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청靑노루

열망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청년의 꿈

‘영원토록 변방인’, ‘영원토록 구원인’ 시의 사랑법

인문학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신의 악마들에게 형태를 부여해서 축사를 만든 작가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①우리 공동체의 테두리와 깊이 ②언제든 다시 광장으로 ③국경을 지우기, 이주민을 환대하기 ④소수자, 현장, 연결

네, 나는 남한 작가입니다

무서움과 다정함 그리고 불쌍함

귀객(鬼客), 혹은 생의 이면(裏面)에 들린 자

성희는 몰랐겠지만

나의 해방촌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그저 지참금 때문에

의연한 연꽃의 작가

시대와 불화를 얘기하고 고달픈 삶을 노래하다

1920~30년대 경성의 거리와 음식에 대한 몇 가지 소묘

①다시 봄이 돌아오니,겨울바다 ②분실,고래

①正午에 우리가 ②아무의 목소리

김포인과 꿩의 약속

첫번째|먼 우레처럼, 두번째|열등감에 대하여 세번째|너무 빨리 온 미래 네번째|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는 것

정치의 계절에 문학은 꽃 피는가

“내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그때 소설을 포기한 것”

무진, 2008년 한국

나의 다음은 국어사전 속에 있다

창의적 배반일까, 무모한 이탈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중한 것이 있어

‘주의’를 거부한 소외된 약자들의 목소리

몽골어 운율에 실은 한국의 정조와 정신주의

문화적 차이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옮기다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 등

2017 외국문학 번역지원 공모 등

대산초대석

‘영원토록 변방인’, ‘영원토록 구원인’ 시의 사랑법

글 최현식 ㅣ 평론가, 인하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1967년생
평론집 『말 속의 침묵』 『시를 넘어가는 시의 즐거움』
『시는 매일매일』 『감응의 시학』 등
강은교 ㅣ 시인, 동아대학교 명예교수. 1945년생
시집 『허무집』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벽 속의 편지』
『어느 별에서의 하루』 『바리연가집』 등

‘영원토록 변방인’,
‘영원토록 구원인’
시의 사랑법

- 시인 강은교 선생과의 만남


최현식: 강은교:강은교 

 선생님,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이제는 대학도 은퇴하신지라 모든 일상과 시가 오롯이 선생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것들이 선생님을 휘돌아 내면화되는 시간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표현이 좋겠습니다. 요즘 이 시간 들과 어떻게 사랑하고 또 싸우고 계신지요? “우리가 기다리는 건 우리를 결코 기다리지 않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여 름 저녁 오후 여섯 시」)이란 시간의 손짓은 여전한 것인지요?

강은교 시간의 손짓이라는 말이 참 좋군요. 그런데 「여름 저녁 오후 여섯 시」를 어디서 보았어요? 어 느 시집에 들어있는지 문득 떠오르지 않아서요(웃음, 이 시는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별 하나 넣고 다녔다』 에 실렸다). 아무튼 근황을 겸해 겸사겸사 묻는 말인데, 주로 설거지와 방 닦기를 하고 국선도와 걷기를 하 는데 이런 것이 나에게는 시간의 손짓일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시를 통해 시간을 부르는 행위는 설거지와 방 닦기를 통해, 가벼운 걷기와 국선도를 통해 출렁이며 흐르는 것과 비슷해요. 나는 늘 시에서는 출 렁이며 흐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대학을 은퇴한 뒤로 나를 가로막는 울타리 같은 게 사라져 아무런 부담감 없이 시에만 몰두하고 있지요.
설거지와 방 닦기는 시와 관련이 깊습니다. 나는 ‘공간과 시간의 결합이 시를 만든다’, ‘공간이 이미 지라면 시간은 소리다’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요. 부엌과 방에서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린 채, 때로는 일어서서 때로는 무릎으로 기어가며 찌꺼기와 티끌을 닦고 훔치는 행위는 그 모양과 움직임 상 “나의 시 속에 소리=소리심이 출렁이게 하려는, 그래서 이미지와 이미지들이 물처럼 흐르게 하려 는 나의 시”와 여러모로 비슷합니다. 특히 방 닦기는 거를 수도 있지만, 설거지는 매일매일 해야만 합 니다. 설거지하면서 시를 많이 썼는데, 「우리가 물이 되어」, 「사랑법」이 그렇게 나왔고 요즘 쓰는 시들 도 그런 경우가 많아요. 책들과 메모지가 식탁을 점령하는 바람에 정작 나는 쫓겨나서 싱크대에서 밥을 먹는 아이러니도 자주 일어납니다(웃음).

