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사랑의전당殿堂

세비야, 유쾌한 열정과 빈티지의 황홀

“외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예술”

파리-평양-서울을 달리는 평화열차를 꿈꾸며

한국인의 의식현상학, 시험판

이상 소설 「날개」 이어쓰기 ①사이렌이 울릴 때 ②마지막 페이지 ③1교시 국어영역 ④우리들은 마음대로 ⑤진술에 따르면 ⑥대합실에서

“역사를 알 때 예술의 추상주의를 알 수 있다”

총·균·새

모든 시들이 등단작이다

1977년 매일신춘문예 시상식

다 락

불교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여정

울음에 관하여

감동은 현실을 구원하는가

태양이 한 마리 곤충처럼 밝게 뒹구는 해질녘, 세상은 한 송이 꽃의 내부

①만찬 ①그럴 때가 있다 ②절 전화 ②고구마의 말

①북쪽 별을 찾아서 ②미래과거시제

첫 번째|마침표 유감 두 번째|아주 흔한 위로 세 번째|텍스트와 세계 네 번째|집을 떠나 집으로

①전후 국가재건 토목사업에 헌신한 ‘후반기’ 모더니스트 ②시대를 풍미한 『얄개전』을 쓴 딸바보 ③시와 후학과 커피를 사랑한 ‘동해안의 시인’

그리운 예술가(藝술架)

되돌릴 수 없는 7년, 되살리지 못한 7년

조선미술전람회와 사군자

치명적인 것들

다채로웠지만 2% 부족한……

탄뎀번역을 소환함

“말로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쉬지 않겠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타는 목마름

대산창작기금,외국문학 번역지원

2018 외국문학 번역지원 공모,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등

다시 읽는 우리 문집

불교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여정

- 해동의 석가모니 의천의 『대각국사집』

글·사진제공 조운찬 ㅣ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 소장. 1963년생

대각국사 의천의 진영
(선암사 성보박물관 소장

고구려 마지막 임금 보장왕은 즉위 초부터 유, 불, 선 삼교를 진 흥시키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자 신임 받던 재상 연개소 문이 유교와 불교는 융성하지만 도교는 아직 미약하다며 당나라 에 특사를 보내 도교를 정식으로 들여올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당 시 고승인 보덕화상은 “잡교가 정통종교와 병행하게 되면 나라가 위 태롭다”며 반대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왕이 듣지 않자 보 덕화상은 자신이 거처하는 반룡사의 암자를 날려서 전라도 완주 의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652년 6월의 일이다.


『삼국유사』 「흥법」편의 ‘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이 절을 옮 기다[寶藏奉老 普德移庵]’에 나오는 내용이다. 고구려에서 도교를 도 입하자 보덕화상이 암자를 날려 백제국으로 가서 수행을 계속했다 는 이야기다. 현
 한글본 『대각국사집』
(이상현 옮김, 동국대출판부)  

못해 백제로 귀화한 보덕화상의 특이한 이력에서 ‘암자 를 날렸다[飛來方丈]’라는 기이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 다. 그런데 일연 스님은 이 이야기가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는 점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일연 당시만 해도 고대산 경복사(景福寺)에는 ‘비래방장(飛來方丈)’이라는 암자가 그 대로 있었으며, 이자현이 쓴 시가 그 암자에 걸려 있고, 김부식도 그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는 것이다. 또 1092년 대각국사 의천이 고대산 비래방장으로 찾아가 보덕화상의 진영을 참배하고 시를 지었다며 시와 발문을 『삼국유사』에 싣고 있다.
일연에게 설화나 신화, 기담은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역사’이다. 일연이 「기이(紀異)」편 서문에서 신비로운 기적 이야기를 괴 이하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 일연은 『삼국유사』 곳곳에서 신화나 설화 의 현장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적시하거나 방증되는 자료를 찾아 함께 소개하며 이야기의 신빙성을 높 이고 있다. 오늘날 경복사는 폐허가 되었다. 비래방장도 없고, 이자현의 시도, 김부식의 글도 확인할 길 이 없다. 그러나 일연 스님은 설화가 역사가 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기록했다.


