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글/김하섭_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2학년. 제9회 대산대학문학상 동화부문 수상. 1986년생

여행일정은 1월 21일부터였지만, 나의 여행은 1월 20일 저녁부터 시작됐다. 21일 새벽 5시 30분까지 인천공항에 집합해야 했는데, 당일 새벽에 출발해서는 마땅한 차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항 안에 찜질방이 있어서 노숙만은 면할 수 있었다. 앞으로 닥쳐올 여행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밤이었다.

약속시간에 딱 맞춰 집합장소에 도착했다. 다들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알고 보니 한 명만 빼고 모두들 공항에서 노숙을 한 상태였다. ‘아사다 지로’ 선생님과의 만남 때문에, 첫날 일정이 빡빡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더라면, 좀 더 편하게 공항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아쉬움덕분에 그래도 서로 빨리 친해지지 않았나 싶다.

다행히 일행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10박11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건 커다란 행운이다. 처음에는 서로를 어색해했지만, 조금씩 대화를 나눠보니 관심사도 비슷하고, 여러 가지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열흘이라는 시간은 새로운 것들을 접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좋은 사람들을 알아가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더 행복했다. 시상식 날 들었던 조언들이 떠오른다. 여러분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4명이 앞으로 생사고락을 함께할 동료라는 것. 동기라는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일단, 같은 시기에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사실로부터 경쟁심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반면, 같은 자리에서 함께 출발했기 때문에 남이 아니라는 동질감도 불러일으킨다. 개인적으로 열흘 동안의 문학기행은 남이었던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공항에서 서로를 떠나보내던 마지막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웠고, 쓸쓸했으니까. 아, 나만 그랬나?

첫 여행지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한국하고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이어서, 공항 밖으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가는 동안에도 약간은 얼떨떨했다. ‘여기가 정말 외국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일본에서는 주로 도쿄주변을 돌아다녔다. 긴자부터 시작해서 시부야, 신주쿠까지 시간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알차게 돌아다녔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의 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철도원, 파이란으로 유명한 아사다 지로 선생님과의 만남이다.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인당 하나의 질문만을 할 수 있었다. 그게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서 넘어졌을 때, 빨리 일어나는 법과 넘어지지 않고 늦더라도 완주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선생님의 작품처럼 참 수수하고, 간단명료한 말씀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 짧은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으로 더 깊게 파고들어왔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떠오른 화두는 ‘나는 여행 후에 어떻게 달라질까?’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달라지고 싶었다.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경험하고, 느끼면서 그동안 나한테 없었던 것을 찾아내고 싶었다. 물론 글도 좀 더 잘 쓰고 싶었고. 여행초기에는 그런 감정이 일종의 강박처럼 작용했던 것 같다. 시간낭비를 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것들을 봐야했고, 보는 걸로 그치지 않고 거기서 새로움을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해야했다. 단체 일정이 끝난 다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본의 밤거리로 나선 것도 그런 강박이 등을 떠밀었기 때문일 거다.

정말 많은 것들을 봤다. 아쿠아 스테이션부터 일본의 신사, 종이인형, 독특한 건물들, 밤풍경, 신기한 자판기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정작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거대한 고층 빌딩의 틈에 끼어있는 아주 좁은 건물이었다. 모양이 독특하다거나, 뭔가 특별한 물건을 팔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 건물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 우스운 건, 그 건물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이었다. ‘아 대단하네.’ 이게 다 였으니까.

일본에서의 이틀이 지나고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날아오는 동안, 그래서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앞서 보낸 이틀이 너무 허무하게 지나가버린 듯 느껴졌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경험들을 정리해보려 해도 조각난 기억의 파편은, 누가 머릿속에 물이라도 채워 넣은 듯 둥둥 떠다니기만 했다. 그래서 솔직히 일본에 대한 기억은 아사다 지로 선생님과의 간담회를 빼면, 지금도 별로 남아있지 않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기차를 타고 파리로 왔다. 일행이 모두 아침을 먹는 동안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무작정 역 바깥으로 달려 나왔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주변은 온통 뿌연 안개에 젖어있었다. 뿌옇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행3일차에 벌써 지쳐버린 듯, 그냥 이대로 집에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여행 첫날에 아사다 지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완주를 하려면 목적지까지 한 번에 가려고 해선 성공할 수 없다는 말씀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성급했구나 싶었다.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와 일행과 합류하고 처음 마주한 곳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파리의 오페라하우스였다.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아우라나, 특별한 감흥은 전해져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에서의 첫날은 파리 시내를 구경하고, 둘째 날은 액상프로방스 대학을 방문해서 현지의 한국학과 학생들과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볍게 한국의 문화나 한류에 대한 질문정도가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대단했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대강당에 모여 우리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질문이 왜 글을 쓰는지, 어떻게 쓰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쓸 건지를 물어보는 질문이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고, 또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대산문화재단 관계자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정말 귀중한 체험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본인의 글을 설명하고, 지나온 길과 지나갈 길을 설계할 수 있는 이런 기회는 분명 앞으로도 흔치 않을 것 같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언급하지 않은 나머지 일정들이 별로였던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의 뮤지컬과 요크탐방도 아주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다만, 지면이 한정되어있고, 기행문이란 게 ‘어디어디를 다녀왔는데, 어딘 어떻고 어딘 어떻더라’라고 시시콜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건 여행을 다녀온 다음 그 여행에서 얻은 소득이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달라지고 싶었고, 열흘간의 여행이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다만, 나한테 없는 걸 찾으려고 한 행동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여러 나라들을 돌면서 경험한 대부분의 것들이 내게는 새로운 것이었지만, 곰곰이 따지고 살펴보면 사실 내 안에서도 찾을 수 있는 그런 새로움이었다. 오히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내가 모르고 있던 나의 일부를 새롭게 찾아낼 수 있었다는 거다. 여행전의 나와 여행 후의 나는 모두 1로 동일하다. 다만, 그 1을 구성하는 요소의 비율이 조금 달라진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과의 싸움이다’라는 아주 오래된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유익한 여행이었다. 이번여행에서 책임감 있게 끝까지 우리들을 이끌어주신 전성우 과장님과 장근명 담당님. 적지 않은 인원이다 보니 가끔은 힘들고 짜증날 때도 있으셨을 텐데,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힘든 일정을 함께 소화해낸 진희누나, 기성이, 서령이에게도 고마웠다고, 잊지 못할 거라고 인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