 선생님은 최근 김형영, 석지현, 윤후명(윤상규), 정희성 시인 등 ‘70년대’ 동인들과 함께 『고래』로 이름붙 인 공동시집 3권을 꾸준히 출간하여 문단의 감탄을 자아낸 바 있습니다. 요즘에도 동인들과 즐거이 어울리며 “서로의 문학 행위에 어떤 간섭도 하지 않은 채 아주 자유스러운 문학”을 마음껏 구가하고 계신지요?

강은교 이제는 ‘고래’ 동인으로 불려서 이상할 리 없겠는데, 매달 ‘마월’(마지막 월요일)에 만나 는 우리는 세 번째 시집 『고래 2016』(2016)를 얼마 전 출간했답니다. 나는 시집의 서언에 해당하는 「개망초꽃을 아세요?」에 “마월 모임이 지속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문학적 만남에서 오는 자극일 것이다. 오랫동안 문학이라는 걸 했으므로 나올 수 있는 이야기, 거기서 우리는 분명 새로운 자기 세 계의 진화를 경험하곤 한다”라는 말을 적어 두었어요. ‘70년대’ 동인이 결성된 지 벌써 40년을 훌쩍 넘어섰군요. 그땐 상업적인 환경이나 욕망 같은 것이 거의 없었으며, 문학만을 위해서 살았다고 자신 할 만큼 시를 읽고 쓰는 게 주요 과제이자 목표였어요. 비록 모두 일흔이 넘은 나이들이지만, 젊은 시절의 꿈을 다시 꺼내들어 그때처럼 서로 다른 목소리와 색깔로 시를 쓰며 어울리고 있으니 매우 즐겁고 고마워요.
몇 마디 더한다면, 옛 동인들과 다시 만나며 또 하나 즐거운 것은 어떤 ‘문학적 힘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대학에서 많이 공부하면 문학과 관련된 모든 문제나 질문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거의 그렇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시만 들여다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새벽 세, 네 시에 일어나 시를 생각하고 또 쓰고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어요. 『그리스인 조르바』의 카잔스 키가 말한 이상적 문학의 상황인,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글을 쓴다는 것처럼 그렇게 살려고 늘 애 쓰지요.











‘70년대’ 동인이 결성된 지 벌써 40년을
훌쩍 넘어섰군요. 그땐 상업적인 환경이나
욕망 같은 것이 거의 없었으며,
문학만을 위해서 살았다고 자신할 만큼
시를 읽고 쓰는 게 주요 과제이자 목표였어요.






 삶이든 시든 그것을 둘러싼 공간은 끝내는 실존의 가장 깊은 곳을 울리는 본원적 처소로 우리를 둘러싸 곤 하지요. 아마도 선생님의 실존에 관련된 공간을 꼽아보라면, 세 곳이 가장 유의미할 듯합니다. 태어난 지 얼 마 안 되어 떠나온, 따라서 부모님의 기억과 술회를 통해 재구성되는 함경남도 홍원이 하나고, 기쁘고도 슬픈 청 춘의 흔적으로, 또 시를 향한 교양과 체험으로 울울한 서울이 둘이고, 이 두 공간을 잇고 또 벗어나고, 또 되돌 아보게 하는 부산이 셋일 듯합니다. 이 중에선 부산이 특히 구체적인 시공간을 얻으며 ‘다대포시편’과 ‘가야소리 집’을 통해 오래 전 역사와 지금의 일상을 사는 공간과 시간의 눈금이 새겨졌습니다. 홍원과 서울과 부산은 선생 님의 시와 삶에 어떻게 말을 걸어왔고 또 오는지요?

