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눈 오는 地圖지도

무참한 시대의 독백

우리나라 시낭송 운동 50년

감각을 바꾸지 못하는 예술은 비윤리적

복수의 계절에 「햄릿」을 다시 본다

주요섭 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 이어쓰기 ①풍금 ②사랑손님과 누님 ③봉선화 꽃물 들인 소녀 ④기찻간 변사사건 관련 진술서 ⑤연애편지

겨울 들판을 거닐며

대산 100년, 대산문화재단 25년

지금 내게 다가오는 것들이 내 스승이다

노나메기 세상을 열기 위해 끝없는 젊음을 사는 당신

영원한 가을

병란에 대처하는 두 개의 길

2004년에 멈춘 시간

북방의 시인, 곽효환

『탁류』는 물이 아니라 군산 사람들의 얼굴이다

20세기와 함께 시작된 근대의 수학여행

① 원 샷으로 , 상강 상강 ② 마곡을 어루만지고, 혼자인 걸 못 견디죠

① 돈의 수사학 ② 시간의 문법

첫 번째| 그리고…… 28년 두 번째|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들과는 상관없는, 검은 단어 세 번째|변하지 않는 자리 네 번째| 구조신호를 듣는 법

은하열차

시인이자 번역가로서 새롭게 발견된 피천득

①제25회 대산문학상|수상작선정 수상작리뷰|시부문 수상작리뷰|소설부문 수상작리뷰|희곡부문 수상작리뷰|번역 부문 ②윤동주문학기행|하늘과 평등의 꿈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륙, 『상실의 시대』 혹은 『노르웨이의 숲』

위로가 소용없는 세대를 위한 위로

‘블랙리스트’ 사건, 표현의 자유를 지킬 근본적 해결책 제시돼야

‘기억 잃음’을 기억하기

나의 의미는 만드는 것

‘종이’라는 지배적 메타포 옮기기

한국전쟁과 스무 살 처녀의 내면 풍경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선 인간

대산창작기금,외국문학 번역지원 등

대산문화재단 신창재 이사장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 레종도뇌르 수훈 등

다시 읽는 우리 문집

병란에 대처하는 두 개의 길

- ‘경(經)의 원칙’ 김상헌의 『청음집』과 ‘권(權)의 윤리’ 최명길의 『지천집』

글과 사진제공 조운찬 ㅣ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 소장. 1963년생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후금은 그해 12월 1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병자호란이다. 청 태종이 몸소 12만 대군을 지휘하였다. 12월 8일 청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 소식을 전하는 의주 부윤 임경업의 장계는 12일 조정에 도달하였다. 청군의 진격은 파죽지세였다. 13일에는 평양에 도착하였고, 14일에는 개성을 통과하였다. 당황한 조정은 강화도로 들어가 항거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들은 이미 한양에 임박해 있었다. 강화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인조는 이조판서 최명길을 홍제원에 있는 청군 진영으로 보내 진격의 시간을 지연시켰다. 최명길의 시간 벌기 작전으로 인조는 소현세자와 관리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일 ◆


