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청靑노루

열망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청년의 꿈

‘영원토록 변방인’, ‘영원토록 구원인’ 시의 사랑법

인문학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신의 악마들에게 형태를 부여해서 축사를 만든 작가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①우리 공동체의 테두리와 깊이 ②언제든 다시 광장으로 ③국경을 지우기, 이주민을 환대하기 ④소수자, 현장, 연결

네, 나는 남한 작가입니다

무서움과 다정함 그리고 불쌍함

귀객(鬼客), 혹은 생의 이면(裏面)에 들린 자

성희는 몰랐겠지만

나의 해방촌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그저 지참금 때문에

의연한 연꽃의 작가

시대와 불화를 얘기하고 고달픈 삶을 노래하다

1920~30년대 경성의 거리와 음식에 대한 몇 가지 소묘

①다시 봄이 돌아오니,겨울바다 ②분실,고래

①正午에 우리가 ②아무의 목소리

김포인과 꿩의 약속

첫번째|먼 우레처럼, 두번째|열등감에 대하여 세번째|너무 빨리 온 미래 네번째|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는 것

정치의 계절에 문학은 꽃 피는가

“내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그때 소설을 포기한 것”

무진, 2008년 한국

나의 다음은 국어사전 속에 있다

창의적 배반일까, 무모한 이탈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중한 것이 있어

‘주의’를 거부한 소외된 약자들의 목소리

몽골어 운율에 실은 한국의 정조와 정신주의

문화적 차이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옮기다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 등

2017 외국문학 번역지원 공모 등

21세기 신택리지

나의 해방촌

글과 사진 황인숙 ㅣ 시인. 1958년생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등


나의 해방촌


내가 처음 해방촌에 둥지를 튼 때가 1986년이었다. 그 전 3년쯤을 하얏트 호텔 건너편의 언니 집에 얹혀 지냈으니, 그것까지 치면 남산 언저리에서 산 세월이 34년이다. 해방촌만 치면 31년! 대학교 4학 년생이었던 동생과 함께였다. 언니가 얻어준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시장 속의 한 좁다랗고 어두컴컴 한 계단을 세 층 올라가 꼭대기에 있는 마루가 딸린 방 두 칸이었다. 입구에는 야채가게와 양념가게 가, 바로 건너에 국수가게와 건어물가게가 있었다. ‘제가 살 집이 아니라고 이런 집을 얻어주다니.’ 속 으로 입을 비죽거렸지만, 나보다 네 살밖에 많지 않은 언니한테 경제를 의지하고 사는 터라 불평할 주제가 아니었다. 아무튼 집주인 가족 모두 더할 수 없이 순하고 선한 사람들이었고, 처음 세를 들이 는 듯 우리 남매를 조심스레 대해 주었다. 게다가 다들 바삐 일하며 살아서 좁은 건물임에도 부딪치 지 않고 편히 지냈다. 그리고 저녁이면 노을이 어찌나 그윽하게 비쳐들던지.
생각해 보니 거기 산 8년여 동안 나는 내가 사는 동네에 통 관심이 없었다. 집 바로 근처에 있는 해방교회(1947년에 축성된 유서 깊은 교회) 쪽으로도 한번 가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시장 안도 입구 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 외에는 거의 다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해방촌 오거리에서 짧은 비탈 을 올라 남산 순환도로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거나, 남산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그렇게 해방촌 꼭대기에서만 왔다 갔다 해서 이 동네의 특색인 경사가 급한 비탈에 미로같이 얽혀 있는 골목은 통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빈 도시락마저 들지 않은 손이 홀가분해 좋긴 하였지만, 해방촌 고개를 추어 오르기에는 배 속이 너무 허전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 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 데 헌데 더댕이 모양 깔렸다. 저만치 골목 막다른 곳에, 누런 시멘트 부대 종이를 흰 실로 얼기설기 얽어맨 철호 네 집 방문이 보였다. 철호는 마치 가죽끈처럼 된 헝겊 이 달린 문걸쇠를 잡아당겼다. 손가락이라도 드나들 만 치 엉성한 문이면서 찌걱찌걱 집혀서 잘 열리지를 않았 다. 아래가 잔뜩 집힌 채 비틀어진 문틈으로 그의 어머 니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자! 가자!”’
이범선 선생이 1959년에 발표한 단편 「오발탄」에 배어 있는 해방촌과 해방촌 사람들의 분위기랄지 정조는 그 로부터 3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이건만, 그 무심했 던 나도 설핏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남아 있었다. 신흥시 장은 1층은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이고 위층들은 살림 집들인 주상복합 시장이어서 한밤에도 어느 집 유리문 에서 새어나오는 텔레비전의 파르스름한 빛과 왕왕거 리는 소리가 자우룩이 주민의 안녕을 지켜주던, 해방촌 속의 해방촌이었다. 시장 사람들은 햇빛도 안 드는 가게 를 온종일 지키며 부지런히 움직였고, 내가 세 들어 사 는 집주인네만 해도 아래층에서 신발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젊은 외며느리를 한시라도 놀릴세라, 그녀는 살림하면서 신발가게를 돕는 한편 따로 일을 나갔다. 그 시장 안에서 빈둥거리는 젊은이는 나밖에 없었다. 집주인 댁의 살림을 장악하고 있던 할머니는 그네의 남편과, 「오발탄」의 실성한 어머니가 그렇듯, 삼팔선 이북에서 내려오신 분이었 는데 남인 나한테는 참으로 온유하셨으면서 내 또래인 아들 며느리에게는 모질 만치 엄격했다. 그렇게 해서 자식들 대학 공부를 시키셨을 테다. 시장 안 건물들은 오래 전에 지어져서 하나같이 낡았다. 내가 이사한 얼마 뒤에 재개발 얘기가 돌아서, 그럼 우리는 어떡하나 불안했었는데, 그 10여 년 전부터 얘기가 있어서 손보지 않고 그냥저냥 산다는 그 건물들이 지금껏 그대로이다. 산 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네. 산천도 아주 의구하지는 않다. 지물포와 생선가게와 야채가게 와 이불가게, 옷가게 등 갖가지 가게들로 활기차던 그 신흥시장이 듬성듬성 몇 가게만 파리를 날 리며 남은 채 스산하게 비었다가 최근 일, 이 년 새 공방이나 카페, 문화기획 사무실 등이 들어서 기 시작했다. 겨울이면 연탄재를 버리러 갔던 쓰레기 수거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는 새로 유 입된 젊은이들이 이벤트 중앙 행사장으로 사용하려고 만든 널찍한 무대가 생겼다. 그 자리에는 판자때기로 된 판매대들이 있었는데, 그 중 생선을 파는 매대 아주머니의 딸이 사법시험에 합격 했다고 신문에 났었다. 그즈음 그 아주머니의 겸손과 자랑과 보람으로 상기된 얼굴이 떠오른다. 흙수저에게도 희망이 있던 시절이었어라.