강은교 아까 질문 중에 나온 말이지만, 정말로 나는 가는 곳마다 시집 한 권 내면 그곳과의 인 연이 끝났어요. 다시 말하면, 나한테는 공간 하나가 없어지면 더 이상 못 쓰게 되는 거지요. 서울에 서 부산으로 내려온 것도 동아대에 취직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뭐랄까 내면에 응어리진 게 있 었다고나 할까요. 취직에 따른 공간 이동이었지만, 당시 언론에서 그것을 ‘서울 탈출’이라고 적었는데 실제로 그런 절박함이 있었어요. 어릴 적 잠시 살았던 때의 부산을 빼고는 내가 아는 공간은 서울밖 에 없다, 그러니 내 시의 공간도 서울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이 부산행을 기꺼이 받아들이 는 원동력이 되었답니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0만 정도였고 집도 있었지만 공간이동이라는 문제를 원점으로 돌릴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런데, 인구 천만을 넘나드는 서울은 이제는 KTX 같 은 편리한 교통상황 덕택에 시를 위한 시공간 확장에 도움이 되는, 정신의 베이스캠프 같은 것으로 다가옵니다.
아까 실향민이라는 말을 했는데, 원체험에서 멀어진 함경남도 홍원은 어머니의 말씀을 통해 떠오 르고 느껴지는 추체험의 공간이지요. 지금은 홍원이 나의 상상 속에서 구체화되고 눈앞의 현실처럼 펼쳐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요즘 발표한 「간이역, 오후 여섯 시」(『고래 2015』)가 그런 경우예요. ‘맨 드라미’들이 “흑자줏빛 얼굴들을 허공에 깊이 묻고 // 레일처럼 울먹울먹 묻고 // 작별의 말도 없는, 만남의 기약도 없는 오후 여섯 시”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그린 시이지요. 청도에서 무슨 강연회 인가를 마치고 기차를 기다리다 떠오른 장면인데, 바로 그 자리가 언니와 헤어진 홍원처럼 보였답니 다. 젖먹이인 나는 엄마 등에 업혀 내려왔지만, 좀 자란 언니는 불행히도 홍원에 외톨이로 남겨졌지 요. 작고 적적한 간이역의 노을 아래 맨드라미를 보자 하니 툇마루에 오롯이 앉아 있는 언니의 쓸쓸 한 모습이 그 붉은 꽃 위에 고스란히 겹쳐 떠올랐어요. 나는 이미지가 들어와 한참 있
▲ 최현     ©

어야 시가 나오 는 편인데, 그날은 웬일인지 간이역 풍경이 바로 언니의 모습이 되어 내 게 다가왔고, 그게 「간이역, 오후 여섯 시」가 되었지요.

 선생님 시 세계를 관통하는 게 무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오래고 또 방금인 시집들을 읽으면서 존재의 ‘허무’를 향해 울리는 내면의 ‘소리’가 아닐까 하는 느낌, 더 가만히 듣자니 세계의 ‘허무’가 우리 존재를 향해 희미하게 웅얼거 리는 ‘소리’가 아닐까 하는 느낌입니다만……. 선생님께 ‘소리’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왜, 또 어떻게 허무와 생명, 삶의 이편과 저편, 시의 기억과 현재를 말하 고 또 들려주는지요?

강은교 잘 보셨어요. 내게 시는 정말 소리이고 웅얼거림입니다. 옛 날의 「우리가 물이 되어」를 찬찬히 들여다볼 때가 있는데, 거기에 ‘소리’가있더라고요. 그 소리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는데, 학교생활이 그걸 많이 빼앗아간 셈이지요. 「자전」, 「비리데기의 노래」, 『허무집』, 『빈자일기』, 『소리집』까지 서울에 살고 있을 때의 시였는데, 그 이 후 소리가 실종된 느낌입니다. “이 세상 거친 물결이란 물결 / 험상궂은 돌덩이란 돌덩이들 / 사랑 품 은 내 허리에 둘둘 감아버리게 / 참 거룩한 거품 / 주사이다”라는 시구를 가진 「유화(柳花)」는 주몽신 화 속 ‘유화’를 빌려 그 소리를 되찾으려는 노력이었어요. 이걸 다른 이름으로 다시 써봄으로써 소리가 실종된 시를 벗어나고 싶었는데, 요즘의 「운조의 현」, 「운조를 찾아서」 등이 그렇게 태어났지요.
그걸 나름의 형식실험으로 연결시킨 게 「명순 양의 결혼식」입니다. 조카 결혼식 접수부에 서 있으 면서 사람들이 하나의 풍경이 되어 들어오는 모습을 4개의 에피소드에 담았어요. 그 속에 어머니가 보였다는 느낌이랄까요. 서사를 무가 『바리공주』를 빌려 “우레 한번 던지시니 물길 흐르고 / 삼십삼 천, 물값 길값 기도 / 가득 실으셨네 / 뼈마디도 시려워라 살마디도 시려워라”라고 쓰고 마무리는 후 렴처럼 그 무가를 다시 썼지요. 여기서도 바리데기의 험난한 길이 보이고 유화의 물소리가 들립니다. 이건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하고, 바리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명순 양의 결혼식」은 그런 희망 아래 쓴 시인데요, 두 개의 선율이 함께 노래하는. 마찬가지로 ‘운조’라는 이름으로 옛날의 신규방 가 사를 다시 살리고, 또 그녀를 정말 살아 있는 ‘김명순 씨’로 만들고 싶습니다.