● 삼국유사에서 만난 대각국사
나는 일연의 기록정신을 확인하고자 의천의 문집을 찾았다. 『대각국사집』은 일부가 멸실돼 불완전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남아있었다. 최근에는 문집이 온전히 번역되어 한글본 불교전서 시리즈로 나왔다 (이상현 옮김, 2012년, 동국대출판부). 이 책 17권에 실린 「고대산 경복사 비래방장에서」라는 시를 보자.

열반부와 방등부의 가르침은 涅槃方等敎
보덕화상으로부터 전수되었네 傳授自吾師
원효와 의상이 경전 배울 적에 兩聖橫經日
스님께선 독보적인 존재였지요 高僧獨步時
인연 좇아 남북으로 가는 것은 從緣任南北
진리는 어디든 있기 때문이라오 在道絶迎隨
애석하도다, 방장 날려 보낸 뒤로 可惜飛房後
동명성왕의 고국이 위태해졌으니 東明古國危


『삼국유사』에는 앞 뒤 두 구절씩만 실려 있다. 그러나 『대각국사집』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일연 스님이 의천의 문집을 보고 인용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문집에는 ‘보덕대사는 원래 고구려 반 룡사의 스님이었는데, 보장왕이 도교에 미혹되어 불법을 폐기하자, 대사가 방장을 날려 보내 백제의 고 대산으로 옮겼다. 그 뒤 신령스런 사람이 고구려 마령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너희 나라는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이는 해동의 『삼국사기』 기록과 같다’라는 발문이 들어있다. 『삼국유사』 가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쓰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대각국사는 『삼국유사』 「탑상」편과 「의해」 편에도 나온다. 「탑상」편에는 ‘고려 선종 때에 우세승통(祐世僧統) 의천이 송나라에 가서 천태종의 책을 많이 가지고 왔다’고 했다. 「의해」편에서는 의상

대사의 제자인 승전 스님이 상주 갈항사에서 돌머리 해골을 제자로 삼아 강연하고 토론을 하였다고 하면서, 승전의 사적이 『대각국사실록』에도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대각국사를 3번이나 인용하였다. 대각국사 의천은 불교를 국교로 표방한 고 려시대의 가장 유명한 스님이자 학자이다. 왕자 신분으로 불교를 진흥시킨 공로가 부처에 비길 만하다 하여 ‘해동의 석가모니’로 불렸다. 또 ‘대각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의천을 빼고 한국 불교를 말할 수 는 없다. 그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흥조이다. 적지 않은 시문을 남겨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꼽힌 다. 고려 전기에 개인 문집을 남긴 문인은 의천, 곽여(郭輿), 예종, 김부식, 정지상, 최유청 등 6명에 불 과하다고 한다. 이 중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의천의 『대각국사집』 뿐이다.


● 불법을 위해 바다를 건너다
불교를 국시로 삼은 고려에는 아들이 셋 이상이면 한 명은 출가할 수 있다는 제도가 있었다. 고려 문 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위로 형들이 있어 반드시 출가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다. 그러나 그는 출가를 자원하고 11살 때 승려가 되었다. 왕실의 후원을 받은 의천은 출가 2년 만에 최고위 품계인 우세승통(祐世僧統)에 올랐다. 학문에 대한 열정도 대단해 불교뿐 아니라 유교, 노장사상까지 두루 섭렵했다. 23살 때 이미 『화엄경』 50권을 강의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국내에서의 공부에 만족치 않고 송나라에 가서 불법을 더 연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은 글이 1084년 1월 선종 임금에게 올린 「송나라에 들어가서 불법을 구하겠다고 청한 표문[請入大宋求法表]」이다.

