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①우리 공동체의 테두리와 깊이 ②언제든 다시 광장으로 ③국경을 지우기, 이주민을 환대하기 ④소수자, 현장, 연결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1920~30년대 경성의 거리와 음식에 대한 몇 가지 소묘
첫번째｜먼 우레처럼, 두번째｜열등감에 대하여 세번째｜너무 빨리 온 미래 네번째｜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는 것
기획특집
공동체에 관해 글을 쓰려고 하면 꼭 공동체가 어떻게 이룩되는가보다는 공동체는 어떻 게 무너지는가에 대해 적고 싶어지곤 한다. 비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부정함으로써 긍 정하게 되는 이야기에 관해서다. 최근까지도 마을 공동체 활동에 열중하고 있는 이에게 공동체에 관한 글을 써야 하는데, 당신은 어떤 공동체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이는 주저 없이 ‘공동체가 사라진 공동체’라고 말했다. 말장난 같은 그이의 말은 곰곰 생각해볼 만 한 것이었다.
나는 두어 해 동안 마을에서 활동가로 생활하며 많은 이들이 정이 살아 있던 마을을 되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았다. 지역 풀뿌리운동으로 활동을 시작한 1세대 활동가들부터 문화예술기획을 기반으로 하는 동네 청년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각자가 가 진 소신대로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모두 열정적이었고 사명감도 투철했다. 그런데도 내 가 듣고 보고 겪은 마을 활동에는 다소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가령, 마을 공동체에서 여성, 소수자의 인권은 고려되고 있는가. 실제로 마 을 공동 텃밭에서 남자(남편)들은 주로 땅을 파 고 모종을 심고 수확하지만, 여자(아내)들은 남 자들과 아이들을 위해 채소 비빔밥을 ‘자연히’ 준 비한다.―어떤 마을 활동은 지난날 이웃사촌끼 리 어울려 지내며 살던, ‘그 옛날 우리 어머니 생 각이 나’와 같은 향수에의 복원을 목적으로 삼는 다.― 또한, 공동육아는 대개 ‘엄마들의 몫’처럼 여겨진다. 이런 경우도 있다. 한 지역구 공동체가 추진한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 지원센터는 사업 협약 직전 보수 기독교 단체의 협박에 못 이긴 관 의 철회로 무산되었다. 결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청년, 문화예술인의 ‘열정페이’는 마을 활동에서 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한때 나와 함께 마을 청년 활동가로 그룹 지어 졌던 이들 중에 여전히 마을에 남아 활동을 하 는 이는 거의 없다. 그 사람들 중에는 마을의 폐 쇄성, 마을의 특수한 문화(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선·후배, 삼촌·이모, 토박이·외지인 문화)에 놀라 마을을 거점으로 삼는 공동체 활동 이 아니라 거점의 경계를 지우는 것으로서의 공 동체 활동을 시작한 이도 있고, 공동체 회복을 위한 특수한 공동 활동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 활동에 방점을 찍으며 활동가로서의 삶을 지속 하는 이도 있다. 마을 공동체가 먹고사는 걸 해 결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그러지 못해서 ‘출퇴근러’의 생활로 돌아간 이들도 있다.
마을 공동체 활동이 이제는 ‘표심’을 잡기 위한 관의 사업이 되었다는 말이나, 일정한 수준의 가 정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야만 참여할 수 있는 ‘중 산층사업’이라는 말은 100% 동의할 수는 없다고해도 한 번쯤 고민해볼 이야기들이다.