 선생님 시의 최초인 동시에 최후의 페르소나(persona)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저 ‘허무’와 ‘시’ 를 가장 낮으면서 가장 높게 사는 존재들, 그러니까 “가장 일찍 버려진 자이며 가장 깊이 잊혀진 노래”의 주인공 들(대상인 동시에 가창자)은 ‘비리데기’, ‘유화’, ‘운조’, ‘바리’ 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녀들을 선생님은 일찍이 ‘빈자 (貧者)’라 부르셨는데, 내면과 현실, 역사와 현재, 죽음과 생을 가로지르는 ‘모든’ 여성들인 그녀들과는 어떻게 만 나셨는지요? 특히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역사인 동시에 설화의 존재들이었던 비리데기와 유화, 바리를 시의 모 든 것의 존재로 다시 전유한 것처럼 느껴지는 리듬(운율)과 해조(諧調)의 존재 ‘운조’의 면면이 궁금합니다.

강은교 앞의 얘기와도 연결이 됩니다만, ‘소리’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소리를 찾으려는 의도가 지나칠 때엔 시가 잘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내 주변의 살아 있는 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절 로 들었어요. 그때 가야를 발견한 건데, 우리 집이 낙동강과 부산 남해바다가 만나는 곳에 있었고, 예전엔 그 일대가 아마도 가야였으리라는 추정에서 가야 시는 출발했지요. ‘가야소리집’ 연작(『초록 거미의 사랑』)입니다. 가야의 소리를 찾아 자료조사 하듯이 김해, 고령, 함안, 산청 곳곳의 가야 무덤 과 박물관을 찾아다녔고 또 CD를 듣기도 했던 생각이 납니다. 하지만 시라는 게 자료조사를 열심히 한다고 잘 써지는 건 아니다, 박물관과 사진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 요. 그때 깨달은 게 바리든 유화든 그 여자들이 현대의 거리로 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었 어요. 그렇게 시와 소리를 내 옆으로 오게 하려다 보니까 신규방 가사 속의 ‘운조’를 만나게 되었지요.
운조를 만나면서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시는 공간과 시간이다, 이미지를 공간으로 본다면 소리는 시간이다, 이 둘이 만들어내는 합창적인 공간, 그것이 시이다,라는 생각이었죠. 따라서 구체 성만으로는 안 된다, 구체의 추상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고흐의 장소로 유명한 프로방 스를 방문하며 문득 깨달은 사실은 고흐의 「해바라기」나 「감자먹는 사람들」은 대상을 보고 그린 작 품이다, 하지만 화가는 개성적인 색채와 선의 활달한 움직임을 통해 풍경(대상)의 구체를 추상화했다 는 것이었지요. 이를 통해 리얼(real)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단순히 박물관을 구경하고 대상을 사진 찍어서 그것을 시적 이미지로 구성해서만은 안 된다는 믿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평론가는 한국 전통 속의 ‘빈자’들로 바리, 유화, 운조 등을 들었는데, 내 시에서 ‘바리’(비리데기) 신화는 『허무집』 때부터 나온 것 같아요. 김태곤 선생의 『황천무가연구』를 읽다가 큰 감동을 받고 「비 리데기의 여행노래」를 썼으니까요. 이 무가는 어떤 면에선 그리스 신화보다 훨씬 감동적인 데가 있어 요. 문학은 단순히 역사소설, 역사시를 쓰는 게 아닌 만큼 생명수와 같은 얘기로서 신화의 스토리가 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언젠가는 바리데기 신화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시를 써왔고, 그러다 보니 ‘바리’만으로 안 되겠기에 ‘운조’가 나온 것이지요. 요즘은 또 다른 이름을 생각하고 그런 답니다(웃음).