12월 15일 남한산성 행궁(行宮)에 조정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만들어진 전시 정부가 산중에서 한겨울을 보내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산성은 청군에 의해 포위됐다. 맞서 싸울 조선 군대는 1만 남짓에 불과했다. 국가 존망이 걸린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조정은 싸움보다는 강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청과 화친을 해야 한다는 주화파를 이끌었다. 최명길의 강화 정책은 척화파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선봉에 선 이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었다. 서로 다른 길을 생각하고 있던 김상헌과 최명길이 부딪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청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멀리까지 온 것은 반드시 우리나라를 항복시켜서 형제 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지금 만약 군신 관계를 칭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최명길).
“군신관계를 맺고 나면 저들은 반드시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조건을 들고 나와 갖가지로 우리를 핍박할 것입니다. 결단코 군신관계를 칭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전쟁은 강약만 가지고 성패를 논할 수 없습니다. 삼군의 군사가 한마음으로 일제히 분발한다면 저 오랑캐들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김상헌).
화친과 척화의 대립이 팽팽했지만, 인조는 화친을 결정하였다. 화친이라지만, 청군에 대한 항복이었다. 최명길이 항복 문서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 문서를 집어든 김상헌은 ‘신의 죄는 머리카락을 뽑아도 이루 다 셀 수 없는 것입니다[臣罪擢髮難數]’와 같은 구절을 보고는 격분을 못 이겨 초안을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최명길에게 말했다. “공은 여러 대에 걸친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최명길이 찢어진 항서를 주우면서 말했다. “대감의 말씀이 옳긴 합니다만, 이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라에는 마땅히 항복하는 국서를 찢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주워 수습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서로 다른 정치 노선과 사상에서 비롯한다. 최명길은 인조 반정에 적극 참여하여 공을 세운 공서파(功西派) 소속이었다. 김상헌은 당색에서는 최명길과 같은 서인이긴 해도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고 정계에 진출한 청서파(淸西派)에 속했다. 당시 조정은 공서파가 주도하였다.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김상헌은 정통 주자학을 공부한 원칙론자였다. 그는 명분과 의리를 존중하였다. 당연히 그에게 명나라는 여전히 떠받들어야 할 황제국이었고, 후금은 가까이 할 수 없는 오랑캐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최명길은 주자학과 함께 현실을 중시하는 양명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명분 못지않게 실리를 따졌다. 그가 보기에 세력을 키워가는 후금은 무시해도 좋을 오랑캐가 아니라 동북아의 신흥강국이었다. 조선은 정묘호란 때와 마찬가지로 병자호란에서도 후금의 침략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화친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남한산성에서 두 사람이 격돌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김상헌의 길 ◆

김상헌은 1608년, 39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늦은 나이였다. 급제한 이듬해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그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집권층인 대북파와 당색이 다른 김상헌은 광해군 집권 내내 한직을 맴돌았다. 그가 받은 벼슬이란 광주목사, 연안 도호부사 등 외직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파직 또는 삭관되는 일이 잦아 관직에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인조반정을 계기로 중앙 관직으로 나갈 수 있었다. 병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등이 제수되었다. 한때는 정승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생애 동안 조정에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인조는 개인적으로 김상헌의 학식과 인품을 신뢰하고 그를 곁에 두고 싶었다. 병자호란이 나던 1636년에만 김상헌에게 공조판서,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잇따라 제수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김상헌은 번번이 사양하였다. 그는 조정에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인조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갈 때 김상헌은 벼슬을 내어놓고 양주 석실(지금의 남양주 덕소)의 시골집에 내려가 있었다. 인조의 남한산성 피난 소식을 접한 김상헌은 곧바로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12월 18일 임금을 면대하고, 곧이어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당시 최명길은 이조판서였다. 똑같이 판서직을 맡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무게는 달랐다. 결론은 항복이었다. 인조는 삼전도로 가서 청 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하고 치욕적인 ‘성하(城下)의 맹약’을 맺었다.
『청음집(淸陰集)』은 조정의 의견이 항복으로 모아진 뒤 김상헌이 “엿새 동안 밥을 먹지 않았으며, 또 스스로 목을 매달아 거의 죽을 뻔하였다”고 기록하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가 항복하였을 때 김상헌은 성 안에 있었다. 이튿날에는 큰형님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2월 7일 김상헌은 성문을 나와 고향 안동으로 내려갔다.
김상헌이 낙향하여 야인으로 산 지 3년째 되던 1639년, 청나라는 명을 침입하면서 조선에 군대를 요청하였다. 소식을 들은 김상헌은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파병 반대 상소를 올렸다. 청나라는 상소한 자를 잡아오라고 조선을 압박하고, 김상헌은 심양으로 끌려가 옥에 갇혔다. 1641년 1월, 김상헌의 나이 72세 때의 일이다.