민의 주도가 아닌 관의 주도로 인한, 관의 성 과주의 때문에 종종 결과 보고를 위한 사업이 행 해지기도 하고, 과열된 사업 추진으로 인해 아이 러니하게도 관과 손잡고 일하는 마을 활동가들 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남의 집 이야기다. 공동체 활동을 시작하는 이들을 이끌어 주는 ‘마을코디 네이터’들 사이에서는 왕왕 ‘일거리’를 두고 의가 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관에서 지원해주 는 사업비 때문만은 아니나 공동체와 공동체 사 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마을 공동체에 관 해 주로 이야기했지만, 어떤 공동체도 늘 화목하 고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 『파 라다이스』는 공동체에 관해 곱씹어보게 하는 작 품이다. 소설에서 백인들로부터 핍박당했던 흑인 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건설한 이후에 그 공 동체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다른 공동체를 억압하 게 된다.
어떤 공동체를 꿈꾸는 일은 어떻게 새로운 공 동체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관한 일임과 동시에 어떻게 기존의 공동체를 변화시킬 것인가와 관련 한 일이기도 하다. 과연, 장애에 등급을 부여하고 부양의 의무를 개인에게 떠넘긴, 성소수자를 ‘색 출’하라 지시하고 그 명령을 수행한, 먹고살기 위 해 일한 한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몬, 국가, 군대, 일터를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까.
최근 한 소규모 공동체에 몸담았다.
자신을 ‘소수자’라고 정체화한 분들과 시 쓰기 모임을 함께했다. 열 명의 학인들은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 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전력, 보호처 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학력, 사회적 신분 등 이 모두 다 달랐다. 이 열 명의 사람들이 ‘소수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돈까지 내가며 모인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문구에 마음이 움직여서라고 했다.
‘우리는 소수자성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창작 모임, 다양한 목소리로 함께 이야기하며 그 목소 리가 작품에 배어드는 과정으로서의 창작 모임을 꿈꿉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들이 ‘선택한’ 소수자성 때문 에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거나 억압하는 이들이 었다. 그들은 글을 쓰는 와중에도 여러 국면으로 혐오와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거나 노출될까 봐 두려워 스스로를 숨기는 것을 선택한 이들이었다.
모임은 6주 동안 진행됐다. 우리는 앞으로 어 떻게 될까요? 라고 각자의 가능성을 묻는 것으 로부터 시작된 모임은 매주 숨기는 것에 관하여, 나타나는 것에 관하여, 선명해지는 것에 관하여, 이룩하는 것에 관하여 쓰고 말한 이후에 우리 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다, 라는 각자의 불가능성 을 예고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모임은 본격적 인 시 쓰기 대신 쓰고 싶은 걸 쓰고 이야기하고 싶은 걸 이야기하고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묻고 쉬 고 싶으면 쉬고 마치고 싶으면 마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시를 쓰지만 시로 쓰이지 않는 것에 대해 더 이야기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나(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나(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는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 모임은 나아갔다. 대학 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있는 한 학인은 인권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는 창작 강사의 실태를 고 발해주었고, 한 학인은 직업적으로 만났던 몇몇 작가들이 얼마나 쓰레기였는가를 넌지시 증언해 주었으며, 한 학인은 자신이 아동폭력, 가정폭력 피해 생존자임을, 몇몇 학인은 동거 중이거나 헤 어진 동성 파트너에 관하여, 한 학인은 폭력 피해 로 인해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잘할 수 없는 자 신의 트라우마를 고백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수 치심을 알게 해준 사건에 관하여 이야기하곤 했 다. 소중한 것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가 있고 그런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이들이 있 었다는 것.
계획된 여섯 번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이 모임 은 차츰 저녁밥도 함께 먹고, 수업 장소로 함께 오가며 학교생활은 어떤지 회사생활은 어떤지 가 정생활은 어떤지 웃으며 수다를 떠는 집단이 되 었고, 숨지 않고 나타나서 선명해지고 이룩하는 너와 나의 삶을 꿈꾸어 보는 소규모 공동체가 되 어 갈 준비를 슬슬 하고 있다. 다음 ‘일곱 번째’ 모임은 한강 공원에서 갖기로 되어 있다. 돗자리 를 깔고 봄바람을 맞으며 치킨이 있는 저녁의 삶 을 실행하며 ‘앞으로 어떻게 된 우리’를 위한 일을 작당하게 될 것이다. 현재에도 이 ‘평범한’ 공동체 의 일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본인들의 삶과 작품 속에서 자유롭기를 고대한다.