재래시장 일반이 저물어서만이 아니라 시간의 힘으로 건물주건 세입자건 많은 사람들이 시장 을, 혹은 세상을 떠났다. 내 집주인이었던 할머니도, 아내를 억척스레 만들고 당신은 노시는 듯 보이던 풍신 있고 인물 좋던 할아버지도 오래 전에 세상을 뜨셨다. 그 할아버지뿐 아니라, 시장에 서는 여성이 더 힘들게 일하고 남성은 대개 그리 살았던 것 같다. 간간 있었듯, 시장 밖에서 무슨 다른 사업을 벌인다고 목돈을 날리지나 않으면 다 행이었

을 테다. 아무튼 신흥시장 활성화 계획으로 현재 땅값이 엄청 올랐다니, 내 전 집주인 며느리 내외를 비롯해, 좁은 건물을 지켜온 선주민들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다.
시장을 떠나 해방촌 후암동 방향 아래동네에 살 면서 깎아지른 듯한 비탈이랄지,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골목쟁이들을 알게 됐다. 지금 사는 곳은 10년 전에 두 번째로 옮겨왔는데, 이면도로 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이는 첫 집에 살 때만 해도 12년 동안 이쪽 편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그러니 까 내가 해방촌 고샅고샅을 알게 된 건 10년 안짝 일이다. 해방촌은 행정명칭 용산1가동 일부를 포 함한 용산2가동 일대를 일컫는다. 1945년 해방 뒤에 주로 삼팔선 이북에서 내려온 이들이 비어 있던 일본 육군 관사를 점거해 살다가, 미군정이 퇴거시키는 바람에 남산 기슭에 판잣집이나 움 막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생긴 동네다. ‘공산 치하에서 해방됐다’는 주민들의 뜻을 살려 해방촌 이라 불리게 된 게 1949년이라고 한다. ‘일본 육군 관사’였던 곳은 짐작컨대, 경리단(현 재정 관리 단) 건너편의 미군부대일 테다. 그곳은 해방촌 오거리에서 해방교회와 해방촌 성당을 지나 보성 여고로 이어지는 생활가로를 경계로, 내가 살고 있는 골짜기의 건너편 골짜기에 있다.
언제부턴가 주말이면 동네에서 카메라와 수첩을 든 젊은이들이 줄줄이 지나가는 걸 본다. 가 이드까지 붙은 탐

