.
자신의 신앙을 내세우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다만 통성 기도라는 것이 앞뒤 안 맞는 것 같기는 하지만, 대체 어느 교회이길래 성서 속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 지키 고 있는 것일까. 하마터면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을 뻔했는데 그녀가 내 마음 을 읽은 듯 말했다.

“교회에 다니는 건 아녜요.”
“예에?”

이번에도 나는 얼치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뻔했다. 교회에 다니지도 않으 면서 통성기도를 한다? 그럼 친구의 전도에 못 이기는 척 기도원에라도 다녀온 걸 까? 소리내 기도하고 울고 누군가는 가슴을 쥐어뜯고, 어리둥절한 채로 앉아 있다 가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치솟아 오르면서 기도가 터졌다?
“이거 완전 사이코네, 생각하고 있죠? 내가 생각해도 그런데, 뭘. 그런데 그걸 뭐 라고 해야 하나……” 살짝 고개를 틀고 뭔가 적합한 단어를 떠올리려는 표정이 되 었다. 골몰한 표정을 짓느라 중앙으로 몰리는 그녀의 이목구비를 보고 있는 와중 에도 딸려오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이마가 신경 쓰였고, 아 필러 맞았구나, 생각하 면서 나는 내가 생각보다 훨씬 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다는 걸 새삼 확인 했다.
보직 박탈에 자숙 기간을 거친 뒤 평사원 자격으로 최 팀장의 팀에 배치된 게 석 달 전이었다. 이삼 년 주기로 팀이 바뀌는데 삼십 년 가까운 재직 기간 중 한 번 도 그녀와 한 팀인 적이 없었다. 친한 동료들 대부분이 그녀와 한 번 이상 팀이었다 는 걸 감안하면 그녀와 단 한 번도 팀이 아니었다는 게 더 이상했다.
출산과 육아로 거의 다 퇴사하고 남은 동기 여직원은 몇 되지 않았다. 만나 이야 기를 나누지는 않았어도 이름 정도는 다 알고 가끔 이랬다저랬다 소문도 들려오는 데, 최 팀장만큼은 소문도 없었다.
팀에 합류하기 전 그래도 함께 일할 팀장에 대해 좀 알고는 가야겠다는 생각으 로 동료인 김에게 전화했다. 또래보다 승진이 빨라 팀장도 제일 먼저 달았고 그녀 가 맡은 팀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는데 전화를 끊고 나니 이건 순전히 동료 김이 나 들으라고 한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괜히 자격 지심만 커졌다.
“팀의 화합을 위해서였어요. 마지막까지 무사하도록.”

나는 귀를 의심했다. 팀의 화합을 위한 기도라니, 이건 뭐 시국을 위한 기도와 비슷한 성격의 기도인가? 석 달 함께한 바로는 별 문제가 없는 팀이었다. 돌출행동이나 거짓말을 하는 등 눈에 띄는 팀원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둘 때문인가. 나와 그리고……

“김 팀장! 김 팀장!”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홍이었다. 일언반구도 없이 브리핑 시간에 빠지고 뒤늦게 나타나 팀장인 최는 알은척도 하지 않고. 무엇보다 이젠 팀장도 아닌 나를 김 팀장 김 팀장 막 불러대고 있었다.

홍은 나보다 넉 달 먼저 이 팀에 합류했다. 최 팀장의 어제 기도는 분명 우리 두 사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홍은 물론 나까지 합류하게 되자 팀내에서 우리 팀이 문제아들의 집합소인 거냐는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홍에게 한 팔이 붙들려 사무실 밖으로 나가면서 생각했다. 이건 순전히 최 팀장의 기도 덕분이다, 그녀가 맡은 팀이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던 건 모두 다 그녀의 기도발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녀나 나나 미혼이니 아이들을 위한 기도도 아니고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그럼 그녀가 두 시간 동안이나 목이 쉬도록 간절하게 기도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 그녀가 살짝 낯을 붉혔다.

월요일 오전 스타벅스는 좀 한산했다. 공부도 안 할 거면서 왜 카페 안쪽의 ‘카 공족’ 자리로 들어가나 했더니 자리에 앉자마자 홍 팀장이 백팩을 열고 노트북을 꺼내 켰다. 낡은 노트북이라 부팅이 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는 더 이상 참 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뭐 마실래요?”
“아메리카노죠.”
“핫? 아이스?”
“핫이죠.”