 선생님의 시와 산문에 등장하는 가장 인상적인 시구의 하나는, 절창 「사랑법」의 끝자락에 보이는 “가장 넓은 하늘은 그대 등 뒤에 있다”라는 명제입니다. 이 표현은 어두운 식민지 현실을 불 밝혔던 『개벽』의 기자로, 또 해방 이후 계속 환란에 처했던 불행한 나라의 정치가로, 관료로 묵묵히 걸어가며 새 세계를 꿈꿨던 아버님의 견결한 영혼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느 글에서 저 “가장 넓은 하늘”의 모습을 “회색 빛의 깊은 허공”으로 갈무리하셨습니다. 이 ‘하늘’은 젊은 시절 선생님 시와 삶에 대한 억압인 동시에 탈출구가 아니었나 하는 느낌입니다. “회색빛의 깊은 허공”은 아직도 존재와 세계를 둘러싼 현실인지요? 아니라면 어떤 변화가 있으신지요?

강은교 며칠 전에 「벚꽃」이라는 시를 썼어요. 요전에 벚꽃으로 유명한 거제도 대금산과 부산 황 명산을 올랐는데 아직 벚꽃이 지지 않아 굉장하더군요. 벚꽃이 바람에 떨어지는 이미지를 보며 추락 이 눈부신 순간, 불멸이 곧 허무인 허공, 허공의 어떤 불멸성 같은 게 떠올랐어요. 그게 ‘깊은 허공’일 텐데, 요샌 그때 벚꽃에서 본 허공의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어요. 조금 전 ‘불멸의 허공’이라는 말을 했는데, 거기서 문득 ‘(꽃)핀 허공’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지금 인터뷰 덕분에 추락의 눈부심을 새로 느꼈습니다. 날은 어두웠지만 바람이 불고 벚꽃이 떨어져 눈부셨다, 꽃피는 허공이었다, 허공이 눈부시다, 그런 감정이랄까요. 연전에 다시 펴내기도 했던 『허무집』의 허공은 ‘잿빛 허공’이었고, 그게 점차 “도처에 꽃 피우고 흐르고 숨고 부는 생명”(김병익)의 ‘분홍빛 허공’으로 변했다고 할까요. 하지만 이제는 ‘분홍빛 허공’ 같은 감미로운 말 말고 ‘꽃핀 허공’, ‘순간의 추락이 있는 허공’, ‘불멸의 허공’ 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까 『개벽』과 아버지 말씀을 했지요? 대학원에서 김기림을 공부하면서 『개벽』을 읽다가 거기서 아버지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춘산(春山) 강인택(姜仁澤)이 그분인데, 단신도 쓰고 천도교 관련 논문 을 연재도 하고 그러셨어요. 아버지는 일제 때 만해 한용운 선사 아래서 민립대학 건립을 위해 일하 기도 하셨어요. 그래서 아버지와 관련된 자료들을 다 찾아보았어요. 그렇게 모은 자료를 들고 보훈처 에 유공자 신청을 했는데, 아버지는 관리번호가 붙어 있긴 했지만, 공적 자료도 없을 뿐더러 이미 다 른 사람들이 공을 다 가로챈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다행히 내가 모은 자료들로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대전 현충원에 봉안되셨는데, 이 때문에 가끔 혼자 우쭐해 하곤 하 지요. 이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말예요(웃음).

 아직까지는 가장 새로운 시집 『바리연가집』(2014)에는 선생님 시의 미래에 대한 정보가 이곳저곳에서 차분하면서도 빛나게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 진 것」, 「그리운 동네」, 「아아아, 오늘도 나에게 시를 쓰게 하는 것들」이 특히 그렇게 느껴집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세 편의 제목 중 하나를 다시 선택하여 선생님 의 ‘지금 여기’의 마음을 비춰주시면 어떨지요?

