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u Ehren Des Lieben Engels (사랑하는 천사를 기리기 위해)
글 _ 이가인 / 시인, 숭실대학교 영화예술학과 4학년, 제23회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 2000년생
시 「명랑함을 가져보라고」 등
1. 기행의 문을 열고
Q. ‘기행’은 무엇인가.
A. 첫째, 여행하는 동안에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일을 적은 것.
둘째, 기이한 행동.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종강 이후. 이미 유럽 시차로 살아가던 나에게 ‘기행’은 후자에 가까웠다. 잘 살고 싶을수록, 한계에 다다를수록 나만 아는 기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사람을 피해가며 편집실에서 3일 밤새기, 48시간 잠들기, 꿈에서 혼쭐나기, 바쁘다는 말로 만남을 미루고 고립되기. 사무치게 외로워하기. 울다가 웃기. 다 마치지 못한 영화 편집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커다랗고 거친 돌덩이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잠을 자다 깨도 불편하고, 밥을 먹다가도 불편했다. 잘 해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언제부턴가 잘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으로, 마음 안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너무 사랑하면 너무 밉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못하겠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던 일을 포기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쏟아부어 기적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심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소진된 내가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은 밍기적뿐이라는 것을. 두 손 두 발 다 드는 심정으로 깨달았다. 그리하여 장시간의 비행을 견뎌내고, 처음 마주한 ‘독일’에서 전자의 ‘기행문’을 적는다.
2. 천사에게.
베를린에는 천사가 살 것 같다. 베를린을 떠올리면 천사와 닮은 것들이 떠오른다. 항공 카메라로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던 비행기의 매끈한 날개. 건물 곳곳에 있던 아기 천사 동상들.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가는 검은 새. 건물 옥상에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줄 세워 앉아있던 단합력 좋은 새들. 십자가. 그래피티. 구름과 구별되지 않던 잿빛의 하늘. 안개. 숙소 창밖으로 보이던 국립공원의 공동묘지. 기척 없이 바뀌던 신호등. 좌우로 길게 뻗은 횡단보도. 나는 천사의 얼굴을 모른다.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천사를 이분법적인, 종교적인, 그 어떤 존재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천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음은 즉 자유로움이겠지.
볕이 들지 않는 흐린 하늘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곳은 또 없을 것이다. 도시를 거닐며 내 멋대로 천사의 얼굴을 상상했다. 어떤 날에는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새였고, 어떤 날에는 소년 합창단의 목소리였고, 어떤 날에는 누군가 남기고 간 흔적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공포나 슬픔으로 통용되는 죽음이 아닌, 먼저 떠난 이에 대해 회상하는 죽음을 보게 되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날개는 모두 다르겠지. 누군지 모르고 스쳐갔던 천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베를린을 거닐며 깨달았다. 웃는 얼굴, 우는 얼굴, 평온한 얼굴, 화난 얼굴, 멍한 얼굴. 공중의 날개. 떨어진 날개. 깃털 빠진 날개. 날아본 적 없는 날개. 모두 안녕. 어디에서든 잘 지내.
3. 이방인의 마음
언제나 ‘첫’은 낯설고 설렌다. 그러면서도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발길이 닿는 대로 가면 도착하는 길. 먹어보지 않아도 상상되는 맛. 반응이 예상되는 일. 적당히 맞추는 타이밍. 모든 게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생활 반경 속에서도 나는 종종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왔다. 꼭 들어맞아야만 하는 어딘가에서 자꾸 튕겨져 나가고 있다는 느낌. 남들은 다 잘만 적응하는데 나만 못하고 있다는 느낌. 잘 하고 있는 걸까? 잘 살고 있는 걸까. 의문이 늘어가던 하루에 갑자기 찾아온 문학기행은 평생 이방인의 기분으로 살아갈 거, 이왕이면 더 과감하게 낯설어져 보라는 응원 같았다. 오직 ‘문학’이라는 끈 하나로 연결된 낯선 이들과 살면서 처음 밟아보는 낯선 땅을 여행하는 일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자유로웠다. 이곳의 나는 말 그대로 이방인이기에 낯선 것이 당연했다. 낯선 문화, 낯선 언어, 낯선 얼굴, 낯선 표현, 그리고 그들에게 마찬가지로 낯설 나. 이곳에선 아무도 나를 모르고, 기행을 함께하는 우리는 베를린에서 보이던 협동심이 좋은 새들처럼 함께 걸어 다녔다.
