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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천사의 피
날짜 25.03.18 조회 1317

베를린 천사의 피
글 _ 정예은(정이안) / 소설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1학년, 제23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자, 2003년생
소설 「검은 강」 등
 
예상하지 못했어요. 예정보다 일렀어요. 여행 중 흘러나온 피는 이상한 피였고 무서운 피였습니다. 벨트가 죄였던 날, 신발이 헐거웠던 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마트료시카, 우도 린덴베르크의 음악이 주문처럼 들리던 날.
아래는 이 유혈 사태의 복선, 전조, 그리고 징후예요:
 
하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비석 곳곳에 난 실금으로부터 물이 배어 나옴. 팔을 뻗어 한 방울 닦아냈을 때 저 멀리서 들린 웃음소리. 그를 비롯해 모든 소리가 고인 채 울리고 있다는 사실. 길을 헤매던 중 찾아낸 지하 비상 출구, 문은 닫혀 있음. 한 비석엔 전부 지우지 못한 ‘TRUTH’ 래커칠이 남아 있음.
둘, 베를린 신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 잉크 이전의 시대에서 필기구는 어찌나 날카롭고 뾰족했던지. 스타일러스 펜과 언어로 돌에 상처를 내는 장면. 그 옆엔 흠집 났으나 결코 깨지지 않은 유리잔들이 반짝임. 흐리고 두터운, 옅은 청록색 유리. 나는 언젠가 더러운 물을 담은 최초의 유리잔을 들고 최후의 문자를 새기는 인부들에게 부탁했을 것 : 좀 더 영원하게요. 네. 그렇게요.
셋, 낮 12시, 성 토마스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된 바흐와 멘델스존과 예수 그리스도가 빛을 두른 채 다가옴. 시선을 돌려도 잔상이 남음. 내 옆자리에 앉은 바흐, 성가대석에서 얼굴을 내민 멘델스존, 오르간 위에 올라선 예수 그리스도. 6년 전 12월 31일에 이곳 교회의 창을 향해 돌을 던진 남성을 떠올림. 그가 깨트린 스테인드글라스 패널 2개와 아르누보 양식 유리창 20개의 조각들은 어디로 버려졌나.
넷, 마우어파크 플리마켓에서 구입한 중고 카메라 두 대. 마운트에 장착한 슬라이드 필름 여러 장. 그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것은, 어린아이가 카메라를 향해 놀래키는 모습을 찍은 필름. 메모가 있음. ‘CARSTEW’, 아이의 이름일까.
다섯, 광장을 채운 시위대와 그래피티들. 우크라이나 국기 스티커, 한껏 쪼그려 앉아 쓴 듯한 ‘FREE GAZA FREE CONGO’, 건물 상단을 꽉 채운 ‘STOP WARS STAY TOGETHER’, 날아올라야만 쓸 수 있을 높이에. 
 
베를린 돔 전망대에는 어떤 방향으로든 천사들이 서 있어요. 온 베를린을 그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CCTV를 최소한으로 둡니다. 자유와의 약속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요. 이곳에서 눈맞춤은 신뢰보다도 무거운 기분을 남깁니다. 찰나 손가락을 얽듯이 서로를 바라봅니다. 그러고선 흐린 하늘 아래 굳은 모습으로 빠르게 지나쳐요. 그런 우리를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유디트 작가님은 인터뷰를 마치고 우리에게 제안하셨습니다. 이 도서관을 함께 돌아보지 않겠느냐고. 사실 그곳은 회원으로 등록된 이들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네 명씩 찢어져 떳떳한 척 검색대를 지나갔고, 작가님의 설명을 따라 도서관 내부를 돌아보았습니다. 등이 켜지지 않은 자리가 없고, 고개를 들어 우리처럼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같이 책을 넘기거나 타자를 치고 있었어요. 가끔 길이 좁아지는 구간에서는 도서관 이용자와 아주 가까워지기도 했습니다. 알 수 없는 그래프를 유심히 보던 남자를 기억해요.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저의 몸, 자아와는 무관해진 누군가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 알아차렸습니다. 한참 전에 피가 멎어 있었어요.
그 도서관은 빔 벤더스 감독의 1982년작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촬영한 장소였습니다. 작중 두 천사는 도서관 속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들 마음을 읽어요. 나는 걸어다닐 때마다 치마 펄럭이는 소리가 신경 쓰였어요. 이용자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그 순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기뻤어요.
집필을 이어 하겠다던 작가님과 헤어지고 밖으로 나왔어요. 시릴 정도로 추운 공기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지하철이 파업하는 바람에 오랜 시간 택시를 기다려야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피가 다시금 새어 나왔습니다. 이스트사이드갤러리를 들른 다음 마지막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좋은 음식과 술에 취해선, 락 공연을 기다리는 인파를 건너다보며 느리게 걸어갔습니다. 공항 가는 길에 마실 물을 사고 장시간 비행을 어떻게 견딜지 얘기하는데, 마트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보였습니다. 발갛던 그 얼굴.
 
모든 감각과 이미지, 암시로 이루어진 도시.
그곳에서 혜리 선생님의 마지막과 다희 선생님의 처음을 함께했습니다. 거대한 행복과 즐거움을 솔직하게 적지 못해 죄송해요. 함께 여행한 문우들이 건넨 농담과 표정을 앞으로 자주 따라할 거예요. 많이 미숙한 제게 상상 이상의 것을 쥐어 주신 대산문화재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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