최근 타인의 삶을 생각해보자는 흥미로운 공 동체도 꾸려졌다.
<공씨책방>에서 만난 청년 넷이 시작한 출판사 ‘유음’은 도시 문제와 페미니즘에 출판으로써 연 대하는, ‘현장출판사’를 지향하는 곳이다. <공씨책방>은 신촌에서만 25년을 머문, 개업 기간이 40 여 년이나 된 ‘1세대 헌책방’으로 2013년에는 서울 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 이 책방 은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 임대인과 임차인, 계약 과 계약해지라는 법의 말로 간단히 정리될 수 있 으나 실상은 자본에 의한 내쫓김에 가깝다.
얼마 전, 나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공씨책방> 에서 ‘현장 잡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면에서 글의 형태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에서 소리의 형태로 작품을 발표하며 현장과 작 품을 이으려는 이 프로젝트는 역시 재난에 가까 운, 자본으로부터의 내쫓김에 저항하던 이태원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처음 시작됐다. 그때 그 곳에는 많은 예술가가 연대하여 ‘자본의 공권력’ 에 저항하고 재난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고자 하였다. 이 자발적 ‘재난 공동체’의 일원 들은 지금도 자연스레 서울 곳곳의 재난 현장에 서 정치적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유음의 멤버이 기도 한 소설가 정현석 씨 역시 그곳 공동체의 일 원이었다. <공씨책방>에서는 ‘공씨책방 반상회’라 는 공동체가 꾸려졌다. 유음에서는 최근 <공씨책 방> 창업주 공진석 선생님이 작고하시며 폐간된 『옛책사랑』을 스물일곱 해 만에 복간했다. 복간 호에는 쫓겨날 위기에 처한 책방 소식과 헌책방 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곳 에서는 곧 고양이 문예지 『젤리와 만년필』을 낼 예정이다. 유음의 신조는 ‘우리는 귀엽고 강하다’ 이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동체에 관해 글을 쓰려고 하면 꼭 낙관적이고 희망에 차서 어딘가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먼저 그려보게 된다. 지 금, 여기 없는 것을 지금, 여기 있을 수 있게 하 는 다정하고 튼튼한 이들에게 마음을 둔다. 일테 면 최근 길고양이를 돕기(?) 위해 작가와 편집자 등이 모여 결성한 ‘상냥한 사람들’ 같은 모임에 자 꾸 눈길이 간다. 또는 동성애를 반대할 수도 있다 고 생각하는 대통령 후보(들) 앞으로 찾아가 ‘저 희 존재를 반대하시는 겁니까?’ 묻는 용감한 사 람들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마을의 활동에 여념이 없는 슬기로운 활동가들 에게도, 단짝들과 삼삼오오 모여 공동주거를 하 는 나의 미래나, 무엇보다 짝꿍과 함께 이룩해가 는 미래에 계속해서 마음이 쓰인다.
공동체는 대개 완전한 원(○) 모양으로 형상화 되곤 하지만, 내게 공동체는 불완전한 원(C) 모양 이다. 불완전해서 열려 있는 공동체. 교집합이 생 기는 공동체 간의 결합이 아니라 각자의 것을 온 전히 가지고도 연결될 수 있는 고리 공동체. ‘우 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라는 말과 함께 ‘공동체 가 사라진 공동체’를 이어보고 싶다. 내가 오늘까 지도 연결한 소수자, 현장, 공동체는 역시 귀엽고 강하다. 강한 것이라면 이런 것도 있다. 문화예술 계 내 성폭력, 위계폭력 재발 방지를 위해서 각자 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몫을 다하고 있는 공동체 들이 있다. 귀여운 것이라면, 헤어지네 사네 하면 서도 오순도순 사는 이 땅의 부부들.