다 알면서 뭘 묻느냐는 듯한 표정의 홍을 내려다보다 주문대로 갔다. 적어도 용건이 있는 사람이 커피 정도는 사야 하는 거 아닌가 투덜대면서 뜨거운 아메리카
노 두 잔을 시켰다.

주말 동안 익명 게시판에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홍과 나는 지난 금요일 저녁에 글 하나를 올렸다. 선배로서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가 잡아온 초안을 내가 다듬었다.
흥분을 잘하는 성격은 글에도 그대로 드러나서 한 문장이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않았다. 나중에는 주어를 찾을 수도 없었다. 일단 문장을 짧게 쳤다. 지금 젊은 직 원들은 잘 알지 못하는 ‘강경대’ 열사에 관한 이야기는 빼자고 했다. 같은 학생으로 강경대가 죽어갈 때 명동에서 내가 한 짓을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내가 한심해지 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홍은 강경대를 모르는 사람이 있더라도 자신은 꼭 그의 이 름을 넣어야겠다고 고집했다. 강경대로 시작한 글은 홍의 반성문이 되었다.

나는 강경대가 죽어갈 때 일신의 안위를 위해 대기업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뒤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회사가 시키는 대로 만 일을 해왔다, 이삼 년 주기로 바뀌는 팀 제도와 팀원들 스스로를 감시하도록 만 드는 평가제 등 사측의 교묘한 이간질에 대해 의심할 줄 몰랐다, 아니 알고도 모른 척했다…….
익명이지만 누가 봐도 홍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글이었다. 익명의 댓글 중에는 눈 물이 났다는 글도 있고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글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회사에 있는 노조는 노조가 아니고 뭐냐는 순진한 질문도 올라와 있었다. 홍이 댓글 중 하나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이런 직장이면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닙니까? 청년실업 률이 최악이라는 이때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것 자체로 행복한 거 아닙니까?
“이건 분명 사측입니다.”
“그게 아닐 수도 있어요, 홍 팀장. 지금 직장이 있는 게 어디냐고 생각하는 사람 들이 의외로 많아요.”
나도 그렇구요,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홍도 더는 팀장이 아니 었다. 잦은 조퇴와 무단결근을 원인으로 들었지만 노조를 결성하려 한 점으로 사 측 눈 밖에 났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로 봐서 직원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 지만 몇이나 익명의 밖으로 나올 것인가. 선배들 몇이 얼굴을 드러내고 독려한다고 해도 한쪽에서 자신들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아 저럴 수 있다는 불평이 터져 나올 수도 있었다.
작년 내게 일어난 일은 간부들에게도 보고되었는데 인사팀장의 귀띔에 의하면 간부 중 누군가가 내 이름을 보고 거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구먼, 이라고 했다는 거였다. 그러니 내 이름이 눈에 띄는 족족 탈락될 건 뻔했다. 더 이 상 사측에 잘 보이려 하지 않을 테고 그동안의 경력이나 투쟁(?)의 역사로 볼 때 나 만큼 노조에 적합한 인물이 없다는 게 홍의 생각이었다. 그날 홍의 전화를 받는 게 아닌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사람의 입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 없이 죽은 듯 정년을 맞자는 계획은 진작에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런데 아직까지 조용한 게 이상하지 않아요?”
홍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왜 그런지 알아요?”
“왜요? 김 팀장은 알아요? 설마 때를 노리고 있는 걸까요?”
“아뇨, 이게 다 누군가의 기도 때문입니다. 간절한 기도 때문입니다.”
이 마당에 웬 기도냐는 듯 홍의 양미간에 세로주름이 잡혔다.