마지막 날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 방문한 카페에서, 주문을 받던 직원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의 스몰토크를 하면서 낯설기만 한 땅에서 무언가 통한다는 느낌을 받은 게 신기했다. 어쩌면 낯설다는 감각은 내가 느껴왔던 것보다 더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정과 긍정의 측면이 아닌 더 광범위하고 넓고 세밀한 어떤 감각. 즉각적인 반응과 공감으로 이루어진 것들. ‘잘 모르는 것’이 주는 두려움이 호기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4. 에둘러왔으나 도착해보면 지름길
우리는 많은 길을 걸었다. 헤르만 플라츠에서 눈을 뜨면 매일 바쁘게 어딘가로 향했다. 처음 보는 메뉴에 도전하고, 낯선 길을 거닐고, 처음 보는 풍경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브란덴부르크문,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훔볼트대학교, 베르톨트 브레히트 박물관, 두스만 서점, 성 토마스 교회, 라이프치히 대학교, 메들러파사주, 마우어파크 플리마켓, 베를리너 돔, 베를린 신 박물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며칠간 바쁘게 오갔던 많은 장소들이 이따금씩 떠오른다. 말없이 바라보았던 순간, 걸었던 순간, 혹은 소리로 감상했던 순간. 눈으로는 풍경을 쫓고 두 다리로는 걸으며 입으로는 대화를 했던 순간. 이 기억들을 하나의 영상으로 짜깁기한다면 각기 다른 수많은 장소들이 결국에는 하나로 쭉 이어져 있었던 길인 것처럼 보일 거 같다.
기행의 마지막 날. 도서관에서 만나 뵌 ‘유디트 샬란스키’ 작가님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작가님께서는 인터뷰를 마친 이후 직접 도서관 안내를 해주셨다. 도서관의 공간에 대해 설명해주시던 작가님은 이러한 말을 덧붙였다. “포인트 A에서 B로 가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갈래로 갈 수 있게끔 설계가 되어 있는데, 이는 글쓰기에 대한 좋은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라, 우회를 해서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지름길이었다는 걸 깨닫기도 합니다.”
5. 끝과 시작은 동그랗게 손을 맞잡고
모든 여행에는 시작이 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별다른 생각이나 근심 없이 최대한 즐겼으나, 혼자 있는 순간이 오면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며칠 전까지 한국에서의 나는 나의 역할과, 내가 증명해내야 할 것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왔는데. 이곳에 오니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곳의 나는 그냥 걷고, 보고, 이따금 번역기와 몸짓을 활용하여 소통하고자 노력하는 여행자일 뿐. 모든 걸 다음으로 기약한 채 떠나온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나는. ‘우리’의 바깥에서 나는, 무엇으로 돌아가게 되는 걸까.
내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건 결국 쓰는 일이었고
헤어짐을 헤어짐이라 생각하지 않기 위해
기행을 함께해준 고마운 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한 사람 각각의 얼굴을, 웃음을, 습관을, 몸짓을 떠올리며.
모든 여행에는 끝이 있다. 그 사실이 여행을 하는 동안 다른 근심을 망각하게 해준다. 우리는 돌아갈 걸 알고 떠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젠가 끝날 지금을 생생하게 그리워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여행은 끝이 났습니다. 끝나지 않은 일상은 나를 기다리고 있고요.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그 일을 어떻게든 해내러 갑니다.