④소수자, 현장, 연결
글 김현 ㅣ 시인. 1980년생
시집 『글로리홀』 등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4
소수자, 현장, 연결
| ■■ 어떤 공동체를 꿈꾸는 일은 어떻게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일터를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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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 관해 글을 쓰려고 하면 꼭 공동체가 어떻게 이룩되는가보다는 공동체는 어떻 게 무너지는가에 대해 적고 싶어지곤 한다. 비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부정함으로써 긍 정하게 되는 이야기에 관해서다. 최근까지도 마을 공동체 활동에 열중하고 있는 이에게 공동체에 관한 글을 써야 하는데, 당신은 어떤 공동체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이는 주저 없이 ‘공동체가 사라진 공동체’라고 말했다. 말장난 같은 그이의 말은 곰곰 생각해볼 만 한 것이었다.
나는 두어 해 동안 마을에서 활동가로 생활하며 많은 이들이 정이 살아 있던 마을을 되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았다. 지역 풀뿌리운동으로 활동을 시작한 1세대 활동가들부터 문화예술기획을 기반으로 하는 동네 청년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각자가 가 진 소신대로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모두 열정적이었고 사명감도 투철했다. 그런데도 내 가 듣고 보고 겪은 마을 활동에는 다소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가령, 마을 공동체에서 여성, 소수자의 인권은 고려되고 있는가. 실제로 마 을 공동 텃밭에서 남자(남편)들은 주로 땅을 파 고 모종을 심고 수확하지만, 여자(아내)들은 남 자들과 아이들을 위해 채소 비빔밥을 ‘자연히’ 준 비한다.―어떤 마을 활동은 지난날 이웃사촌끼 리 어울려 지내며 살던, ‘그 옛날 우리 어머니 생 각이 나’와 같은 향수에의 복원을 목적으로 삼는 다.― 또한, 공동육아는 대개 ‘엄마들의 몫’처럼 여겨진다. 이런 경우도 있다. 한 지역구 공동체가 추진한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 지원센터는 사업 협약 직전 보수 기독교 단체의 협박에 못 이긴 관 의 철회로 무산되었다. 결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청년, 문화예술인의 ‘열정페이’는 마을 활동에서 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한때 나와 함께 마을 청년 활동가로 그룹 지어 졌던 이들 중에 여전히 마을에 남아 활동을 하 는 이는 거의 없다. 그 사람들 중에는 마을의 폐 쇄성, 마을의 특수한 문화(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선·후배, 삼촌·이모, 토박이·외지인 문화)에 놀라 마을을 거점으로 삼는 공동체 활동 이 아니라 거점의 경계를 지우는 것으로서의 공 동체 활동을 시작한 이도 있고, 공동체 회복을 위한 특수한 공동 활동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 활동에 방점을 찍으며 활동가로서의 삶을 지속 하는 이도 있다. 마을 공동체가 먹고사는 걸 해 결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그러지 못해서 ‘출퇴근러’의 생활로 돌아간 이들도 있다.
마을 공동체 활동이 이제는 ‘표심’을 잡기 위한 관의 사업이 되었다는 말이나, 일정한 수준의 가 정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야만 참여할 수 있는 ‘중 산층사업’이라는 말은 100% 동의할 수는 없다고해도 한 번쯤 고민해볼 이야기들이다.
민의 주도가 아닌 관의 주도로 인한, 관의 성 과주의 때문에 종종 결과 보고를 위한 사업이 행 해지기도 하고, 과열된 사업 추진으로 인해 아이 러니하게도 관과 손잡고 일하는 마을 활동가들 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남의 집 이야기다. 공동체 활동을 시작하는 이들을 이끌어 주는 ‘마을코디 네이터’들 사이에서는 왕왕 ‘일거리’를 두고 의가 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관에서 지원해주 는 사업비 때문만은 아니나 공동체와 공동체 사 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마을 공동체에 관 해 주로 이야기했지만, 어떤 공동체도 늘 화목하 고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 『파 라다이스』는 공동체에 관해 곱씹어보게 하는 작 품이다. 소설에서 백인들로부터 핍박당했던 흑인 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건설한 이후에 그 공 동체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다른 공동체를 억압하 게 된다.
