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청靑노루

열망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청년의 꿈

‘영원토록 변방인’, ‘영원토록 구원인’ 시의 사랑법

인문학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신의 악마들에게 형태를 부여해서 축사를 만든 작가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①우리 공동체의 테두리와 깊이 ②언제든 다시 광장으로 ③국경을 지우기, 이주민을 환대하기 ④소수자, 현장, 연결

네, 나는 남한 작가입니다

무서움과 다정함 그리고 불쌍함

귀객(鬼客), 혹은 생의 이면(裏面)에 들린 자

성희는 몰랐겠지만

나의 해방촌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그저 지참금 때문에

의연한 연꽃의 작가

시대와 불화를 얘기하고 고달픈 삶을 노래하다

1920~30년대 경성의 거리와 음식에 대한 몇 가지 소묘

①다시 봄이 돌아오니,겨울바다 ②분실,고래

①正午에 우리가 ②아무의 목소리

김포인과 꿩의 약속

첫번째|먼 우레처럼, 두번째|열등감에 대하여 세번째|너무 빨리 온 미래 네번째|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는 것

정치의 계절에 문학은 꽃 피는가

“내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그때 소설을 포기한 것”

무진, 2008년 한국

나의 다음은 국어사전 속에 있다

창의적 배반일까, 무모한 이탈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중한 것이 있어

‘주의’를 거부한 소외된 약자들의 목소리

몽골어 운율에 실은 한국의 정조와 정신주의

문화적 차이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옮기다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 등

2017 외국문학 번역지원 공모 등

나의 아버지

무서움과 다정함 그리고 불쌍함

글 문효치 ㅣ 시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43년생
시집 『무령왕 나무새』 『왕인의 수염』 『별박이자나방』 『모데미풀』 등


무서움과 다정함
그리고 불쌍함

나의 아버지는 그때 28세였다. 그 나이에 아버지는 나와 이별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 소식을 접하지 못했으며 생사도 모른다. 나도 7세까지는 아버지가 있는 아이였지만 그 후론 아버지가 없는 아이로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생생한 기억들이 내 생애와 함께 해왔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혹은 추억은 대개 세 가지 유형으로 남아있다.
그 하나는 ‘무서움’이다. 청년 아버지는 6살밖에 안 된 나를 앉혀놓고 ‘사자는 새끼를 낳으면 벼랑 아래로 밀어뜨리고는 제 힘으로 기어 올라오는 놈만 키운다’라고 말했다. 그때 아버지의 눈빛은 광채가 나는 듯했고 말소리는 힘이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로 키우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대에부응하지 못했다. 몸은 허약하고 성격은 온순을 지나 부끄럼을 많이 타는 여자애 같은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영 성에 차지 않았고 그럴수록 더더욱 세게 나를 다루었다.
둥근 상에 모여 식구들이 밥을 먹었다. 나는 아직 젓가락질이 서툴렀다. 밥을 한 숟갈 입에 넣고는 젓가락을 잡았다. 많지 않은 반찬 중에 고기반찬이 눈에 들어왔다. 젓가락은 고기반찬에게로 갔다.
두 번째도 그랬다.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 나는가 싶었다. 아버지의 넓은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이 짜식,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 이어 나온 아버지의 벽력같은 고함소리였다. 머리가 띵하고 뺨이 얼얼했다. ‘앙’하고 울음이 터졌다. 순간 또 한 번 눈에서 불이 번쩍, 뺨이 화끈했다. ‘안그쳐!’ 아까와 같은 순서다. 나는 소리 내 울 수도 없었다. 밥알이 입 밖으로 튀었고 넋이 반쯤은 나갔다. 밥맛은 천리 밖으로 달아났다. 멍하니 그냥 앉아 있었다. ‘밥 처먹어!’ 또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밥 한 숟갈을 입에 넣었다. 젓가락을 잡았으나 갈 곳이 없었다. 김치는 매워서 못 먹겠고 고기반찬은 무서워서 못 먹겠고 할 수 없이 새우젓으로 젓가락을 내밀었다. 그 짠 음식이 한 번에 몽땅잡혔다. 놓았다가 다시, 그래도 또 몽땅 잡혔다. 다시 한 번⋯ 순간 또 눈에서 불빛이 선연히 비치고 뺨이 화끈했다. ‘이 짜식이 왜 반찬을 뒤적거려?’ 같은 순서로 벼락 치는 소리에 나는 몽땅 잡힌 새우젓을 그냥 입 속으로 가져왔다. 짠맛이 지나치면 쓴맛이 된다. 그 새우젓은 매우 썼다. 그게 내 유년기에 맛본 세상맛이었다.

필자의 백일(1943년)과 첫돌(1944년) 기념사진  


겨우 식사시간이 지나 상을 치우고 나는 넋 잃은 오리처럼 방의 구석에 앉아 있었다. 이제 평화가 오기를 기다리며⋯⋯. ‘짜식, 밥을 처먹었으면 운동을 해야 소화가 되지, 운동해!’ 아버지의 눈에서 불이 나는 줄 알았다. 식후에 무슨 운동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지만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냥 무작정 넓지도 않은 방을 빠른 걸음으로 빙빙 돌았다. 그렇게 빙빙 도는 일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기에⋯⋯ 20, 30분쯤 돌았을까. ‘이제 그만해.’ 그제야 겨우 평화가 왔다.

