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문

대산대학문학상 해외문학기행 기행문
글쓴이 : 이호선 날짜 : 13.03.08|조회 : 9314

글 / 이호선_서울예술대학교 극작과 1학년. 제11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수상자          

이제와 고백하건데 나는 길을 잃어버리는 데 선수다. 걷는 데 이골이 났다. 나는 길을 잃어 무작정 걷는 데 일종의 면역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엄청 추운 데 많이 걸어야 한다는 친구의 말에 별반 걱정을 하지 않은 것도 유독 내가 기록을 갱신하는 추운 날이나 더운 날, 길을 잘 못 들어선다거나 내려야 할 곳에 내리지 못하는 일을 유난스럽다 싶을 정도로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다. 여행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베를린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우연처럼 한 정거장 먼저 내리고 말았을 때도 웃음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행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조바심이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기다리는 동안 지연이는 영화 ‘테이큰’을 말하며 우리를 의무감과 같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떠올렸다. 어떤 일이든 우연은 없다. 우리가 우연이라 믿게 되는 어떤 상황 역시 실재하는 삶의 연속일 뿐이다. 가야할 도착지에서는 멀어졌지만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가는 나의 글쓰기에는 한 발 다가서는 기분이었다. 
기차에서 일행을 놓쳐 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독일에서의 내 목표는 50년 전 독일의 시가지와 삶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일 이었다. 시작은 그러했으나 주저하고 말았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시가지에 자리한 국내 굴지의 자동차 회사의 간판 앞에서 한국인답지 않게 질려버렸다. 내가 원하는 독일의 모습을 담으려고 엄마의 나이만큼이나 흘러버린 세월의 간극을 작은 카메라 한 대와 삼일 남짓의 시간으로 메우려 했다는 게 치기였음을 깨달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구나, 자책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없다고 해도 지금의 내가 느끼는 감정과 미안함이라면 충분하다고. 괴테하우스는 이런 일들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삐걱 소리와 함께 내 걸음을 단단히 주의시켰었다. 괴테가 수많은 명작은 쓰던 다락방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지만 그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가장 궁금한 것을 여백으로 남겨두는 괴테의 배려라고 치부해 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베를린에서 독일어로 활동하고 있는 일본 작가 요코 다와다를 만났을 때 그녀가 모국과 독일의 경계를 두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확신이 들었다. 내가 이제껏 살아 온 삶은 경계와 울타리를 공고히 하는 상투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는 그걸 주저 없이 무너뜨릴 용기가 필요한 시점임을 인식했다. 나아가 내 나이가 서 있는 경계를 따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바라보기로. 쉽진 않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다짐했다.
파리로 가는 길을 즐거웠다. 여자에게 파리는 모종의 향수를 일으키는 곳이다. 각종 영상매체에 노출 돼 자라 온 여자에게 파리가 주는 묘한 황홀감은 그곳의 치안이 얼마나 무법지대인지 더러운지 따위는 가볍게 상쇄시키고 만다. 낭만을 작정한 여자에게 보이는 건 연인들의 당연하기만 한 포옹과 키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에펠탑 청혼의 한 장면까지. 기행의 의도에 한참 벗어난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부끄럽게 생각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성당, 오르세 박물관, 관광 명소를 방문하고 짬짬이 파리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파리지앵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보았고 늦은 시각, 지하철에서 본 노숙자들이 추운 날씨를 이기며 잠들기 위해 이불을 지급 받는 모습을 보면서 야릇한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리옹에서 만난 대학생들은 친절했다. 내가 그 친절에 충분히 감화될 만큼 순수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울 정도였다. 한국의 극복되기 어려운 현실을 알리겠다는 자만 감이 앞섰던 나는 내 시나리오가 영화화 될 가능성이 있냐는 질문에 당황했다. 나조차도 확신이 없었다는 걸 그제야 인식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목적성을 망각한 체, 혹은 지레 포기해버리고 뚱딴지 같은 의욕만 앞섰던 나를 반성했다. 리옹의 푸비에르 사원 옆 로마원형극장에 도착하자 어제의 당혹감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굿이 존재했다면 서양의 제사의식과 공연이 이루어지던 로마원형극장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의 유물이며 정치적 공간이었다. 수업시간에 사진으로만 보던 고대 극장을 실제로 만지고 계단을 오르고 무대에 서니 공연이 없어도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런던은 더 많이 정돈된 모습이었고 깨끗했다. 그래서 궁금하지 않았다. 대영 박물관의 한국 문화재들을 보면서 일말의 분노를 느꼈다. 영어를 하지 못해도 커피를 마시고 물건을 사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게 께름칙했다. 나는 한국에서도 그들의 커피와 물건, 문화를 익숙하게 소비해왔기 때문이다. 내색 안 하려 애썼지만 뮤지컬 ‘위키드’에 흥분한 점도, 내 생애 최고의 영화가 ‘타이타닉’이라는 점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 ‘노팅 힐’의 로맨스가 영화일 뿐이라고 되뇌면서도 나도 모르게 꿈꾸게 되는 순간까지도 말이다. 리젠트 파크는 내게 절정의 안도감을 주었다. 진흙땅을 밟고 프림로즈힐에 오르는 내내 영화 ‘오만과 편견’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신발과 옷이 망가지더라고 그를 향해 걷는 걸음이 실상 불편하지 않는 건 그가 그곳에 있다는 환희의 순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 믿음에 보답이라도 하 듯 언덕에 새겨진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구절이 내 가슴을 툭 하고 흔들어 놓았다. 나는 프림로즈힐의 진흙으로 엉망이 된 신발을 빨지 않을 작정이다. 내가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여행의 유일한 기념품으로 남겨둘 생각이다. 아닌 척 해 봐도 나는 로맨스와 떨어질 수 없는 애다. 로맨스도 잘 쓸 수만 있다면 열심히 쓰겠다.  
길을 자주 잃다보면 바보같이 또 잃었어, 라는 자괴감이 들고 몸도 지친다. 그러나 길을 잃었다는 게 끝이 아니라는 걸 이젠 안다. 내가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나면 새로운 길이 어디선가 나타난다. 시간이 걸릴 뿐이지 가려는 그 길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는 지혜를 얻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이것이 더 이상 내가 길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유럽 기행은 내게 행운이었다.
여행을 무사히, 즐겁게 마치고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기 까지 큰 도움을 주신 장근명, 김성진 담당자님, 내 말과 글을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옮겨주신 노선정, 이민숙 번역가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만지고, 보고, 걸으며 잠드는 순간까지 함께한 수상자 동기에게도 내가 가진 표현력의 한계 때문이라 변명하면서, 지금보다 더 성장해 진심을 말하는 작가가 될 때까지 이 말로 대신하려 한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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