어떤 공동체를 꿈꾸는 일은 어떻게 새로운 공 동체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관한 일임과 동시에 어떻게 기존의 공동체를 변화시킬 것인가와 관련 한 일이기도 하다. 과연, 장애에 등급을 부여하고 부양의 의무를 개인에게 떠넘긴, 성소수자를 ‘색 출’하라 지시하고 그 명령을 수행한, 먹고살기 위 해 일한 한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몬, 국가, 군대, 일터를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까.
최근 한 소규모 공동체에 몸담았다.
자신을 ‘소수자’라고 정체화한 분들과 시 쓰기 모임을 함께했다. 열 명의 학인들은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 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전력, 보호처 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학력, 사회적 신분 등 이 모두 다 달랐다. 이 열 명의 사람들이 ‘소수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돈까지 내가며 모인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문구에 마음이 움직여서라고 했다.
‘우리는 소수자성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창작 모임, 다양한 목소리로 함께 이야기하며 그 목소 리가 작품에 배어드는 과정으로서의 창작 모임을 꿈꿉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들이 ‘선택한’ 소수자성 때문 에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거나 억압하는 이들이 었다. 그들은 글을 쓰는 와중에도 여러 국면으로 혐오와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거나 노출될까 봐 두려워 스스로를 숨기는 것을 선택한 이들이었다.
모임은 6주 동안 진행됐다. 우리는 앞으로 어 떻게 될까요? 라고 각자의 가능성을 묻는 것으 로부터 시작된 모임은 매주 숨기는 것에 관하여, 나타나는 것에 관하여, 선명해지는 것에 관하여, 이룩하는 것에 관하여 쓰고 말한 이후에 우리 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다, 라는 각자의 불가능성 을 예고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모임은 본격적 인 시 쓰기 대신 쓰고 싶은 걸 쓰고 이야기하고 싶은 걸 이야기하고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묻고 쉬 고 싶으면 쉬고 마치고 싶으면 마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시를 쓰지만 시로 쓰이지 않는 것에 대해 더 이야기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나(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나(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는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 모임은 나아갔다. 대학 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있는 한 학인은 인권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는 창작 강사의 실태를 고 발해주었고, 한 학인은 직업적으로 만났던 몇몇 작가들이 얼마나 쓰레기였는가를 넌지시 증언해 주었으며, 한 학인은 자신이 아동폭력, 가정폭력 피해 생존자임을, 몇몇 학인은 동거 중이거나 헤 어진 동성 파트너에 관하여, 한 학인은 폭력 피해 로 인해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잘할 수 없는 자 신의 트라우마를 고백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수 치심을 알게 해준 사건에 관하여 이야기하곤 했 다. 소중한 것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가 있고 그런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이들이 있 었다는 것.
계획된 여섯 번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이 모임 은 차츰 저녁밥도 함께 먹고, 수업 장소로 함께 오가며 학교생활은 어떤지 회사생활은 어떤지 가 정생활은 어떤지 웃으며 수다를 떠는 집단이 되 었고, 숨지 않고 나타나서 선명해지고 이룩하는 너와 나의 삶을 꿈꾸어 보는 소규모 공동체가 되 어 갈 준비를 슬슬 하고 있다. 다음 ‘일곱 번째’ 모임은 한강 공원에서 갖기로 되어 있다. 돗자리 를 깔고 봄바람을 맞으며 치킨이 있는 저녁의 삶 을 실행하며 ‘앞으로 어떻게 된 우리’를 위한 일을 작당하게 될 것이다. 현재에도 이 ‘평범한’ 공동체 의 일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본인들의 삶과 작품 속에서 자유롭기를 고대한다.