◆ 최명길의 길 ◆

최명길은 1604년, 20세 때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최명길은 김상헌보다 16살이나 적었으나 과거급제는 4년이 빨랐다. 그러나 선조~광해군 조정에서는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광해군 시절,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북인들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는가 하면 잇따라 어버이의 상을 당하면서 수년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일등공신이 되면서 정권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병자호란 직전까지 인조 조정에서 그가 맡은 관직은 이조참판, 우참찬,부제학, 예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 요직이었다.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 중 하나는 친명배금(親明排金)이었다. 후금이 이에 불만을 품고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당시 최명길은 후금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강화의 불가피성을 역설하였다. 최명길은 조선의 안위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의리는 급선무가 아니었다. 그의 현실인식은 『지천집(遲川集)』의 곳곳에 보인다.
“명나라 만력황제의 ‘재조지은(再造之恩: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은혜)’은 우리나라 군신 가운데 누가 감격하여 추대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우리나라가 생사의 위기에 즈음하여 어찌 옛날의 중흥시켜 준 것만을 생각하고 스스로 망하는 길로 나가야 합니까? 이야말로 조선을 위하는 신하로서는 반드시 명나라를 위하여 내 나라를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의리로서 당당하여 실로 성현의 교훈에도 부합 되는 것입니다”(권20, ‘장유에게 보낸 편지’).

최명길은 ‘조선의 신하는 조선의 사직과 백성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주체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생각은 병자호란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는 화친이 결코 대의(大義)와 모순된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조치를 권도(權道)라고 여겼다. 유가에서는 ‘경(經)’이라고 하는 변할 수 없는 근본원칙을 강조한다. 이 경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보편윤리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현실에서 ‘경’만으로는 안 되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적용되어야 할 ‘권(權)’의 윤리가 필요하다. 최명길은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의 위급상황에서는 ‘권’을 써야 한다고 보았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이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오르며 국정을 이끌었다. 1642년 조선이 청의 출병 요청을 받고 명나라와 내통하였다며 그 책임을 물어 영의정인 최명길을 심양으로 소환하였다. 한 해 앞서 청나라로 압송된 김상헌은 이미 심양의 옥에 구금된 상태였다.


◆ 이국에서의 상봉, 그리고 화해 ◆

성공과 실패는 천운에 달려있으니 成敗關天運
모름지기 의로 돌아가야 한다 須看義與歸
아침과 저녁을 바꿀 수 있을망정 雖然反夙暮
웃옷과 아래옷을 거꾸로야 입을쏘냐 未可倒裳衣
권(權)은 혹 어진이도 그르칠 수 있으나 權或賢猶誤
경(經)만은 마땅히 여러 사람이 어길 수 없다 經應衆莫違

여기에 최명길이 화답했다. 상황에 맞게 권도를 사용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원칙은 간직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靜處觀群動
진실로 원만한 귀결을 지을 수 있다 眞成爛熳歸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 같은 물이요 湯氷俱是水
털옷도 삼베옷도 옷 아닌 것 없느니 裘葛莫非衣
일이 어쩌다가 때를 따라 다를망정 事或隨時別
속맘이야 어찌 정도와 어긋나겠는가 心寧與道違

두 사람은 같은 감옥에서 2년을 함께 지냈다. 수없이 시를 지어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조정에서 대립할 때, 최명길은 김상헌이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정승에 추천된 김상헌을 낙마시켰다. 김상헌도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을 나라를 팔아먹은 남송(南宋)의 진회(秦檜)와 다름이 없다고 비난하였다. 그런데 타국의 감옥에서 시를 주고받으면서 최명길은 김상헌의 절의에 탄복하고, 김상헌은 최명길의 화친이 죽음을 건 용기 있는 주장이었음을 알게 됐다. 김상헌이 시에서 “양 대 집안의 우호를 찾고 백 년의 의심을 완전히 풀어내었네[從㝷兩世好 頓釋百年疑]”라고 털어놓자, 최명길도 “그대의 마음은 바위 같아 끝내 바뀌지 않을지언정, 나의 도는 고리와 같아 수시로 변한다
네[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라고 화답하였다. 두 사람이 감옥에서 수창한 시는 100편이 넘는다. 이들 시는 『청음집』과 『지천집』에 나란히 실려 있다.
오랫동안 대립하였던 두 사람의 화해는 특별한 곳에서 우연히 이루어졌다. 이후 두 집안은 더 이상 반목하지 않았다. 지천과 청음 이후 두 집안에는 문인, 학자가 대를 이으며 조선의 명문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