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서시序詩

“내 소설의 장점은 시간을 모험적으로 다루는 것”

「운수 좋은 날」 줄거리 ①죽은 아내와 하룻밤 ②그날의 심증 ③치삼과 소년 ④개똥만 한 사람이 ⑤운수 좋은 날 ⑥휴가

문학교과서와 친일문제, 그 해결점을 찾아서

악당을 구분하는 능력

“신문물의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가 내 실학정신의 핵심”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여원』 편집장 시절의 좌담회

파도그림, 여름에 즐기는 한기(寒氣)

11미터

운동장에서 펼쳐진 상상의 공동체

①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②향학열, 반골정신 그리고 북청사람 ③가난과 고독을 동반 삼은 시조의 길

①적당한 사람,정적이 흐른다 ②말을 잇지 못하는,빛은 어둠의 속도

무구

①예술가의 독창성 ②하쿠나 마타타 ③빽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머리 위로 은총

한 권의 책이 작품 세계의 원형이 되기까지

아시아 시인들이 함께 만든 계간 『시평』의 마지막 가을

뒤죽박죽 나의 데뷔작들

허블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시는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는가

허무맹랑한 공상? 지금 여기, 가장 핍진한 상상력 ‘SF’

논어와 탈무드

20세기 초 프랑스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

시어의 미묘한 의미들 사이에서 주석의 역할을 생각하다

등장인물들이 일본어로 말하게 하는 작업의 즐거움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등

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우리문학의 순간들

아시아 시인들이 함께 만든 계간 『시평』의 마지막 가을

글 고형렬 ㅣ 시인, 1954년생
시집 『대청봉 수박밭』 『해청』 『사진리 대설』 『성에꽃 눈부처』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유리체를 통과하다』『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 산문집 『은빛 물고기』 『바람을 사유한다』 등