방자들이다. 내가 허구한 날 지나다니는 길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래 된 생활 문화를 엿보는 ‘민속촌’인 것이다. 요즘처럼 해가 길 때면 동네고양이 밥을 주려고 쪼그려 앉아 있 을 때 그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진지하게 사방을 둘러보며 비탈길을 신기한 듯 딛는 그들에게 나 는 ‘원주민’의 한 모습을 제공한다. 그들의 이후 코스는 후암동으로 이어지는 108계단일 터이다. 내가 아는 108계단은 중앙에 화단이 가로질러져 두 줄로 나 있는데, 원래는 한 줄이었다고 한다. 1963년 후암동 하수도 공사를 하면서 갈라졌다고.
108계단이 신사로 가는 진입로였다는 말은 진작 들었지만, 그렇다면 그 신사가 어디 있었는지 이번 기회에 알아봤는데, 뜻밖에도 싱겁게 알 수 있었다. 108계단으로 내려가기 전에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옛날에는 제법 손님이 들었겠지만, 이제는 담배 손님이나 있을 것 같은 가게로 깔끔한 노인 내외가 주인이다. “정일학원 자리야.” 할아버지 대답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요? 신사에 가 보신 적 있으세요?” “나는 못 가봤지. 열여덟에 내려왔는데, 그때는 다 허물은 뒤야.” 할머니는 가봤다고 하셨다. “아주 근사했어.” “이 사람은 열 살엔가 내려왔거든.” 두 분 다 월남인 이었다. 1943년 일본이 전사자들 영령을 참배하 라고 지었다는 ‘경성호국신사’가 정일학원이었던 자리에 있었다니, 그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지 금은 거기 외국인 학교와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 있다.
108계단을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왼편에 있는 골목에는 빈 집이 여럿이다. 재개발지역 투기를 목적으로 사놓고 빈 채로 보낸 세월이 길어 폐 가가 되다시피 한 집들이다. 예의 그 구멍가게 건너편에도 멀쩡히 지은 다세대 주택들이 빙 둘러 선 가운데 흉흉할 정도로 허물어진 집이 있다. 알고 보니 그 자리가 선천군민회 터라고 한다.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이남한 해방촌 초기 정착이 주민들의 주거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니, 이제 볼 때마다 새로울 것 같다. 나 굉장한 동 네에서 살아왔구나!
그런데 108계단에 마을활성화 일환으로 에스컬레이터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난 반대다. 108계 단쯤 오르내리는 데 그다지 힘겹지도 않고, 옛 정취가 또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노약자를 생각 하면 반대할 수만 없지만. 이 동네에는 노인들이 많이 산다. 해방촌이 시내에 가까우면서 집세가 싸서 서민 살기 좋기 때문인지, 그 노인들 대개는 젊어서부터 여기 터를 두고 가난을 짊어지며 살 아온 이들이다. 아, 급하기도 급한 경사 길에 폐품을 싣고 다니는 노인은 왜 그리 자주 눈에 띄는 지. 내가 처음 뵈었을 때부터 세월이 흘러 이제는 90대가 된 노인들이다. 108계단을 내려가 후암 동으로 빠지지 않고 왼편으로 길을 잡으면, 해방촌 오거리로 가는 이면도로다. 쌀집이니 세탁소 니 비디오 가게 등이 있던 자리에 말끔하게 치장한 공방들이 들어섰다. 한 100여 미터 평지처럼 서서히 오르막이다가, 급 오르막이 나온다. 원주민으로서 다행인 것은 보도가 명확하지 않은 좁 은 길에 교통량이 많고 가팔라서 카페 등속이 없는 것이다. 전에는 허름한 공간들에 니트 공장 들이 있었고, 바로 길거리에 놓인 툇돌에 신발들이 벗어져 있기도 했다. 그 가내 공장들에서 흘 러나오는 가요를 들으며 그 옆을 지나갔었다. 왼편으로 신흥교회를 두고 조금 올라가면, ‘경성호 국신사’ 터였다는 옛 정일학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