* * *

어제도 기도를 한 것일까, 최 팀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다. 저러다가 득음하는 거 아냐, 속으로 빈정대고 있는데 그녀가 별안간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식사 때가 지난 구내식당에는 우리뿐이었다.
“구약을 읽고 있잖아요. 읽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읽었어요?”
팀장의 표정을 보니 어느 구절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속삭이듯 말했다.
"음, 롯과 두 딸 말씀하시는구나?”
“역시, 교인이시구나, 김 팀장.”
내 어디에서 교인 티가 나는 걸까. 교인도 아닌 최 팀장이 알아챌 만큼.
“에이, 밥 먹기 전 꼭 기도하면서.”
“내가요? 언제요?”
“조금 전에도요. 두 손을 모으지는 않지만, 밥을 앞에 두고 오륙 초 가만히요, 기도하는 것처럼요.”
그러고 보니 한 손에 함께 쥐고 있던 수저를 각각의 손에 나눠들고 손을 모으려다 멈춘 것도 같았다. 최 팀장이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도 솔직하잖아요?”
"누구요? 나요?"
"아뇨, 성경."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다니, 정말 나와는 반대구나 싶었다. 얼마 전에는 동네의 교회에 들어가 몰래 목사님의 강독도 들었다고. 그러면서도 앞으로도 교회에 등록할 마음은 절대 없다고 했다.

 

입사한 지 십 년이 다 되던 해였다. 야근을 마친 그녀는 밤늦게 회사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깨어 있으려 했는데 자꾸 잠이 쏟아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귀가 찢어 질 듯한 굉음과 몸이 뒤틀리는 충격에 잠에서 깼다. 어딘지 모르지만 통증이 느껴졌다. 뜨끈한 것이 흘러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데 눈앞에서 희미하게나마 달랑거리고 있던 것을 보았다고, 그게 바로 그 그림이었다고.
“왜 있잖아요, 우리 어릴 적 흔히 보았던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
그제야 기억이 났다. 동기 하나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 그 직원이 바로 최 팀장이었구나. 그때 위로금이라고 십시일반 돈도 모았는데.
한참 뒤에 퇴원해 돌아왔지만 집에는 그녀를 반겨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집에서 그녀는 활동보조기를 밀며 다녔다.
“어느 날 문득 그 그림이 떠올랐어요.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가 적혀 있던. 혹시 그 소녀의 기도가,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이 나를 구했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는데 그 소녀처럼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죠.”
그게 그녀의 첫 기도였다.


때를 놓쳐 배가 고프다고 했으면서 최 팀장은 식사에 별로 손도 대지 않았다. 가만히 식탁 아래 작은 자신의 두 발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나를 다시 빤히 보았다. 왜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라고 묻듯 나도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런데 둘이 무슨 말 했어요?”
한 번에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또 그러신다, 라는 듯 최 팀장의 입가가 샐쭉해졌다.
“홍 팀장요, 홍 팀장과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냐고요, 맨날 둘이 붙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요.”
팀에 홍이 있으니 팀장으로서 불안한 것도 당연했다. 팀원들에게 괜한 바람만 불어넣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그거라면 걱정 말아요. 팀이 깨지게는 안 할 테니, 아니 팀이 깨질 일은 없죠. 팀장님이 이렇게 기도하시는 팀을. 어떻게요, 미력한 우리가.”
“우리가?”
그녀가 내 말을 따라 했다.
“김 팀장, 참 이상해요. 난 다 이야기했는데, 비밀도 다 이야기하는데, 김 팀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한테 거짓말만 하네?”

설마 홍 팀장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 그래서 나와 홍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걸까?
“휴게실에서 스타벅스에서 틈만 나면 둘이 머리를 맞대고,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요.”
음성변조기를 통한 듯이 늘어진 목소리가 웅얼웅얼 집요하게 내게 물었다.
머리를 맞대고? 홍과 게시판에 올릴 글을 쓰고 수정하는 걸 본 건가? 홍이라는게 너무 티 나지만 그렇다고 익명으로 썼는데, 그 글을 썼다고 이실직고할 수는 없고.
“왜 솔직하지 못하지? 교회도 다니면서. 얼마나 흉측한 이야기길래 숨기는 거지?”
뭔가 둘러댈 이야기를 찾고 있는데 최 팀장의 말이 빨라졌다.
“내 이야기했죠? 이러쿵저러쿵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랬네 저랬네. 둘이서 껌을 씹듯, 남의 이야기를, 하나도 모르면서 나에게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만 빼놓고, 지들끼리. 단물이 빠질 때까지 씹어대겠지. 나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모르는 사람들이, 남의 불행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나는 얼른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그 동작 어디에서 놀란 걸까, 최 팀장이 어깨를 움찔했다. 역시 최 팀장도 다르지 않았다. 팀워크를 위해 힘써야 할 팀장이 팀
원을 따돌리고 그것도 모자라 폭력을 행사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나는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하지 않았다. 작은 액자 속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딸랑거렸다. 아버지의 차에도 그 그림이 달려 있었다. 아버지의 택시가 골목을 빠져나갈때면 어머니는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오늘도 무사히.” 국적을 알 수 없는 검은 머리의 소녀는 질기고 무늬 없는 소박한 원피스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 위로 팽팽하게 당겨진 최 팀장의 얼굴이 덧씌워질 때 나는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 * *