한 세기가 저물고 있던 1999년 10월 어느 날, 나는 동해 상공에 있 었다. 며칠간의 여행을 기억하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동북쪽 멀리 일본열도가 희미하게 바라보였다. 시바타 산키치, 사가와 아키, 혼다 히사시, 스즈키 히사오 그리고 한국어동호회 회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방문한 그 나라는 일제강점기의 시인들을 떠올리게 했고 그 하늘에서 나는 아시아 시 전문지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 을 했다.
그 창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종오, 김사인, 박영근, 김소연 시 인으로 편집위원이 구성되면서 『시평』은 최초로 아시아를 대상으로 하는 시잡지의 첫발을 내디뎠다. 곧이어 한성례, 김태성, 이안나 씨 등이 번역위원으로 참여했다. 중국의 수팅, 타이완의 린후안장, 백령 시인을 서울에서 만나고 울란바토르에서 아요르잔과 을찌터그스 시 인을 만나 편집위원직의 수락을 받았다. 편집은 김종태, 장무령 시인 이 맡고 러시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아랍 등으로 시단을 확장 하면서 김선명, 배양수, 이연, 김영애, 권택명 제씨가 참여했다.
『시평』은 사무실이 없었다. 하늘이 아시아 시의 편집실이 되었다. 곳곳에서 아시아 시들이 한국으 로 날아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의식과 경계를 넘어오는 낯선 아시아 시의 수용은 실로 중요한 시 적 경험이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나라의 시의 형태와 정서, 꿈, 고통, 저항에 대한 매력이 각인되었 다. 우리 시도 그때에서야 변방의 한 국가의 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시가 다른 나라 시들과 더 못할 것도 없겠지만 더 나은 것도 없었다. 한국 시를 다른 아시아의 시처럼 읽으면서 모국의 언어와 시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십 년이 지난 뒤 나는 젊은 시인에게 『시평』을 맡기려고 수소문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잡지 기획과 출간은 피 같은 지면 분배와 자기 시간의 담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런 생각이 없었 다면 새벽 두 시까지 교정을 보다가 망막이 열공(裂孔)되고 박리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했기에 나는 한 시인으로서 아시아 시의 심부름을 원 없이 할 수 있었다.
『시평』은 사실 한국 시의 권태와 일상성에서 벗어나서 낯선 세계와 언어로 길을 떠나는 일탈의 선 언이었지만 시인들에게 나름의 시적 전망을 보여준 하나의 작은 창이라도 됐다면 다행이다. 허기졌 던 사람이 만드는 잡지는 거기까지였다. 종간호를 받아본 일본의 사가와 아키 시인이 매우 유감스럽 다면서 백 달러를 내고 과월호를 구입한 일은 잊히지 않는다. 일본에 가면 늘 공항에서 반갑게 맞아 주고 배웅하던 그 도쿄의 여성 시인이 보고 싶다.
펀드를 모으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손실을 가지고 시인들에게 고개 숙일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잡지란 돈을 버는 곳이 아니고 돈을 쓰는 야릇한 곳이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2,000부를 찍 어 고무됐지만 나는 시 잡지의 편집자로 계속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시인으로서 한번은 잡지를 해 볼 필요가 있지만 계속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소진하고 또 잃을 수 있기 때문이기 도 했다.
『시평』의 미완에 대한 기억은 결코 아프지만은 않다. 600호, 1,000호란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발행 호수이다. 각 호마다 표제작을 붙인 하드커버의 『시평』 어느 면을 펼쳐보아도 기이할 정도 로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의 내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 340여 명의 아시아 시인들의 시 구백여 편을 소개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나의 사십 대 중반과 오십 대는 가버렸다.
이제 중심과는 먼 시골에 도착한 나는 모든 시간이 오롯이 나의 것이 되어 비교적 한가하다. 나에 게 중심은 끝까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시 잡지와 시사 속에 있는 시인들의 모습은 항상 불구적 언어와 불안한 삶의 나그네들이었지 반듯하고 똑똑한 주체는 아니었다. 시인이 엘리트인 적이 없을 것이며 시가 완성된 적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에 있을 땐 한국이 중심인 것 같지만 아시아에 나가서 보면 우리도 변방이다. 그 『시평』 시절은 나로선 갸륵한 소외의식을 시와 삶의 중심 기조로 삼고 싶었던 때였다. 그것은 자기 독식의 현실과 병적인 현상들을 거절하려는 몸부림과 방편이었을지 모른다. 그 타자 의식은 우리 각 자가 주체가 되려고 했던 구시대적 발상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초라한 시와 함께한 『시평』 시절에 나는 자신의 감옥과 불길 속에 있었다. 숱한 악몽에 시달리는 약간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 증상을 즐기며 나는 혼돈 속에서 견뎠다. 남들은 어둠 을 모두 통과해서 밖에 서 있는데 나만 어둠 속에 남은 것 같았다. 그 속에서 정신없이 쓰고 편집하 며 혼자서 살았다.
멀리 있는 아시아 시인들과 함께 만들었던 나의 『시평』 13년은 누군 가의 시를 청탁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던 기간이었고 또 많은 작품 을 쓴 절정이었다. 어떤 언어의 광기 속에서 날아오르던 꿈이 실체가 아니고 미완과 비현실로 끝났기에 차라리 흡족하게 생각한다. 만약 에 13년간의 그 환(幻)이라는 추억이 없었다면 매우 허탈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도 없지 않다. 『시평』 지면의 반을 할애해서 아시 아의 시를 소개했지만 정작 우리의 시를 다른 아시아 국가의 잡지에 소개하지 못한 점이다. 언젠가 일본의 한 중견 문인에게 『시평』이 도 울 테니 일본이 먼저 아시아 시와 일본 시를 절반씩 싣는 잡지를 만 들어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럴 능력이 없다고 했고 나 는 매우 유감스러웠다.
『시평』은 2013년 늦가을에 54호로 종간했다. 나는 한때 시가 죽었 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시가 없는 사람의 영혼과 사회란 상상할 수가 없다. 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는 멈추지 않고 망가진 몸을 이끌고 살아갈 것이다. 저곳에서 시와 마음이 망가지지 않는 것은 오히려 비 정상인 일이다. 다시 젊은 시인들의 피를 받아 시 자체가 생명 소요 의 자율과 가치가 되는 한 시점이 오길 바란다.
한 잡지가 모든 시인과 독자에게 영향을 주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 다. 집단이 아닌 소수자들이 새로운 허기와 갈망을 발견하는 내적 이즘을 소량으로 출간하는 등 다양한 시 장르를 기획하는 작은 잡지 시단을 형성하는 새로운 생존의 모색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선 시 와 시인이 살아남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베트남 편집위원이던 마이반펀 시인이 작년 연말에 나와 함께 기획 한 2인 시집 『대양(大洋)의 쌍둥이』를 출간하면서 올가을에 서울을 방문한다. 옛 『시평』을 올려놓은 그의 사이트에 들어간 순간, 그 시절 이 아련했다. 간혹 이런저런 소식을 접할 때 창간과 종간이라는 말이 귓전을 울리다 사라진다. 조금 짧았던(?), 그러나 불가피하게 낙화(烙 畫)된 그 가을의 어떤 미완과 기억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