최근 타인의 삶을 생각해보자는 흥미로운 공 동체도 꾸려졌다.
<공씨책방>에서 만난 청년 넷이 시작한 출판사 ‘유음’은 도시 문제와 페미니즘에 출판으로써 연 대하는, ‘현장출판사’를 지향하는 곳이다. <공씨책방>은 신촌에서만 25년을 머문, 개업 기간이 40 여 년이나 된 ‘1세대 헌책방’으로 2013년에는 서울 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 이 책방 은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 임대인과 임차인, 계약 과 계약해지라는 법의 말로 간단히 정리될 수 있 으나 실상은 자본에 의한 내쫓김에 가깝다.
얼마 전, 나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공씨책방> 에서 ‘현장 잡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면에서 글의 형태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에서 소리의 형태로 작품을 발표하며 현장과 작 품을 이으려는 이 프로젝트는 역시 재난에 가까 운, 자본으로부터의 내쫓김에 저항하던 이태원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처음 시작됐다. 그때 그 곳에는 많은 예술가가 연대하여 ‘자본의 공권력’ 에 저항하고 재난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고자 하였다. 이 자발적 ‘재난 공동체’의 일원 들은 지금도 자연스레 서울 곳곳의 재난 현장에 서 정치적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유음의 멤버이 기도 한 소설가 정현석 씨 역시 그곳 공동체의 일 원이었다. <공씨책방>에서는 ‘공씨책방 반상회’라 는 공동체가 꾸려졌다. 유음에서는 최근 <공씨책 방> 창업주 공진석 선생님이 작고하시며 폐간된 『옛책사랑』을 스물일곱 해 만에 복간했다. 복간 호에는 쫓겨날 위기에 처한 책방 소식과 헌책방 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곳 에서는 곧 고양이 문예지 『젤리와 만년필』을 낼 예정이다. 유음의 신조는 ‘우리는 귀엽고 강하다’ 이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동체에 관해 글을 쓰려고 하면 꼭 낙관적이고 희망에 차서 어딘가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먼저 그려보게 된다. 지 금, 여기 없는 것을 지금, 여기 있을 수 있게 하 는 다정하고 튼튼한 이들에게 마음을 둔다. 일테 면 최근 길고양이를 돕기(?) 위해 작가와 편집자 등이 모여 결성한 ‘상냥한 사람들’ 같은 모임에 자 꾸 눈길이 간다. 또는 동성애를 반대할 수도 있다 고 생각하는 대통령 후보(들) 앞으로 찾아가 ‘저 희 존재를 반대하시는 겁니까?’ 묻는 용감한 사 람들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마을의 활동에 여념이 없는 슬기로운 활동가들 에게도, 단짝들과 삼삼오오 모여 공동주거를 하 는 나의 미래나, 무엇보다 짝꿍과 함께 이룩해가 는 미래에 계속해서 마음이 쓰인다.
공동체는 대개 완전한 원(○) 모양으로 형상화 되곤 하지만, 내게 공동체는 불완전한 원(C) 모양 이다. 불완전해서 열려 있는 공동체. 교집합이 생 기는 공동체 간의 결합이 아니라 각자의 것을 온 전히 가지고도 연결될 수 있는 고리 공동체. ‘우 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라는 말과 함께 ‘공동체 가 사라진 공동체’를 이어보고 싶다. 내가 오늘까 지도 연결한 소수자, 현장, 공동체는 역시 귀엽고 강하다. 강한 것이라면 이런 것도 있다. 문화예술 계 내 성폭력, 위계폭력 재발 방지를 위해서 각자 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몫을 다하고 있는 공동체 들이 있다. 귀여운 것이라면, 헤어지네 사네 하면 서도 오순도순 사는 이 땅의 부부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