홍은 누군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동선을 CCTV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냐는 거였다. 누군가 인사팀장의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를 보았는데 마침 거기 홍에 관한 자료가 펼쳐져 있더라고. 홍이 기분 나빴던 건 서류의 하단에 씐 ‘이상 없음’이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그러니까 SNS를 좀 끊으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의 계정으로 들어 가면 그가 하루 종일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났는지 다 알 수 있었다.
식당에서의 일 이후로 최 팀장과 더 이상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다만 문득문득 스치듯 듣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 있었고 어떤 날은 감기 라도 걸린 듯 얼굴이 붉게 부어 있기도 했다.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 다는 것만 짐작했다.
최 팀장의 기도 덕분인지 팀은 별 탈없이 마무리되었다. 새로운 팀의 배정을 기 다리고 있다가 인사팀으로 다시 불려갔는데, 인사팀장이 건넨 평가서를 통해 최 팀 장의 나에 대한 평가를 알 수 있었다. 문장은 간결하고 냉혹했다. 예전 나와 팀원 의 불화에 대해 언급하는 글의 마지막에는 ‘한마디로 팀장으로서의 자질 부족 재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최 팀장 밑으로 간 거 같아요?”
홍이 물었다. 홍에 대한 서류를 작성한 사람이 최 팀장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어느 팀으로 배속될지도 알 수 없었다. 홍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이번에도 나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아메리카노, 핫?”

어둠 속에서 흰 털 뭉치가 힘겹게 일어서려는 게 보였다. 이제 밀크는 짖지도 못했다. 오랜만에 홍과 명동으로 가서 전과 막걸리를 마시느라 귀가가 늦었다.

“밀크야, 오지 마. 거기 있어.” 그런데도 밀크는 자꾸 눕혀지는 남은 한 발을 들어올려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냥 있으라니까!” 나는 뛰어가서 밀크를 끌어안았다. 듬성듬성 털이 빠져 분홍살이 드러나고 앙상했다. 눈은 충혈되고 눈곱은 끼고, 코는 바싹 말라 있고. 밀크는 아팠다. 개도 아닌데 마지막에 본 최 팀장의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눈은 충혈되고 눈곱은 끼고 입술은 거스러미가 일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십 년이 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했고 주일과 십일조를 지켰다. 그 긴 기도의 응답이 바로 나였다. 그 아이에게 은총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은총. 그레이스. 세례를 하 던 목사님은 바둥거리며 바락바락 울어대는 나를 들어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숨 쉬며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머리 위로 주님의 은총이.” 아직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차례로 전화를 걸어와 냉담한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밀크를 부둥켜안고 엉겁결에 앉다보니 영락없이 딱 그림 속 그 소녀였다. 불도 켜 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을 최 팀장의 모습을 그려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목소리는 조금씩 커지고 빨라지고 급기야는 흐느끼는. 어 느새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 몸을 떨면서 자신의 죄를 용서 해달라고 흐느끼는 최 팀장의 모습을. 길고 긴 기도가 끝나면 그녀는 굳고 딱딱해 진 무릎을 겨우 펴고 일어나 뺨에 흐른 눈물을 손등으로 쓱 닦는다. 절뚝이면서 부엌으로 가서 미지근한 물 한 잔을 천천히 들이켜고 문단속을 하고 잠자리에 들 기 위해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어떤 기도든 매일매일의 기도가 자신을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로 끝이 나고 마는. 결국은 자신의 죄를 확인하는 일로 끝나고 마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최 팀장의 밤을, 그런 밤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밤을 가만히 앉아 그려보았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