“만약 중국에 건너가지 않는다면 동방에서는 실로 소경의 눈을 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 건대, 원광(圓光)이 석장(錫杖)을 떨쳐 돌아오고, 의상(義湘)이 배를 타고 건넌 이후로 맑은 그 풍도 (風度)가 후세에 끊어진 가운데 높은 그 자취를 따르는 이가 없습니다. 신이 이에 감히 험한 길을 평 지로 여기고서 분발하여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치달리며 목을 빼고 오기만 기 다렸습니다.”

의천은 자신의 행위를 원광, 의상 등 신라 고승들의 해외 유학에 견주며 죽음을 무릅쓰고 송나라에 건너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이미 송나라 화엄종 승려 정원(淨源) 법사로부터 초청장도 받아놓 은 상태였다. 그러나 임금과 재상들이 강하게 반대하자, 의천은 이듬해 상선을 몰래 타고 중국으로 갔 다. 송나라에서는 14개월 간 체류했다. 주로 개봉, 항주를 머물며 송의 황제, 황태후를 접견했다. 관료, 문인, 고승들과 만나 학문을 토론했으며 불서를 수집했다. 이 때 만난 고승이 50여 명, 수집한 서적은 3,000권에 달한다. 의천은 1087년 6월 예성강 하구에 도착해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우리나라 국경에 도착해서 죄를 청하는 표문[至本國境上乞罪表]」이다. 제목은 허가 없이 월경을 해 국법을 어긴 것에 대해 죄를 받겠다는 것이나 실제 내용은 송나라에서의 활동을 담은 귀국 보고서에 가깝다. 의천은 송 나라 100개 지역을 방문했으며 법상종, 화엄종, 천태종, 율종에 대해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걸음걸이를 배우러 간 사람과 같았다가, 지금은 돌아올 줄 아는 새와 비슷하게 되 었다”며 해외에서 배운 것을 조국에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었다”며 해외에서 배운 것을 조국에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대각국사집』에는 송나라 황제와 황태후에게 보낸 감사장, 지방 수령에게 보낸 장계, 승려들에게 띄 운 편지 등이 수십 편 실려 있다. 대부분 여행에 편의를 제공하고 선물을 하사한 것에 대한 사례의 글 들이다. 이 가운데 정원, 선총, 정인 등 승려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은 의천이 송나라의 선진 불교 지식 과 해석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불교경전을 정리하다
송나라에서 귀국한 의천은 흥왕사 주지로 취임하며 화엄종단을 이끌며 불교 경전 정리에 나선다. 경전 의 정리와 간행은 의천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는 송나라로 가기 전부터 경전 수집을 시작하였다. 19세 때 쓴 「세자를 대신하여 교장의 수집을 발원하는 글[代世子集敎藏發願疏]」은 불교 경전 수집의 시작 을 알리는 문장이다. 이후 그는 「선종 임금을 대신하여 제종의 교장을 간행하는 글[代宣王諸宗敎藏彫 108 2018 대산문화 여름호 印疏]」을 지어 교장의 조판을 계획했다.