강은교 아침에 그 세 편의 시를 찾아봤어요. 굳이 꼽으라면 「그리운 동네」를 택할 것 같은데, 지금 여기의 내 마음을 그대로 알려주고 드러낸 시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다음 질문에도 나오지 만, 이 시가 소수문학, 소외문학, 유배문학 그런 것하고 그대로 연결되는 듯해요. 나는 늘 버려진, 소 외된 그런 느낌 속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어요. 하긴 문학은 그게 없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한때는 굉장히 우울하고 절망감에 빠졌었는데, 어느 날부터 그게 ‘문학’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에게 문학이 주어져서 고맙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지요.
「그리운 동네」도 그래요. 어느 날 시골을 다녀오는데, 우리 집에 올라가다 보면 조그만 회전교차로 가 있어요. 마침 그 주변 가게들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는데, 뭔가 모를 입구처럼 보였어요. 문득 아 ‘그리운 동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제목을 붙였어요. 이 시는 첫 구절이 “일요일이면 그립고 그리운 동네에 사는 그가 찾아옵니다”로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생뚱맞게 왜 ‘그’가 찾아올까하는 생 각이 들었는데, 가만히 따져보니 ‘나’가 ‘그’로 변한 것이더군요. 말하자면, ‘나’가 ‘그’가 되어 ‘나’를 찾 아온 겁니다. 그 때문에 ‘나의 객체화’를 희망으로 적을 수 있었던 겁니다. “영원토록 변방인 그, 또는 영원토록 구원인, 희망인, 항상 너무 늦게 도착하는 그, 경비병 같은 초록빛 모자를 쓰고 옵니다.” 여 기 보이는 ‘시’와 ‘나’와 ‘희망’은 서울 탈출에 대한 따스한 보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문학(시)이란 모름지기 ‘소수의 문학’—‘유배의 문학’—‘소외의 문학’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 ‘지배의 문학’을 두었고요. 우리 시의 현실—그것이 내용이든 형식이든—과 관련하여 저 ‘낮은 곳’을 향하는 ‘낮은 자(로)의 문학’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강은교 평론가의 말대로 누군가는 나의 저 말들을 공동체주의로 몰아 부치곤 해요. 언젠가 무 슨 심사를 하는데 평론가가 미학성이 뛰어나지만 현실성이 없다고 얘기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수상 작을 골라내기 위한 비평적 언어라고 해도, 시라는 게 그렇게 나눠져야 시일까요? 예전에 김기림의 ‘전체성의 시’에 감동을 했을 때는 그걸 몰랐을 때였는데, 지금 새삼 깨닫곤 하지만 역시 좋은 시는 미학성과 현실성이 같이 있을 때더라고요. 독자들에게도 그런 듯하고요. 요번에 일어난 ‘촛불혁명’은 문학과 관련해서도 나에게 참 많은 것을 주었어요. 미학성과 현실성을 함부로 분리시키는 것을 뒤집 어 놨다고나 할까요?
내 시를 예로 들면, 비평가들이 미학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그런 시만 살아남고, 또 『소리집』 이후 소리와 이미지의 운동을 현실성의 지평으로 확장하니, 강은교의 시는 허무에서 현실로 옮겨가 민중주의로 끝나버렸다는 단정적인 평가-이를 테면 ‘강단비평적인 평가’-가 얼른 나오더군요. 나는 『소리집』 당시 시의 실종이 오는구나 싶어 서울 탈출을 감행한 것이고, 그 후 오늘까지 나를 수정해 가면서 힘을 들여 시를 써왔는데, 그렇게 편협한 평가의 틀에 갇힐 줄은 몰랐어요.

 선생님 말씀을 가만히 듣다보니 벌써 두 시간이 흘렀습니다. 두서없는 질의를 “문학이 세계의, 또는 삶 의 비판이며 옹호이며 절규, 또는 비명 소리인 한” 영원히 힘 있고 진화할 것이라는 희망의 언어로 이끌어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후의 계획을 듣는 것으로 대담을 마칠까 합니다.

강은교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잘 모르겠어요, 낮에는 의사고 밤에는 자신이 쓴 시를 책상 서랍에 집어넣는 그런 시인. 나는 그렇게 해야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이미지가 소리하 고 같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말해 공간의 소리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또 반대로 너무 의도적으로 그 러면 시가 재미없을 것 같아요. 암튼 내 서랍이 커야겠다는 생각인데, 서랍에 넣는 시라도 꾸준히 쓰 고 싶군요. 현재 한 700여 편 써왔으니, 다섯 권 정도는 더 내야 1천여 편 될까요? 참, 지난 토요일 강연하려고 원고(「내 시의 리듬: 소리심과 리얼 모더니즘, 그리고 우연론」)에 적어 넣은 시인데요, 지 난겨울 발표한 「기차」입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어느 날 보니까 ‘온통 분홍색으로 보이는’ 이 시에는 죽음이 깔려 있더군요. 나로서는 드물게 한 번에 써내려간 시인데요, 오늘 교보문고에서 가위를 사서 강연 준비지에 적은 것을 싹싹 오려내어 이 인터뷰 준비 글에 붙였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