그 둘은 ‘아름답고 다정한 추억’이다. 아버지는 시골 고향 집에서 살고 있는 나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1년 전쯤 직접 나를 데리고 서울로 오셨다. 아마 말은 새끼를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낸다는 속담을 실천하신 듯하다.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서 따뜻한 정같은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근무하던 학교에 다녀온다고
집을 나간 후 다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입고 나간 윗옷을 벗어 친구 편에 증거물로 보내왔다.
‘댁의 아드님이 군에 입대했어요’ 친구 분의 이 말에
할머니는 마룻바닥을 치며 통곡을 했고, 어머니도 마루 구석에
쪼그려 앉아 훌쩍거리고 있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는 여름에 한강으로 강수욕을 가곤했다. 한강물이 그만큼 맑았고 우리의 생활 옆에 가까이 있었다. 아버지는 삼촌 두 분과 우리 형제 등 모두 다섯 식구를 한강으로 데리고 가셨다. 내가 발가벗고 강물에 들어간 경험이 이때가 처음이었다.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아있는데 가끔 보면서 그때의 아버지와 한강을 떠올리곤 한다. 내 생애에서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강물은 비록 차가웠지만 아버지의 정은 따뜻했다. 사실 무서운 아버지였기 때문에 응석을 부린다든가 어리광을 부리면서 떼도 쓰고 장난도 쳐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린 가슴에 훈훈하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감회를 갖게 해 주었다. 
한강의 또 다른 추억은 어느 겨울날의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스케이트를 사주셨다. 그리고 빙판이 된 한강으로 데리고 가셨다. 내 기억으로는 한강연안의 어는 지점에 물을 끌어들여 얕은 못을 만들어 스케이트장을 만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스케이트 구두의 사이즈가 커서 발에 꽉 조여지지가 않았다. 그러니 발에 밀착이 안 되어 안정감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둑에 앉아 아버지가 사준 깨엿을 먹고 있었다. 안정감 없는 행복이었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스케이트가 불만이긴 했으나입으로 들어가는 달콤한 엿의 맛이 나를 충분히 행복하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문학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도 책을 잘 사주셨다. 동물 그림책이나 탈것 그림책,그리고 그림동화책 같은 것을 자주 사주셨다. 주변의 친구들은 이런 책이 별로 많지 않았다. 나는 이런 좋은 책을 많이 보고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빌려주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고 과격하긴 했지만 또한 따뜻하고 감성적이기도 했던 분이다.
그 셋은 ‘불쌍함’이다. 아버지는 큰 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나라에서 그것은 행운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불행의 씨앗이었다.

1949년 여름 아버지(뒷줄 가운데)와 삼촌들과 함께. 앞줄 왼쪽이 동생,오른쪽이 어린 시절 필자

28세의 청년시절, 아버지는 조부모, 부모, 7남매의 형제 그리고 아내와 3남매의 자식을 포함한 대가족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북한군은 삽시간에 서울을 점령했다. 아버지는 일단 형제들과 함께방구들을 파고 지하에 은신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코피를 쏟으며 고민하다가 인민군에 지원 입대했다. 이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로 살아왔다.

아버지의 인민군 입대는 사상적 이유라기 보다는 가족을 구하기 위한 결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가 걱정이다’라고 하면서 나가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근무하던 학교에 다녀온다고 집을 나간 후 다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입고 나간 윗옷을 벗어 친구 편에증거물로 보내왔다. ‘댁의 아드님이 군에 입대했어요’ 친구 분의 이 말에 할머니는 마룻바닥을 치며 통곡을 했고, 어머니도 마루 구석에 쪼그려 앉아 훌쩍거리고 있는 장면이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치열한 전쟁의 불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불구덩이가 얼마나 뜨겁고 괴롭고 힘들었을까. 아버지는 아마도 그 폭음이 몸속으로 파고드는 어느 흔들리는 산악에서 숨을 쉬고 생각을 하며, 어쩌면 공포감으로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하면서 누군가의 총에, 혹은 포격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육신의 살은 이미 흙이 되어 어느 풀이나 나무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고, 유골은 어는 골짜기 혹은 어느 바위 아래 뒹굴다가 흙먼지 속으로 가라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울컥해진다. 우리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다. 97세의 어머니는 지금도 ‘문 서방은 어디 있어’ 하신다. 전쟁 후 거의 70년, 어머니는 아버지 얘기를 거의 안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를 잊어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근래 치매기가 오더니 아버지를 찾으신다. ‘치매’,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는데 어머니는 아버지 기억만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다시 또 울컥해진다. 홀몸으로 자식들을 키우느라 강한 척 하시던 어머니,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어머니는 수없이 아버지를 부르며 울부짖었을 것이다.
몹쓸 놈의 연좌제 때문에 나는 평생 고생을 했다. 정말 힘들 땐 아버지를 원망도 했다. 그러나 나의 막심한 불효다.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전쟁의 불구덩이에 들어가 희생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불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