“부처가 설한 것이 경(經)이요, 경에서 나온 것이 논(論)이니, 경은 논을 통해서 그 뜻이 드러납니 다. 그런데 논은 소(疏)를 기다려서 뚫리고, 소는 의(義)를 모아 밝혀지며, 의는 법사(法師)를 통해 서 술됩니다. (…) 삼가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원효로부터 보잘것없는 이 몸에 이르기까지 여러 승려들 을 길러내어 국가를 보전하였습니다. 현종께서는 5천 축의 교장을 간행하였고, 문종께서는 10만의 게 송을 새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경전을 널리 퍼지게 되었으나 장소(章疏)는 거의 사라질 지경이니, 널리 지키고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송나라에서 수집한 불교 서적과 판목으로 의천은 교장 정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1090년 8 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간행했다. 향후 간행될 불교 서적의 목록을 모은 책으로 1,010부 4,857권이 수록되어 있다. 의천은 곧바로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조판 작업에 들어갔 는데, 교장 간행 사업은 그가 입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교장이 바로 의천의 『속장 경(續藏經)』이다. 『속장경』이란 앞서 문종이 간행한 불경의 뒤를 잇는 경전이라는 뜻이지만, 불경이 아 니라 장소(章疏, 경전의 주석서나 연구서)를 집대성한 것이다.
1097년 국청사가 완공되고 의천은 주지로 임명됐다. 교장 간행이 마무리되어가는 속에서 그는 종단 개혁에 나섰다. 교종인 화엄종을 정비하고 교선융합의 종파로 천태종을 개창하는 일이었다. 흥원사에 9조당(九祖堂)을 건립하여 화엄종의 9조를 체계화하고 조사들의 계보를 통일했다. 천태종 개창은 법 안종 승려를 중심으로 교단을 조직하고, 승과를 시행하여 성직자를 선발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 다. 『대각국사집』에 천태종 개창과 관련된 글은 보이지 않는다. 멸실됐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입적에 앞서 숙종에게 남긴 유언이 종단 개혁과 정비가 평생의 소원이었음을 내비치고 있다.

“원하는 바는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일인데, 병이 저의 뜻을 빼앗아 가니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외 호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도록 하면 죽어도 썩어 없어지지 않을 불멸의 공적이 될 것입니다.”

● 원효의 재발견
『대각국사집』을 읽다보면 원효와 의상이 어느 스님보다 자주 거론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의천은 고려 화엄종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의상을 동방 화엄종의 종조로 자리매김했다. 또 5교9산으로 나뉜 고려 불교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원효의 화쟁 사상을 주목했다. 의천은 원효의 저서를 열심히 읽으며 백가의쟁론을 회통시킨 그의 업적을 계승하려 했다. 원효를 경모했던 의천은 경주 분황사를 찾아 원효의 소 상 앞에서 물을 갖추고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그때 썼던 글이 바로 「분황사 원효 성사에 대한 제문[祭 芬皇寺曉聖文]」이다.

『신편제종교장총록』. 송나라 등 해외에서 수집한 불서의 목록집이다.     

“저는 부처님을 사모하여 앞서의 스승들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우리 원효 성사보다 뛰어난 이는 없 었습니다. 그래서 은미한 말씀이 잘못 전해지는 것을 통탄하고, 지극한 불법이 무너진 것을 애석히 여기면서 멀리 명산을 방문하고 없어진 저술들을 널리 구하였습니다. 지금 경주의 오래된 절에서 살 아계신 듯한 성사의 모습을 뵙고 보니, 영취산에서 부처님 당시의 법회를 만난 것 같습니다.”

의천은 입적 몇 달 전에 원효에게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사시(私諡)를 올렸다. 오늘날까지 원효가 화쟁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신라 승려의 대표인물로 원효·의상을 병칭(竝稱) 한 관습도 의천에서 비롯됐다. 의천은 우리나라에 화폐를 처음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각국사집』 제12권 「화폐의 사용을 왕에게 건의한 글」은 중국의 화폐 사용의 역사를 소개하며 주전(鑄錢)의 필요 성을 역설하고 있다. 결락된 부분이 있지만, 문집의 글 가운데 가장 길다. 주화(鑄貨)의 별칭으로 전 (錢), 천(泉), 포(布), 도(刀)를 들면서 네 가지 모두가 ‘끝없이 유통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풀이한 게 눈에 띈다.
『대각국사집』을 읽다보면 구법을 위해 분투하던 의천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편지, 상소문, 제문 등 의 천의 육성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서일 것이다. 의천의 행적뿐 아니라 고려의 불교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문헌이다. 『대각국사집』은 국내에서 간행된 최초의 불교 문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